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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산성 C지구의 저수지와 수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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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진 |
| 팔당에서 잠실까지 한강유역 조망권 확보
늦었다. 이성산 아래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햇살이 엷어지고 있었다. 걸음을 재촉하여 산행을 하는데, 저만치에 산악자전거 한 대가 보인다. 저 자전거는 어쩌면 남한산성을 지나 여기를 거쳐 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자전거는 없고 단지 레이서만이 온몸으로 스스로를 산 위로 떠밀어 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역의 산행 옆을 나는 스쳐가고, 그는 뒤따라온다.
생각보다 쉽게 산성에 도착하여 '조각품'이라고 불릴 정도로 미려한 '옥수수알 성돌'이 비교적 잘 남아있는 남문지와 저수지 근처를 서성이는데, 뒤따라오던 자전거가 안내판 앞에 멈춰선다. 그가 가야 할 길을 가늠하는 중인가보다. 이제 곧 그는 산을 넘어 내리막길을 갈 것이다. 오름과 내림의 지극히 단순한 이치 앞에 나는 잠시 멈칫하였다. 나의 현재는 오르막과 내리막 사이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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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산성 남쪽 성벽의 일명 ‘옥수수 성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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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진 |
| 사람이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산성도 한 천년쯤 지나니 자연에 가까워보인다. 이성산성에는 자연으로 거진 다 돌아가다가 멈춘 토석들이 흩어져 있다. 잔석 위에 잠시 엉덩이를 걸치고 산 아래를 내려다본다. 높지 않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북으로 남으로 트인 시야는 왜 이곳에다 성을 쌓았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이성산은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에서 북쪽방향으로 내려와 길게 맥을 형성하는 줄기에 있다. 그 산의 정상에 쌓은 S자형 포곡식 산성이 이성산성(二聖山城)이다. 주변 지형을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축조되어, 강북의 적으로부터 배후의 평야지역과 한강유역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지금은 울창한 나무로 인해 시야가 많이 가려졌지만 하남시 일대를 두루 조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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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산성 A지구 2차 저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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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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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산성 A지구 2차 저수지 안의 배수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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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진 |
| 배수시설 잘 갖춰져
산성을 취재하다보면 간혹 서예를 생각하게 된다. "글자를 만드는 데에 주필(主筆)을 정해 두면 기강이 어지럽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디 주필만으로 격 높은 글씨를 이룰 수 있겠는가. 모든 사물, 세상의 이치에는 실허(實虛), 대소(大小)가 있고, 또한 대(大)와 소(小)에도 모두 세(勢)가 있기 마련이니, 이들이 조화를 이루어야 비로소 안정된 공간 구성을 이루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미학자 종백화는 "소세(小勢)로써 대세(大勢)를 완성시키는 이치가 있으니, 어느 때는 극히 작은 부위가 글자 전체의 결구를 좌우하기도 한다"하였다.
산의 '대세'를 타고 앉았다가도 '소세'를 거치고, 소세의 '허(虛)'를 보완하고 강화하는 이치가 이성산성에도 여지없이 들어있다. 동문지의 현문식 성문이 허(虛)를 보강한 것이라고 한다면, 두 군데 저수지는 허(虛)를 보다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양쪽 능선 사이의 비교적 낮은 곳을 따라 물이 흐르고, 흐르는 물을 적당하게 가두는 저수지는 물이 부족하기 마련인 산성의 약점을 가장 잘 보완한 것으로 비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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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산성 C지구 저수지 안쪽 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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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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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산성 동문지 성벽. 최고 17단에 이르는 성벽의 상단부만 조금 남겨두고 나머지는 흙으로 덮어 놓았다. 출수구가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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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진 |
| 이성산성은 배수시설이 잘 되어 있다. 물이 저수지에 모이도록 수로를 만들고, 모인 물은 일정량이 차면 다시 배수구를 통하여 성밖으로 빠져나가도록 설치하였다. 두 군데 저수지의 안쪽 배수구와 남문지 성벽 바깥쪽의 출수구가 잘 갖추어져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동문지에서도 볼 수 있다. 성 안의 물이 경사면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모이도록 하고, 그 물이 배수구를 통하여 성벽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였다. 성벽의 상단 일부만을 남겨놓고 나머지는 흙으로 덮어 놓은 동문지 상단 성벽에 출수구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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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산성 장방형 건물지와 9각 건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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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진 |
| 누가 산성의 주인이었을까?
