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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이탈주민(北韓離脫住民, North Korean defectors) 또는 탈북자(脫北者)는 1953년 휴전 이후 북한 지역[1]에서 이탈하여 대한민국에 정착한 사람을 가리킨다.
대한민국이 아닌 제3국으로 망명한 경우에도 '탈북자'라는 표현은 사용되는 반면, 한국 내 제도상의 용어인 '북한이탈주민'이라는 표현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이외에 새로운 터전에서 삶을 시작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새터민'이라는 표현도 존재하며, '탈북민', '북향민'이라고도 한다. 명칭 문단 참조.
2. 명칭
과거 냉전 시기에는 귀순 용사라는 표현을 쓰다가, 1990년대 이후로는 탈북했다고 해서 탈북자가 일반화되었다. 참여정부 시기 새터민이라는 표현을 법제화했으나, 여전히 탈북자가 가장 많이 쓰인다.
또한 많은 탈북자들이 새터민이라는 단어에 혼란과 거부감을 느낀다고 표현하여서 현재는 정부 차원에서도 북한이탈주민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이는 1997년 제정된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에 근거한다. 해당 법에서는 북한이탈주민에 대해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에 주소, 직계가족, 배우자, 직장 등을 두고 있는 사람으로서 북한 지역을 벗어난 후 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아니한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흔히 북한이탈주민을 지칭함에 있어서 '탈북자', '탈북민', '새터민', '북한이탈주민' 등이 혼용되고 있다. 통일부를 기준으로 2005년까지는 관습적으로 '탈북자'로 지칭하다가 탈북자라는 단어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크다는 이유로 2005년부터 새터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밝은 어감의 단어를 골랐다고 하지만 정작 북한이탈주민들 내에서는 '새터'라는 단어가 오히려 자신들의 정체성을 부인하며 차별적인 표현이라는 이유로 반발이 심했다.#[2]
'새터민'이라는 단어가 조금 관심 있는 일반인은 물론 심지어 북한 관련 업계 종사자들 사이에서도 남발되는 경향이 있으나, 이런 이력 때문에 어지간하면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다. 물론 소수의 북한이탈주민들 중에서 스스로를 새터민이라고 지칭하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북한이탈주민들 내부에서는 여론이 워낙 안 좋아 사장된 단어이니 상대가 대놓고 원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먼저 쓸 필요는 없다.
결국 2008년부터는 법률 용어인 '북한이탈주민'을 전면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북한이탈주민'이 길다보니 줄여서 탈북민이라는 단어가 많이 쓰인다. '자'(者)라는 표현을 공식 명칭에 들어있는 民으로 대체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3. 역사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온 사람들의 역사는 분단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대표적으로 실향민의 범주에 해당하는 경우가 있는데, 6.25 전쟁 이전에 존재했던 38선을 지금의 북-중 국경을 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넘어서 대한민국으로 향한 사람들이 이에 해당한다. 탈북민들이 북한 함흥 이북의 함경도[4] 출신이 많다면 실향민들은 평양, 함흥 이남 지역 출신들이 많다.
또한 과거 50년대 대약진운동 - 문화대혁명 같은 마오쩌둥 시기의 사건들로 인해 중국에서 북한으로 도망치는 중국 조선족 청년들이 많았고,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북중 국경지대의 조선족들이 생필품을 얻으러 북한에 넘어오던 시절이 있었지만, 덩샤오핑이 시작한 개혁개방의 효과가 84년경에는 북중국경에까지 미치면서 처지가 역전되었다.
현재 가장 널리 통용되는 의미로의 '탈북'이 시작된 것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북한 경제가 붕괴된 때부터다. 1995~2000년까지는 중국공산당이 탈북자들을 사실상 묵인했었다. 그 때는 경제 개방한다고 큰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면서 중국 대륙에 살던 탈북자들이 북송을 피해 한국으로 매년 1000명 이상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한중관계에서 북한이탈주민의 인권 문제가 주요 문제가 되었다.
