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판조서 반민족행위특별재판부
피고인
박흥식 반민법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단기 4282년[1949] 3월 26일 오후 1시
서울地方法院 대법정에서
재판장 재판관
신태익[申泰益] 재판관
오택관[吳澤寬] 재판관
홍순옥[洪淳玉] 재판관
이종면[李鍾冕] 재판관
김호정[金鎬楨] 검찰관
노일환[盧鎰煥] 서기관
최종언[崔宗彦] 列席
피고인은 신체의 구속을 받지 않고 出廷하다.
변호인
배정현[裴廷鉉],
박응무[朴應茂],
박원삼[朴元三],
김병관[金炳觀] 각 出廷함.
재판장은 피고인에 대하여 左와 如히 신문하다.
문 성명, 연령, 직업, 주거와 본적지 如何.
답 성명은
박흥식, 연령은 47년, 직업은 회사원, 주거는
서울市 鍾路區 嘉會洞 177번지, 본적은
平安南道 龍岡郡 龍岡面 玉桃里 387번지
문 공무원의 職에 在한 者는 아니냐.
답 없습니다.
재판장은
피고인
박흥식에 대한 반민족행위처벌법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심리한다는 것을 宣하다.
검찰관은
공판청구서 기재 범죄사실과 같이 공소사실을 진술하다.
재판장은 피고인
박흥식에 대하여 본건 피고사건을 說示하고,
문 此 사건에 대하여 진술할 점은 없느냐.
답 신문에 응하여 순차 진술하겠습니다.
문 해방 전후 國事 처벌을 받은 일은 없는가.
답 없습니다.
문 가족은.
답 母와 妻, 1남 3녀 도합 7인 가족입니다.
문 교육 정도는.
답 소학교를 졸업하고, 其外 한문을 多少 학습하였을 뿐입니다.
문 재산은.
답 興韓財團에 기부하고, 나머지 현 시가 동산, 부동산 합하여 약 數三千萬 원 가량 소유하고 있습니다.
문 종교는.
답 아무 종교도 믿지 않습니다.
문 취미는 如何.
답 사업 취미 이외에는 별반 취미가 없습니다.
문 독서는 않는가.
답 사업에 困沒하여 독서할 여가가 없습니다.
문 정치문제, 인생철학, 민족문제 등에 대하여 연구하여 본 일이 있는가.
답 없습니다.
문 세계민족문제에 대하여서는 如何.
답 일제 치하에 일본인 취급과 조선인 취급에 대하여 현저한 차이가 있다는 것과 식민지문제 등에 대하여 다소 연구하여 보았습니다.
문 최초에는
평남 鎭南浦에서 미곡상을 경영하고, 그 다음에는 鮮光堂印刷株式會社를 조직하고, 同 회사 사장에 취임하여 인쇄업에 종사하였나.
답 그렇습니다.
문 단기 4258년(대정 14년)[1925]에 상경하였는가.
답 단기 4259년(대정 15년)[1926]에 상경하였습니다.
문 상경하여 鮮一紙物株式會社 창립, 同 사장에 취임하였는가.
답 그렇습니다.
문 同 4264년[1931] 9월경에 株式會社 和信商會를 창립하고, 同 사장에 취임하였는가.
답 그렇습니다.
문 東洋拓植株式會社 감사를 위시하여 和信商事株式會社 취체역 사장, 株式會社 和信 취체역 사장, 京城紡績株式會社 취체역, 北鮮製紙化學株式會社 취체역, 朝鮮石油株式會社 취체역, 濟州島興業株式會社 취체역, 朝鮮生命保險株式會社 취체역, 朝鮮勸業株式會社 취체역, 朝鮮工學株式會社 취체역, 大興貿易株式會社 취체역, 南滿紡績株式會社 취체역, 東光生絲株式會社 취체역, 京仁企業株式會社 취체역, 株式會社 每日申[편집자주-新]報社 감사역을 역임하였는가.
답 그렇습니다.
문 지금 진술한 각 회사의 株를 소지하고 있는가.
답 네. 소지하고 있습니다.
