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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염소' (마태복음 25:31-46)
흥남 부두의 생명선 (6.25 실화)
1950년 12월, 추위가 몰아치던 흥남 부두는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중공군의 포위망이 좁혀오는 가운데, 배를 탈 수 있는 시간은 단 몇 시간뿐이었고 인원은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수만 명의 피난민이 부두에 몰려들었지만, 군함과 수송선에 탈 수 있는 자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때 배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 앞에서는 냉정하고도 긴박한 **'구분'**이 일어났습니다. "군인인가, 민간인인가?", "아군인가, 적군인가?"를 확인하는 절차가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가진 보석과 돈뭉치를 내밀며 태워달라고 애원했지만, 배를 움직이는 함장에게 그것은 아무런 기준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우리 편인가?"**라는 단 하나의 소속만이 생사와 영원을 갈랐습니다. 배에 올라탄 자들은 살았고, 부두에 남겨진 자들은 죽음과 같은 절망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본문은 현대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단어, 즉 **‘심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모호하게 섞여 있는 상태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올 때,
모든 민족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반드시 둘로 나누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에는 중간 지대가 없습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 마지막 날에는 중간 지대가 없으며 오직 두 부류로만 나뉩니다.
이 분리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벌과 영생이라는 영원한 상태로 결정됩니다.
유대인들의 실제 목축 문화는
유대 광야에서 양과 염소는 함께 풀을 뜯습니다.
염소는 거친 풀과 나무껍질을 잘 먹어 길을 터주고,
양은 연한 풀을 먹으며 뒤따라갑니다.
유대인들에게 이 둘이 섞여 있는 모습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었습니다.
하지만 해가 지면 목자는 반드시 둘을 나눕니다.
양: 추위에 약해 서로 몸을 맞대고 따뜻한 우리 안에서 자야 합니다.
염소: 몸에 열이 많아 답답한 것을 싫어하며 따로 떨어져 자는 것을 좋아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를 보며 **"지금은 섞여 있으나 종국에는 각자의 본성에 맞는 처소로 갈 것"**이라는 사상을 가졌습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나누는 이유는
그들이 그날 특별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원래 양이고 원래 염소이기 때문입니다.
1. 참된 믿음의 증거: "열매"
양이 양인 이유는 그가 선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양의 본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본성은 반드시 '목자의 음성을 듣고 이웃을 돕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양과 염소의 차이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태생(Nature)'*본질(Nature)**과 **상태(Condition)**입니다. 그는 단순히 "착한 사람"을 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염소가 노력한다고 해서 양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난(Born-again) 자만이 양이 됩니다.
*"양의 행동을 해서 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양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양의 행동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2;12-13]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심어주신 '구원의 씨앗'이 온전히 자라 열매 맺도록 가꾸는 과정입니다.
즉, 내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성령의 강권하심]에 발맞추어 끝까지 순종하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길 [인간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순종을 시작하게 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동력 자체가 하나님의 강권하심에 있다는 점.
성령의 강권하심에 발맞추어 끝까지 순종한다는 것은 내 의지의 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뒤에서 밀어주시고 앞에서 이끄시는 성령의 바람(Pneuma)에 몸을 맡기는 과정입니다.
인간의 책임은 "내가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나도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여러분, 마당에 있는 사과나무를 보십시오. 그 나무가 아침마다 '오늘은 반드시 사과를 맺어야지, 포도를 맺으면 큰일 나'라고 결심하며 애를 씁니까? 아닙니다. 그 나무가 사과나무인 이상, 가만히 있어도 그 뿌리로부터 사과나무의 진액이 흘러나와 결국 사과를 맺게 됩니다.
반대로 가시나무에게 사과를 매달아 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사과나무가 됩니까? 그것은 '장식'일 뿐 '생명'이 아닙니다.
양의 행동도 이와 같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양의 진액(생명)**이 우리 안에 흐르게 되면, 지극히 작은 자를 돕는 일은 '노력'이 아니라 '생리적인 현상[생명을 유지하는 여러 가지 현상]'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엔에르게오(Energize, 역동적으로 일하심)'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순종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책임 있는 순종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그 흐름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거룩한 응답'**
내가 양으로 태어났기에 양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한 노예 상인이 거듭나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과거에 그는 채찍을 휘둘러 노예들을 굴복시켰습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본성이 '양'으로 바뀌자, 그는 더 이상 채찍을 들 수 없었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안에 들어온 그리스도의 본성이 고통받는 자를 형제로 보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노예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과 명예를 던졌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했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저들의 눈물을 보게 하시니, 내가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난 양의 본능적인 행동입니다.
양의 가장 큰 특징을 **
양은 목자의 음성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미련할 정도의 순종을 상징했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에게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일어났습니다.
마태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이익을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목자의 음성이 들리자마자 그 권위에 압도되어 반응한 것입니다.
이는 염소처럼 자기 길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 없이는 살 수 없는 양의 **'전적인 의탁'**을 보여줍니다.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 이 여인은 양들의 특징인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 헌신'**을 보여줍니다.
비싼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았습니다.
곁에 있던 사람(유다 등 염소적 성향을 가진 자들)은 비용을 '계산'했지만, 여인은 오직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만큼 드렸으니 이만큼 복을 주시겠지"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에 매료되어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잊은 채 전부를 드리는 모습이야말로 **'무의식적인 거룩함'**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묘사할 때 항상 자신들을 '양'으로 비유하며, 전적인 의존이 생존의 비결임을 고백했습니다
오직 목자의 인도 없이는 한 걸음도 뗄 수 없음을 고백하는 자가 바로 '양'입니다.