통계 자료에 의하면 1998년까지 남한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은 매년 많아야 수십 명 수준에 그쳤지만 1999년에 최초로 한 해 입국자 수가 100명을 돌파했고, 2002년에는 1,142명이 입국했다. 이후 2008, 2009년 입국자 수가 3,000명 수준까지 육박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북한과 중국 공안의 단속 강화 등으로 2012, 2013년에는 1500명대에서 정체 상태에 있다. 이 이후로는 꾸준히 그 수가 감소하여, 2019년에는 1,000명 정도였다. 2020년에는 229명, 2021년에는 63명으로 감소했다.
가장 대표적인 탈북자의 감소 이유로는 감시의 강화가 꼽히고 있으며, 게다가 2020년에는 전 세계적인 코로나 19 확산으로 중국 쪽에서 디지털 장비를 동원해 북-중 국경 감시를 강화하고 자국내 이동에도 여러 제한을 두면서, 주성하 기자의 유튜브에 따르면 한달동안 하나원 입소자가 3명 밖에 안될 정도라고 한다.
코로나-19가 종식되면 탈북자 수는 어느 정도는 회복될지도 모르나, 김정은 정권이 2020년 이후 한국 문화를 탄압하며 탈북 차단에 혈안이 되어 단속으로 줄어들거나, 새로운 방식으로 탈북하려는 수요가 동시에 있을 수 있어 예측이 힘들다.
2016년 두만강 유역 대홍수로 두만강 가의 탈북 기도자의 은신처로 사용되던 마을이 감시가 가능하도록 위치가 옮겨졌으며, 2010년대 후반 들어 중국도 국경 전 지역에 거쳐서 자동화된 감시 시스템을 완성하였다. 북한도 이 수준은 못해도 감시 초소를 늘리고, 국경 경비를 강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코로나-19가 유행한 이후로는 남한으로 입국하는 탈북자가 급격히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물론 동남아까지 이동 통제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2020년 상반기 남한 입국 탈북자가 147명으로, 2020년 탈북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코로나가 종식되기를 기다리며 은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022년 6월 기준 한국으로 입국한 누적 탈북자의 수는 대략 3만 3천명이다. 사망자, 이민자 등을 제외하면 2022년 현재 한국에서 실제 거주 중인 탈북민은 2만 7천여명으로 추산한다.
2022년 6월까지 탈북자의 출신지역은 다음과 같다. 출처는 통일부 북한이탈주민 통계.
구분 | 남 | 여 | 합계(명) |
강원 | 220 | 374 | 594 |
남포 | 72 | 87 | 159 |
양강 | 1,526 | 4,390 | 5,916 |
자강 | 75 | 163 | 238 |
평남 | 450 | 646 | 1,096 |
평북 | 371 | 502 | 873 |
평양 | 439 | 331 | 770 |
함남 | 772 | 2,085 | 2,857 |
함북 | 4,834 | 14,926 | 19,760 |
황남 | 269 | 202 | 471 |
황북 | 183 | 282 | 465 |
개성 | 46 | 33 | 79 |
기타(재외 등[5]) | 97 | 126 | 223 |
계 | 9,354 | 24,147 | 33,501 |
2000년대 초중반부터 남성 탈북민보다 여성 탈북민이 늘어나, 현재 거의 3:8의 비율로 여성이 많다. 2022년 기준 두만강 국경지대에 위치한 함경북도 회령, 무산, 온성 출신이 한국 정착 탈북민의 절반이며, 함경북도 국경지대의 어떤 마을은 주민이 모두 탈북했다는 주장이 돌기도 할 정도다.#
이 세 곳은 중국에서 TV에 출연하는 친척을 보고 자신도 탈북한다든가, 고향에서의 잘못을 사죄한다든가, 동료도 어느새 탈북해있다는 등의 사례가 있다. 그리고 중국과의 국경 지역에 있다보니 다른 지역보다 한국 문화 수용이 빠르다.#
서울대 평화통일연구원의 설문 등을 바탕으로 보면 2010년대 초반 이후로 함경북도, 함경남도 일부 지역 출신[6]이 많다. 그 중에서도 혜산처럼 북중 국경에 가까우면서 인구가 집중된 지역일수록 탈북민이 많다.
자강도는 인구가 2022년 129만명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71만명인 양강도는 물론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개성 31만명의 인구를 감안하면 탈북자가 인구에 비해 유달리 적다. 개성 수준으로 탈북하면 300명은 넘어야 한다. 구체적인 원인은 오리무중이나, 군수시설이 많아 북한 내에서 가장 이동 제한이 심한 곳이라는 자강도의 특성이 작용한 듯하다.