문 朝鮮總督府 物價委員會 위원,
朝鮮中央賃金委員會 위원,
朝鮮總督府 保護觀察所 촉탁보호사,
國民總力朝鮮聯盟 이사,
鍊成部 연성위원,
國民總力 京畿道聯盟 참여,
國民總力 京城府聯盟 이사,
大和同盟 심의원,
興亞報國團 상임위원,
京城司法保護委員會 참여,
朝鮮貿易協會 이사,
朝鮮工業協會 상무이사,
帝國發明協會 朝鮮本部 이사, 財團法人 私立
新光商業學校 이사장,
朝鮮輸出工業協會 이사,
朝鮮實業俱樂部 부회장, 財團法人
器械化國防協會 朝鮮本部 이사,
食糧協會 朝鮮本部 평의원,
被服協會 朝鮮支部 이사,
東亞經濟懇談會 朝鮮委員會 위원,
排英同志會 상담역,
國民動員總進會 감사 등을 역임하였는가.
답 흥아보국단,
대화동맹,
동아경제간담회 조선위원회,
배영동지회,
국민동원총진회 등에는 전연 관계가 없었고, 其 이외의 사실은 그대로 틀림없습니다.
문 화신상회의 조직은 如何.
답 주식회사 화신, 株式會社 貿易社, 주식회사 백화점 3부로 조직되어 있으며, 화신건물 내에 3부가 들어 있습니다.
문 興韓財團은.
답 흥한재단도 화신건물 내에 있습니다.
문 흥한재단의 재산은 얼마나 되는가.
답 처음에는 1억6천만 원 정도였으나 현재에는 其億 가량 될 것입니다.
문 동양척식회사에는 언제 입사하였는가.
답 해방 3, 4년 전부터 입사하였습니다.
문 東拓에 株는 얼마나 소유하였던가.
답 1천株 소지하고 있습니다.
문 동양척식회사 감사역은 조선인으로서는 피고인 1인뿐이던가.
답 그렇습니다. 본인은 平감사역으로 취임하였습니다.
문 동척에 입사케 된 동기는 如何.
답 당시
南총독이 본인에게 대하여
中樞院 참의를 하라고 권하므로 본인은 정치문제에는 간섭하기 싫다고 하였더니, 그러면 동척 감사역에 취임하라고
南 총독과
상내[上內] 동척 이사가 누차 권고하였으므로 부득이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문 동척은 조선의 고혈을 빨아먹는 착취기관임을 其 당시 알고 들어갔었는가.
답 일한병합 당시는 식민지정책을 써왔었으나 본인이 들어갈 당시에는 일본의 이민은 중지하고 토지 매수도 중지하였었고, 주로 금융기관에 투자 운영하였기 때문에 단순한 착취기관이라고 인정할 수 없기에 취임하였습니다.
문 그러면 피고인은 경제적 실권을 잡기 위하여 취임하였는가.
답 그렇습니다.
문 이민이나 토지매수하는 것만 착취이고, 다른 방법에 의한 것은 착취라고 보지 않는가.
답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마는 입사한 동기의 또 하나로는 이런 기관에도 입사할 수 있으면 들어가 발언권이나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문 不二興業 등과 자매 관계가 있는가.
답 불이흥업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문 동척에서 이익 배당을 받아 왔는가.
답 연 7分 이익 배당을 받았습니다.
문 해방 직전까지 조선에서의 토지, 건물 등 소유권, 담보권 7, 8할이 일본인 소유인 것을 아는가.
답 압니다.
문 흥아보국단을 결성한 사실이 있지 않은가.
답 그런 사실은 없습니다. 당시
민규식[閔奎植],
조병상[曺秉相],
김연수[金䄵洙] 등이
흥아보국단, 또는
土曜會를 조직하겠다고 2, 3차 준비 중에 있었으나,
총독부 당국에서 諸 단체를 통합하라고 하여
臨戰報國團을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문 피고인은 검찰관에게 대하여는
흥아보국단 결성한 사실이 있다고 하였는데 如何.
