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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태 전도사는 정읍에서 신앙이 독실한 이성열 안수집사와 박부흥 집사의 7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주일이면 가족들이 다 아침 금식을 하게 했으며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부친 이성열 집사는 딸만 둘인 집에 데릴사위로 장가갔다. 그는 선교사가 순회 전도를 왔을 때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선교사를 따라다니며 북을 치며 전도하였다. 처가에서는 심히 못마땅히 했고 주일에 교회에 못 나가게 일거리를 벌려 놓았다. 그럴 때마다 이 마태는 밤새 기도하며 “주님! 내일 주일성수 할 수 있게 소나기가 억수로 쏟아지게 하소서” 기도하면 장대 같은 비가 쏟아져 일을 안 하게 되고 교회에 갈 수 있었다.
장인은 나 죽은 다음에 제사를 지내준다고 약속하면 많은 재산을 다 물려주겠다고 했지만, 우상숭배 할 수 없다며 보리쌀 두 말을 가지고 아내와 나와 온갖 고생을 하였다. 많은 재산은 믿지 않은 작은 딸이 차지하였다. 이렇게 믿음이 특심한 순교자 이성열 부친은 자녀들의 이름도 특별했다. 이 주일, 찬송, 마태, 만복, 찬예, 찬양, 찬순 순이다.
순교자 이마태 전도사
이마태는 아버지의 믿음을 본받아 항상 순교의 반열에 서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부친 이성열 집사는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안 한다고 정읍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문 중에 그 후유증으로 순교했다. 부친의 순교는 이마태에게 주의 종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 미션 학교인 대성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성경학교에 입학해 교역자가 되는 훈련을 쌓아갔다.
이마태는 1944년 24세의 나이로 큰형님이 장로로 봉직하는 부안군 동진면 오중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했다. 열성적으로 목회하여 자립교회로 이끌었다. 해방 후 좌익청년들은 불평 불만자들을 규합하여 관공서나 교회에 불을 놓기도 하고 지역 유지들을 테러하고 공산당에 가입하게 하여 온갖 악행과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마태 전도사는 동진면 대한독립국민촉성회 위원장을 맡아 공산당의 거짓된 사상과 악행을 폭로하였다. 그때부터 이마태 전도사는 공산당들의 테러 대상이 되었다. 1949년 전북 노회 추천으로 신학교에 입학해서 오중교회를 사임하고 정읍군 영원면 앵성리(鸚聲里) 앵성교회로 사역지를 옮겨 서울을 오가며 사역했다. 옛부터 앵성리는 들녘이 지평선이 안보일 정도로 넓을 뿐만 아니라 큰 과수원들이 있었는데 봄이면 꾀꼬리들이 떼를 지어 찾아와 노래 불러서 마을을 앵성리라 불렀다.
정읍 앵성교회
1950년 북한 공산당이 비극적인 전쟁을 일으켜 남하하자 장로교신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이마태 전도사는 한강을 헤엄쳐 건너가, 정읍까지 걸어가 교우들이 있는 앵성리까지 왔다. 또한, 형님이 계시는 동진면 오중리에 갔을 때 잠복 중이던 공산당에 잡혀 농장창고에 갇히게 되었는데 거기엔 큰형과 둘째형이 이미 붙잡혀 와 있었다.
왼쪽부터 딸 외손주 사위
다음날 이 전도사는 내무서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얼마나 심하게 고문당했는지 두 다리가 부러지고 두 손마저 부러뜨렸다. 농장창고에 갇혀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짐승처럼 두 달을 지냈다. 완전히 부스러진 몸으로 부안경찰서를 거쳐 전주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50년 9월 26일 후퇴하던 공산당들은 공무원, 교인, 우익 인사 등 1900여 명 중 1700여 명이 전주 형무소 뒤뜰에서 집단 학살되었다. 이마태 전도사도 이때 순교하여 주님의 품 안에 안겼다. 당시 교도소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와 피비린내에 형무소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고 한다.
2018 순교비 제막식에 후손과 교인들
이마태 전도사의 후손 가운데는 사위 심원보 원로목사와 딸 이경순 사모, 외손 심규환 목사(서울 제일감리교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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