자강도를 제외하면 정부 불만의 수준이 아니라 북한을 빠져 나오는 난이도에 의해 탈북자의 수가 결정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개성에서는 공단을 닫게 만든 정부에 대한 불만이 심하다는 말도 있어 #
양강도와 함경북도는 북한 인구의 13% 정도를 차지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전체 탈북자의 76.6%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윗 문단의 주장대로라면 북한 인구의 1.2%를 차지하는 곳에서 50%의 탈북민이 나온 적도 있다는 말도 된다.
그래서 탈북민들이 북한 전체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이곳은 사투리부터가 북한에 관심없는 일반적인 한국 사람에게는 사랑의 불시착 같은 드라마 이전에는 생소한 곳[7]이었고, 비가 꽤 적게 오는 등 황해도 같은 곡창지대의 특성도 없기 때문이다. 중국과의 교류도 다른 지방보다 많은 곳으로 추정된다.
2000년대에는 생계형 탈북이 주를 이루었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는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거의 벗어난 대신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한국 문물이 북한에 유입되자 정치적 동기, 자아 실현 등의 이유로 탈북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통제가 강화되어 하류층 탈북민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오히려 상류층의 탈북이 늘어났는데 이들의 특징은 자신은 안 오고 자식만 탈북시킨다는 점이다. 이렇게 탈북한 북한 상류층 자제는 오히려 북한에서 송금을 받아 남한에서 생활을 하며 상위 명문대를 다닌다.
표준어인 '문화어'[8]를 수준 높게 교육 받은 고위층이나 지식인, 개성 인근 출신의 경우 몇몇은 말투도 표준어와 다를 게 없어서 본인이 밝히지 않는 이상 잘 드러나지도 않으며 개성이나 그 인근 황해도 출신을 제외하면 북한에서도 잘나가는 집안 출신이 많은 만큼 생계의 걱정 없이 유복하게 생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태영호 의원의 책처럼 상류층 탈북민들끼리 동창회하는 케이스도 있다.[9]
다만 서울대 통화평화연구원의 '북한사회변동조사'라는 설문 자료에서는 북한 사회를 상층 20%, 중층 30%, 하층 50% 가량으로 구분할 때 2012년 이후에도 탈북자의 주관적 계층 인식이 상층이 10%, 중층 60%, 하층 30% 선에서 변동만 보인다는 자료가 있다. 그나마 중층이 증가하는 편이라고 한다.
이 것은 북한의 시장화로 중하류층도 겉으로 보이는 생활이 개선된 모습을 보고 과거의 기준으로 북한을 판단하여 하류층이 줄어들었다는 판단이 개입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2015~2016년경에는 보수 정권이 집권하여 지위가 높은 인물들의 탈북이 주목 받았다. 대표적으로 해외 북한식당 종업원과 주영 북한 공사를 지냈던 태영호의 탈북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해외 노동자들도 탈북하고 있다.[10]
2020년에는 주 이탈리아 대사 대리였던 조성길이 탈북하여서 한국에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도 부지사 정도에 해당하는 함경북도 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도 탈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공개 활동을 삼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2015년 7월 4일 동해에서 표류 중이던 북한 어민들 5명 중 3명이 귀순의사를 밝히자 북한은 이들 5명 전원의 송환을 주장했다. 정부는 물론 귀순의사를 밝힌 북한 주민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겠다는 입장을 전해 사실상 이들의 귀순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이번엔 귀순의사를 밝힌 어민들의 인적사항을 요구했다고 한다. #
이들은 정착 초기에는 국내 여러 곳에 분산된 임대아파트를 배정받고 산다. 인천 논현동 같이 가장 많이 모여사는 곳도 이곳에 거주하는 탈북자가 한국 정착 탈북자 중 차지하는 비율이 2022년 기준 6.6%로 추산된다. 일반주민보다 112 신고가 적다는 말도 있다.# #
특이한 것은 이들의 거주지는 대부분의 한국 도시와 같다. 일단 북한 주민 모두가 한국인이라는 점도 있고 함경북도, 함경남도 등 북한 지역 요리를 파는 식당 외에는 큰 차이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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