답 그렇게 말한 사실은 없습니다.
문 단기 4274년(소화 16년)[1941] 10월 9일
임전보국단 결성 時에 피고인도 그 준비위원이었던가.
답 준비위원으로 활동한 사실은 없고, 이사로 되었던 일은 있습니다.
문 임전보국단 취지는 如何.
답 전시통제 하의 애국운동과 청년 鍊成이 목적이었습니다.
문 그뿐만 아니라 정신적, 노무적, 皇道思想 통일, 국가우선주의, 저축물자 공출, 방위체제 등 내용이라는데 如何.
답 본인은 그런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그 단체에서 기부받기 위하여 본인을 이사로 정하였으므로
김연수,
민규식, 본인 등 3인이 균등 분담으로 각 20만 원을 기부하였습니다.
문 同年 10월 13일
고원훈[高元勳]과 동반
平壤 가서
임전보국단 결성에 대하여 유세한 일이 있는가.
답 其時 본인은 화신회사 관계로
평양에
고원훈과 동반한 사실은 有하오나 본인은 하등 유세한 일은 없었고,
고원훈이가
임전보국단 지부 설치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문 검찰관에게 대하여는 유세하였다고 말하였는데 如何.
답 그와 같이 말한 일은 없습니다.
문 단기 4274년(소화 16년)[1941] 10월 29일부
매일신문 기재 내용을 보면
임전보국단의 결성태세 정비라는 제목 하에 내외 정세가 날로 긴박하고 있는 이때에 2,400만 민중이 敢然히 일어나 황국신민으로서의 모든 직책을 다할 때는 이때라고 힘차게 외치며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은 그동안 운동 방침의 기초는 더욱 견고하여지고 규약과 강령도 작성되었으므로 드디어 來 10월 하순경에는 빛나는 결단식을 성대히 거행하기로 되었다.
임전보국단은 임전체제 하에 반도 민중이 누를래야 누를 수 없는 불타는 애국열성을 바야흐로 자발적으로 만든 강력한 애국운동기관으로 이 운동은 결단식을 앞두고 바야흐로 2,400만을 한 덩어리로 하여 본 궤도에 올라서게 되었다. 오늘날 반도 민중이 일반적으로 영예있는 병역으로 나갈 기회는 못가졌다 하여도 皇恩에 보답하기 위하여 정신적으로는 물론이고 물질적으로 勞務로 모든 힘을 기울여 총후의 봉공을 하여 병참기지 반도의 진가를 발휘하여 황국신민으로서의 부끄러움 없이 하는 것은 이때이다. 그리하여
보국단에서는 민중의 要望에 발을 맞추어 전 조선 방방곡곡에 힘차게 외쳐가지고 일대 애국운동을 일으키게 되어 마침내 결단식까지 거행하기로 된 것이다. 그 다음에 결성식 앞두고 각도에 유세대 파견이라는 제목 하에 前項과 같이
조선임전보국단에서는 오는 10월 하순을 기하여 결단식을 거행하기로 되었거니와 이보다 앞서 來 10일부터 19일까지는 本團의 준비위원인
고원훈,
이성환[李晟煥],
박영효[朴英孝],
최린[崔麟],
김사연[金思演],
박흥식,
김천성[金川聖],
한상룡[韓相龍],
김동환[金東煥],
김시권[金時權],
김연수,
신태악[申泰嶽] 등 諸氏를 각도에 파견하여 민간 유력자와 간담하여 성대한 강연회도 열어 2,400만 민중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此 애국운동에 참가키로 되었다. 더욱이 本團에서는 애국에 불타는 정열을 각 조선에 크게 외친 바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혹은 위원들이 「꼬마」채권을 가지고 가두로 진출하여 파는 등 감격한 실천을 밟아온 터인데 일반이 자진하여 내는 기부금도 받고 있는데, 이번에 다시 위원들이 동원되어 각도에로 赤誠의 유세를 하게 된 것은 애국운동에 한 개의 박차를 가하는 것이라 하여 자못 기대되고 있다. 그런데 간담회를 여는 지역과 日字와 파견위원 다음과 같다 운운 담화를 발표하였는데 如何.