다윗- 목자이신 하나님을 절대 신뢰함 -"여호와는 나의 목도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3편)
자신이 똑똑하고 강하다고 믿는 사람은 '염소'의 특성을 가진 자입니다.
양을 구분하는 시금석으로 **'말씀(목자의 음성)에 대한 반응'**을 꼽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이는 성경이 선포하는 객관적인 복음의 교리를 알아보고 그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양은 목자가 이끄는 '좁은 문'과 '험한 길'을 의심 없이 따라갑니다.
설령 그 길이 세상의 논리와 맞지 않더라도 목자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 비유를 설명할 때,
양들의 **'망각'**에 주목합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양들은 자신이 베푼 선행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왜입니까?
그들에게 사랑은 '구원받기 위해 억지로 짜낸 고행'이 아니라,
거듭난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열매였기 때문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지극히 작은 자를 향해 흐르는 것뿐입니다.**'본능적 삶'[인간이 타고난 본능에 따라 자연스럽게 행동하며 살아가는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배가 고파 우는 것을 보십시오. 그 아이가 '내가 울어야 부모님이 나를 돌봐주겠지?'라고 계산해서 웁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을 가진 존재의 본능적인 반응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양으로 태어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고통받는 자들, 지극히 작은 자들을 볼 때 마음이 아프고 그들을 돕고 싶어지는 것은, 그가 '천국 가기 위한 점수'를 따려는 계산이 아니라, 새 생명을 가진 자의 본능적인 영적 반응입니다.
무의식적인 선행: 양들은 "우리가 어느 때에 주님을 대접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는 그들의 선행이 구원을 얻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 아니라,
새로운 본성에서 흘러나온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었음을 의미합니다.
2. 염소의 실패: 염소의 가장 큰 특징을 **'목자가 필요 없는 태도'**로 봅니다.
염소들이 정죄받은 이유는 그들이 엄청난 악을 행해서가 아닙니다.
그들 안에 주님의 마음이 없었기에,
낮은 곳에 임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유다는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보고 "이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며 효율과 계산을 따졌습니다.
염소는 신앙생활조차 **'계산기'**를 두드리며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본성이 없기에,
모든 가치를 물질과 자기 유익으로 환산합니다.
유다는 주님을 따랐으나 주님의 '음성'이 아닌 자신의 '계획'을 따랐던 염소였습니다.
양은 무력하여 목자를 의지하지만,
염소는 매우 영리하고 독립적인 동물이었습니다.
무리를 이끄는 것은 대개 염소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염소를 뜻하는 단어 중에는 '지도자' 혹은 '권세자'라는 의미가 포함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목자의 통제를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가려는 고집'**을 상징했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자신의 지성, 도덕성, 종교적 열심으로 충분히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교만한 자아'가 염소의 본질입니다.
염소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결정합니다.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기보다 자신의 판단과 기호를 우선시합니다.
염소들은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어느 때에 주님을 돌보지 아니하더이까?"라고 반문합니다.
이 질문 속에 감춰진 염소의 심리를 이렇게 분석합니다.
염소는 그들에게 선행은 '투자'입니다.
만약 주님이 직접 나타나셨다면 그들은 대단한 대접을 했을 것입니다.
염소는 보상을 줄 만한 대상(주님)에게는 잘하려 하지만,
보상을 줄 능력이 없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는 무관심합니다.
염소들이 **'자신이 염소라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심판대 앞에 선다'**는 점을 매우 두렵게 강조합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등장하는 이 청년은 겉보기에 완벽한 '양'처럼 보였으나, 속은 전형적인 '염소'였습니다.
"내가 모든 계명을 다 지켰나이다. 무엇이 더 부족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 성취를 자랑스럽게 목록으로 들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자기 신뢰'**라고 부릅니다.
주님이 "네 소유를 팔라"고 하셨을 때 그는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결국 자신의 소유(자아)가 주님의 음성보다 컸던 것입니다.
염소는 결코 자기 중심성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라는 리스트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본질적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평생 종교적인 삶을 살았다고 자부했기에,
주님의 거절 앞에서 당황하고 항변합니다.
이것이 복음을 지성으로만 받아들이고 생명으로 소유하지 못한 자들의 비극이라고 말합니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거듭남의 부재'**입니다.
염소는 양의 행동을 흉내 낼 수 있습니다.
구제도 하고, 기도도 하며, 성경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염소가 아무리 양처럼 행동해도 그 본성이 염소라면 결국 염소의 길로 간다"**고 단언합니다.
염소에게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유입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오거나 자신의 이익이 침해당할 때,
즉시 본래의 날카롭고 공격적인 염소의 본성(자기중심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 일을 하는 이유가 '나의 의'를 쌓기 위함이라면,
그리고 '지극히 작은 자'를 향한 무의식적인 긍휼이 없다면,
당신은 단지 양의 무리에 섞여 있는 염소일 뿐입니다.
지금 당장 당신의 '행위'를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고 목자 되신 그리스도 앞에 죄인으로 엎드리십시오.“
염소로 분류된 이들의 문제는 단순히 '악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Omission)'**에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종교적 형식에만 매몰되어,
곁에 있는 주님의 형제들을 외면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특징이라고 지적합니다.
"당신은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본성을 받아 양이 되었습니까?
당신의 삶 속에 나타나는 '지극히 작은 자'를 향한 긍휼은 당신이 하늘에 속한 자라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스스로를 속이지 마십시오. 심판의 날은 도적같이 올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