이성산성은 그 동안 백제성으로 알려져 왔다. '이성(二聖)'은 백제시조인 온조, 미추홀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비류 두 왕과 관련 있는 이름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몽촌토성, 풍납토성과의 배치를 놓고 볼 때도 백제성으로 여겨질 법하다.
그러나 1986년 학술발굴조사가 실시되면서 출토된 유물 대부분이 신라시대의 것임이 확인되었다. 특히 1990년 7월, 3차 발굴조사 결과 6~7세기초의 필법으로 쓰여진 '무진(戊辰)'이란 간지와 '道使(도사)' '村主(촌주)'라는 관직명 등이 적힌 목간이 출토되면서 이성산성이 신라성으로 자리매김되어 갔다.
그런데 제8차 조사에서 고구려에서 사용된 고구려자와 고구려 관직인 욕살(褥薩)이 쓰인 목간이 출토되면서 이성산성이 고구려성일 가능성도 있다는 견해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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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산성 남문지 밖의 출수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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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진 |
| 다양한 학술 연구와 주장, 견해가 있고, 산성 전체면적의 10% 정도밖에 발굴되지 않았으므로 이성산성에 대한 명확한 판단은 좀더 연구되어야 하겠지만, 지금까지의 출토유물과 정황을 살펴볼 때 현재로서는 신라성일 가능성이 높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한강을 넘어 남쪽으로 접근해오는 적을 막아 배후의 평야를 지키는 방어성일 것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설명에 따르면, "총길이 1,925m인 이성산성과 성 내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한양대학교박물관의 주관으로 지난 1986년에 실시되었으며, 삼국시대 건물지(8각, 9각, 장방형 등)와 부대시설(문지, 배수구 등), 목간, 철제마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특히 "3차 발굴조사 결과 출토된 목간 전면의 명문기록 '戊辰年正月十二日 朋南漢城道使(무진년정월십이일 붕남한성도사)' 중 '무진년'은 603년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출토된 토기들은 황룡사, 안압지 출토 토기들과 유사하여 통일신라토기로 판명되며, 신라가 5세기 중엽 한강유역을 점령한 후 축조된 것으로 역사상·학술상으로 매우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된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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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산성 12각 건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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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진 |
| 한편 8각, 9각, 12각 등 다각형 건물지가 밀집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도 주목을 끌어 다양한 해석과 연구 논문을 내놓고 있다. 백제문화연구회 한종섭 회장은 "이성산성에서 발굴된 8, 9, 12각 등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 목적에 의하여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성산성 안내도에 따르면 건물들은 웅장하고 세련되었으며 잘 발달된 형태를 갖고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국내 유일의 '옥수수알' 성돌
이성산성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옥수수알 성돌'이었다. 2002년, 이성산성 10차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자료에 따르면 "2차 성벽은 1차 성벽 앞의 무너진 할석들을 정리하는 중 노출되었다. 2차 성벽은 뒤를 길게 다듬고 면석 앞부분이 둥글게 배가 나오게 다듬은 소위 '옥수수알 성돌'로 쌓았다"고 한다.
이성산성은 모두 두 차례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2차 성벽은 시기를 달리하여 축성된 것이 아니라 체성을 보강하기 위해 개보축한 구조물이라고 한양대박물관 측은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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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산성 남쪽 성벽의 일명 ‘옥수수 성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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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진 |
| '옥수수알 성돌'을 쓰다듬어 본다. 차갑고 매끈한 느낌이 손바닥에 전해져온다. 성돌을 일일이 다듬었을 노역의 고단함과 "이 사람아! 이음새 하나가 천년을 결정하는기여" 중요무형문화재 최기영 대목장이 출연한 한국투자증권 CF가 겹쳐 생각난다. 나는 그 두 가지를 함께 보고 있는 셈인가.
서로 엇갈리면서 6합으로 쌓은 성벽은 견고함보다는 유려미, 완강함보다는 부드러움을 먼저 느끼게 한다. 많은 석성들을 보아왔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성돌은 처음이다. 그 성돌이 쉽사리 걸음을 놓아주지 않는다. 넋 놓고 앉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산을 내려와 늦은 점심을 먹는다. 재첩국을 시켜놓고 둘러보니 식당 이름이 '강촌'이다. 산성과는 가깝고 강과는 멀리 있는데 강촌이라니. 아무렴 어떠랴. 국물맛이 끝내준다. 발굴 20년이 되는 올해, 하남역사박물관에서는 발굴 20주년 기념 특별전시회를 11월말까지 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