답 대개 그런 의미로
每新에 발표된 것은 사실이오나 본인은 회사 사업에 多忙한 관계로 유세한 일도 없고, 가두에 나가 채권 등을 판 일도 없습니다. 전술한 바와 如히 본인은 회사관계로
고원훈과 같이
평양에 갔다 온 사실뿐입니다.
문 동년(소화 16년)[1941] 9월 12일
每新에 총력의
임전보국단 합동위원회서 결성 결의석상 閔, 金, 朴 3氏가 현금 20만 원을 제공한 미담이라는 제목 하에 오늘 두 단체의 위원이 한자리에 모여서 단시일이나마 여러 가지 파란곡절을 돌파하고서 일심단결이 되어서 지극히 원만스럽게 보조를 같이하게 된 것은 최선의 길이었으며, 동시에 우리들로서도 경하스러운 일이다. 머지않아 발회식을 보게 된 차제에
조선임전보국단의 사업이 2,400만 반도 민중 전체에 대한 것이니만큼 우리 세 사람이 많은 금액을 내는 것도 어떠할까 싶어서 의논한 결과 적은 돈이나마 내어놓게 된 것이다. 전조선 유력자들에게 바라건대 권함을 받는 것보다 어디까지라도 자진하는 애국의 정성으로서 많은 돈을 국가사업에 기부하여 우리 반도 민중으로서 안하면 안될 소기의 목적 달성에 매진함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동시에 세 사람이 20만 원을 내어 놓았다는 목적도 결국은 여기에 있는 줄 안다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는가.
답 신문 기자들이 본인의 자택 방문 또는 전화로 경제계 대표로 담화를 발표하여 달라고 하므로 본인은 적당히 기재하여 달라고 부탁하였을 뿐입니다.
문 피고인은 그렇게 말하지만 이 담화 발표에 대하여 책임은 있지 않은가.
답 책임을 아니 진다고는 하지 않으나 대개가 신문 기자들이 쓴 것입니다.
문 아무리 그때의 신문이
총독부의 기관지이기로서니 피고인이 감사역으로 있던 신문(
每新)에서 피고인 같은 사람이 말할 수 없는 말을 썼다고는 그때 사정으로 보더라도 믿어지지 않지 않는가.
답 그러하지마는 본인은 용어도 잘 모르고 사업 관계로 多忙하여 적당히 내어 달라고 부탁하였으므로 그 발표에 대하여 책임을 아니 진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문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이사를 지냈는가.
답 그렇습니다.
문 단기 4275년(소화 17년)[1942] 7월 1일부
매일신문에 「민심의 동향은 어떤가」라는 제목 하에 민심은 민첩하게 의식주의 문제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첫째」, 입을 것을 대중용품이 극히 부족하다. 제조업자들도 고급품만을 제조하는 경향이 있다. 대중용의 튼튼한 의류를 풍부히 제조하도록 지도해주기 바란다. 「둘째」, 먹을 것은 일편 증산운동을 하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節米運動을 실천하고 있는 오늘날 농민은 적게 생산하여 가지고 자기의 식량만을 확보하려는 경향이 많아 이 원인을 잘 조사하여 농민의 식량을 확보하고 증산에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셋째」, 주력은
주택영단을 좀더 활용하며 특히 도회지 교외의 주택과 교통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황민화운동은 內鮮結婚을 장려함이 좋다. 청소년에게는 희망과 광명을 갖게 함과 동시에 유치한 사람에게는 정당한 사업에 참가케 하며 商工에 많이 참가케 하기 바란다. 연맹기구를 일반 민중에 대해서 더 밀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실천, 사상을 가열하게 하기 바란다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는가.
답 대개 그런 담화를 발표한 것은 틀림없습니다마는 이것도 신문 기자에게 부탁하여 기자가 적당히 쓴 것입니다.
문 매일신문사 감사역이 된 것은 틀림없는가.
답 사실입니다.
문 매일신문은 어떤 신문인지 아는가.
답 조선총독부 정치와 일본 국책추진 기관지입니다.
문 그런 줄을 알면서 왜 每新 감사역이 되었는가.
답 권고에 의하여 되었습니다.
문 이상 담화 발표 중에 內鮮結婚함이 좋다고 하였는데 진정으로 나온 말인가.
답 본인은 內鮮結婚을 희망한 일도 없고, 생각하여 본 일도 없습니다.
문 피고인이 하지 않은 말을 기재할 이유는 없는데 如何.
답 전술한 바와 如히 본인은 경제 방면에 대하여 기자의 요청에 의하여 적당히 기재하여 달라고 부탁하였을 뿐 內鮮結婚 문제에 대하여는 언급한 일이 없습니다.
문 조선인으로서 일본인과 결혼하면 혼혈의 염려되는데 피고인은 如何히 생각하는가.
답 본인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문 대화동맹 심의원이 된 일이 있지 않은가.
답 대화동맹 심의원이 된 일은 전연 없습니다.
문 검찰관에 대하여는 인정하지 않았는가.
답 검찰관에 대하여 관계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문 如何한 관계인지 내용을 아는가.
답 관계가 없으므로 내용도 모릅니다.
문 동아경제간담회 조선위원이 된 일이 있지 않은가.
답 없습니다.
문 피고인은 단기 4275년(소화 17년)[1942] 12월 16일
全日本産業經濟代表者 戰力增强懇談會에 참가하기 위하여 일본
東京에 갔던 일이 있는가.
답 갔던 일이 있습니다.
문 如何한 경로로 갔으며, 간담회의 내용은 如何.
답 일본
동조[東條] 수상으로부터 상경하라는 전보가 來到하였으므로
총독부에 들어가 來電 이유를 물어본 즉 총독이
京城府 내에서 조선인 5인을 右 간담회에 참가하도록 추천하여 일본정부에 보고하였는데, 본인 1인만 선발되었다 하므로 본인은 이를 거절하였으나 참석하라고 권고하므로 참석케 되었으며, 其時 전국 경제인 대표 500여 명이 일본 궁궐에 집합하여 日皇에게 列立 면접하고 돌아왔을 뿐입니다.
문 其時 日皇은 如何한 말을 하였는가.
답 日皇께서 별반 담화는 없었으며, 다만 면접하였을 뿐입니다.
문 피고인은 日皇을 면접 후 단기 4275년(소화 17년)[1942] 12월 16일부
매일신보에 「拜謁의 光榮의 感泣」이라는 제목 하에 「今日의 간담회는
大東亞戰爭을 이겨 나가는 광대한 전략적 규모와 생산력 확충에 부응하는 산업경제인의 새로운 결의를 보인 회의라고 생각합니다. 긴박한 전시하 새로운 생산력 확충에 대하여 모든 시책과 필요한 의견의 소통을 圖하였는데, 그 기대는 크게 기대되는 바 있어 我等은 각 직장에서 발분하여 총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특히 參內하여 拜謁의 光榮에 浴하고 感泣하였는데, 我等은 大御心을 奉體하여 필승의 신념을 가지고
大東亞戰爭 완수에 모든 힘을 바쳐 산업경제인으로서 負荷된 중책을 다하기를 깊이 肺肝에 銘하였습니다」의 의미의 담화를 발표하였는가.
답 동경 每新 기자가 본인에게 대하여
매신에 담화를 발표하여 달라고 하기에 본인은 적당히 발표하여 달라고 부탁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발표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바는 아닙니다.
문 그 발표 중에 日皇을 拜謁하고 光榮에 浴하여 感泣하였다고 하였는데 사실 울었는가.
답 感泣이라는 문구는 日皇을 면접하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이므로 기자가 그와 如히 기재한데 불과한 것입니다. 感泣한 사실은 없습니다.
문 光榮으로 생각한 것은 틀림없는가.
답 其時 光榮으로 생각한 것은 사실입니다.
문 피고인은 단기 4276년(소화 18년)[1943] 12월 6일부
每新에 「拜謁 1주년」 「聖慮 奉體 생산증강」 「光榮의 산업경제대표 담화」라는 제목하에 「지난 소화 17년[1942] 12월 16일 이날은 황공하옵게도 伊勢新宮 御 친배하옵시고, 還幸하옵신 천황폐하께옵서는 즉시 산업경제 진흥 전력증강에 내리옵시는 大御心으로부터 전국 산업경제계 대표를 宮中에 부르옵시어 列立 배알을 吩咐하옵신 광영의 날이다. 조선에서도
임번장[林繁莊],
송원순일[松原純一],
송본성[松本誠],
소림채남[小林采南],
박흥식 5씨가 이 光榮에 浴하였는데, 1년 후에 左月 左日 재차 당일의 감격도 새로이 일층 매진할 결의를 誓하기 위하여 당일의 光榮者 5氏와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부터
진전[津田] 홍보부장,
중송[重松] 실천부장, 본부로부터 鑛工국장 대리
미화[美花], 기획과장이 列席하여 조선 神宮 大前에서 오전 9시 30분 엄숙한 祈誓式을 거행하였다. 식후 4氏는 감격에 넘쳐 다음과 같이 담화를 하였다.
「충성으로 봉공」
박흥식 작년 12월 16일 나는 산업경제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특히 반도 출신으로서는 오직 한 사람으로서 황공하옵게도 拜謁의 光榮에 浴하였는데 지척에서 龍顔 奉拜한 때의 감격은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 산업 경제에 있는 사람들은 이 황공하옵신 大御心에 奉副코자 더욱 노력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이제 결전의 양상은 나날이 심각 가열해서 戰力의 증강은 刻刻으로 급무가 되고 있는데, 이후 一砲一機는 明日의 十砲十機보다도 낫고 明日의 十砲十機는 再明日의 百砲百機보다 나은 전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安閑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직장에 있는 者는 직접 전력화되는 것과 간접 전력화되는 것을 불문하고 오직 증강에만 용기를 내어 최후의 승리를 얻기까지 매진하여야 됩니다.
대동아전쟁 개전 이래 우리 반도 2,500만의 赤子가 얼마나 皇民됨의 자각을 높이어 얼마나 聖業 翼贊을 위해서 충성을 다해 왔느냐 하는데 대해서는 새삼스럽게 말할 것 없습니다. 오직 내지 동포와 참다운 일체가 되어 대동아 건설을 위해서 全靈을 바치고 있다는 것은 명백히 단언할 수 있어 그것을 경축하는 바입니다」라는 담화가 발표되어 있는데 사실인가.
답 이 역시 신문 기자가
每新에 담화를 발표하여 달라고 하기에 적당히 내어 달라고 위촉하였을 뿐이옵고, 일일이 초안을 기록하여 준 것은 아닙니다.
문 신문에 발표된 후 기재 사실을 보았을 터인데 자기 의사에 별반 위반된 점은 없는가.
답 네. 그 기재 사실을 자인합니다.
문 남차랑[南次郞] 총독이 조선을 떠날 때에
每新 석별사를 발표하였는가.
답 네.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문 단기 4275년(소화 17년)[1942] 5월 30일부
每新에 「영원히 못잊을 慈父」라는 제목 하에 「재임한 6년동안 내선일체의 완성이라는 큰 길을 향하여 조선 통치의 온갖 힘을 기울여 지원병제도, 창씨제도, 징병제도라는 큰 열매를 맺고, 재임 6년동안의 자리를 후진에게 맡기고 사임하는
南총독은 아마도 만족하실 것이다. 우리로서는 어머니와 같이 자애가 깊은 총독을 보내게 되어 참으로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南총독이 조선 통치에 남겨 놓은 가지가지의 공적은 2,400만 반도 동포의 머리에서 영구히 기억되어 있을 것입니다. 후임으로 오시는
소기[小磯] 대장과
전중무웅[田中武雄]씨는 모두 조선과는 특히 인연이 깊으신 이들로서 두 손을 들어 마음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라는 석별사를 발표하였는가.
답 대개 그런 의미로 석별사를 발표한 사실은 有하오나 내용에 있어서 다소 틀린 점이 있습니다.
문 如何한 점이 틀리는가.
답 南총독을 慈父라고 기재된 부분이 틀립니다. 본인은 그러한 본의도 없었고, 그와 같이 발표하여 달라고 부탁한 일도 없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創氏에 대하여서도 내심으로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본인은 創氏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상 기재 사실은 마음대로 쓴 것입니다. 또 징병 云云에 대한 발표도 피고의 본의가 아닙니다.
문 피고인은 창씨개명 않았다는 것을 자랑으로 말하지만 피고나
한상룡 등은 창씨를 안하고도 지낼 수 있을만한 정도이었으니 그것이 도리어 일제와 친했다는 증거이고, 또한 그때 정책이 창씨를 강요하지 않고 자의로 했다는 표본으로 피고나
한상룡 등을 그대로 둔 高等政治임을 아는가.
답 본인도 강요당하였으나 하지 않았습니다.
문 단기 4276년(소화 18년)[1943] 11월 10일
매일신문에 「이 戰果를 생각하고, 학병의 더 분기를 바란다」라는 제목하에 「특별지원병제도 발표로 반도 2,500만이 기쁨이 절정에 달하고 있을 때 거듭하여 이런 대전과를 접한 것은 皇軍 장병들에게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는 동시에 앞으로 어떻게 하여 이 尊考한 노고에 보답할까 하고 적지 않은 큰 부담을 느끼는 바입니다. 아무리 생산력이 풍부함을 자랑하는 敵 美, 英이라 할지라도 이대로 나간다면 머지않아 우리 皇軍앞에 굴복하리라고 확신됩니다. 이런 때를 처하여 반도 청년, 학도들은 한층 더 자력의 숭엄한 임무를 깨달아 오는 20일 지원병 모집 기한까지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부 지원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라고 담화를 발표하였는가.
답 네. 대개 그런 의미로 발표하였습니다.
문 이러한 담화 발표는 너무 혹독한 듯한데 如何.
답 주위 환경에 의하여 그와 같이 발표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좌우될 줄로는 믿지 않았습니다.
문 과도한 발표라고 생각치 않는가.
답 前述한 바와 같이 피고 본의가 아니었으나 주위 사정에 의하여 과도한 기사를 내게 되었습니다.
문 단기 4277년(소화 19년)[1944] 9월 25일부
매일신문에 「근로정신 계몽에 민간 유력자들 궐기」라는 제목 하에 근로 보국에 불타는 일념을 품고서 싸우는 반도의 中堅과 지도적 입장에 있는 다수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준비 중이던
國民動員總進會는 昨 24일 오전 10시 반부터
염전[鹽田] 鑛工국장,
서광[西廣] 경무국장을 위시하여
일립[日笠] 노무과장,
팔목[八木] 보안과장 등이 임석하고 각 士들의 다수 인사가 참석 하에 성대히 결성되었다. 회식은 먼저 국민의례를 □□고
유억겸[兪檍兼]씨를 이사장으로 추대하고, 먼저 육해군, 공군에 감사하는 결의문을 결의하고 발기인측을 대표하여
안흥성환[安興晟煥]씨 경과를 보고하고, 이어서 취지서 규약을 통과시키고 前項과 같이 役員을 선거하였는데 이사장에
야스고씨가 추대되었다. 이리하여 同
총진회가 정식으로 결성되어 지극히 중대한 단계에 돌입한 이때를 당하여 물심양면으로 우리 반도가 부하한 使命은 실로 중대하다. 일동은 총력을 결집하여 聖地에 선서를 행하여 금후 근로동원의 철저를 맹서하였다. 뒤이어
鹽田 광공국장으로부터 시국은 일시도 유예를 두지 않는 이때를 당하여 반도에 노무동원에 대한 기대가 실로 큰데 아직도 일부에서 징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은 유감천만이다. 이번 민간측에서 총궐기가 되어 크게 □ 단체로
총진회가 탄생된 것은 기쁜 일로서 유종의 미를 거두기를 바란다. 또한
西廣 경무국장으로부터 이번 전쟁은 노무와 兵이 한덩어리가 됨으로써 전쟁을 수행할 수가 있는 것인데, 국민의 의무인 노무동원에 이해가 부족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번 유력한 중견측을 망라하여 자발적인 挺□운동단체가 결성되었으므로 이 방면에 大 推進力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고 격려하고, 뒤이어 본사
금천[金川] 사장으로부터 근로 동원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전쟁을 좌우한다. 이렇게 중요한 노무 동원은 軍官의 힘으로서 원활을 기하기 어려운데 이번 유력측을 망라하여 이 방면의 추진회를 만들었으므로 반드시 커다란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믿는다고 단체 결성을 祝務하는 의미 심장한 축사가 있었다. 뒤이어 황국국민서사를 고창하고
鹽田 광공국장 發聲으로 聖壽萬歲 奉唱한 후 同 13시경 발회식을 마치었는데 금후 役員會를 열고서 지방 순회강연, 간담회 개최 등에 관한 구체적 방법을 결정하여 활동을 개시할 터이라 한다. 감사결의문
광고 未曾有의 國難에 際會하여 御稜威下 황군 장병 日應奮戰 필히 驕敵을 擊碎함으로써 결국의 승리에 導할 바를 信하고, 我等 그 노고에 감사의 뜻을 표함.
役員 진용, 「고문」
한상룡,
윤치호[尹致昊],
최린[崔麟],
김천성[金川聖],
박상준[朴相駿], 「참여」
여운형[呂運亨],
최남선[崔南善],
안재홍[安在鴻], 이사장
안성환[安晟煥], 「상무이사」
신태악[申泰嶽],
유광렬[柳光烈],
백천청수[白川靑樹], 이사
서원종린[瑞原鍾麟],
광전종욱[廣田鍾郁],
안흥식[安興植],
장덕수[張德秀],
신흥우[申興雨],
이산영준[二山榮俊],
김활란[金活蘭],
김홍량[金鴻亮],
김병규[金秉奎],
반거희적[半居熙迪],
양상향[梁相鄕],
대원화식[大原和植],
서상일[徐相日],
목원도정[牧原度定],
고산호웅[高山虎雄],
송강세종[松岡世宗],
임창수[林昌洙],
최변묵[崔辨黙],
한림[韓林], 감사
김성수[金性洙],
방응모[方應模],
월성종만[月城鍾萬],
대산광설[大山光卨],
박흥식 운운 기사가 有한데 如何.
답 본인은 이 결성식에 참석한 일도 없고 토의한 사실도 전연 없습니다.
문 단기 4278년(소화 20년)[1945] 4월 4일부
매일신문에 「大詔를 받자옵고 光榮을 빛내오리, 發奮精勵 聖恩에 奉副」 제목 하에 국정 참여의 반갑고도 고마운 이 획기적 사실은 반도 2,600만 동포의 오직 감격과 감사리에 皇國에 바치는 충성심으로 충만하여 있다. 더구나 황공하옵게도 4월 1일에는 천황 폐하께옵서 국정 참여에 관한 조서를 喚發하옵시어 반도 동포로 하여금 皇國 국정에 翼贊할 길을 열어 주옵신 것이다. 이는 오직 一親同仁의 廣大無邊하옵신 御聖慮를 내리어 주신 바로 이 광영의 감격은 끝없으며 고마우신 聖慮에 奉答하기를 맹서하는 반도 민중은 臣民된 책무를 다할 것을 이때 더욱 깊이 가슴에 간직하여야 할 것이다. 먼저 우리는 스스로 돌아보아 항상 皇民으로서의 자질을 연마하여 이 중책을 다하기에 발분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대동아전쟁을 싸우는 우리 국민으로 더구나 이 전쟁을 완수하기에 정진하는 臣民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기에 조금도 유감없는 수련을 쌓고, 나아가서는 이 수련을 실천으로 발휘할 자격을 더욱 굳게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국정 참여의 큰 뜻을 빛내고 皇軍에 萬分之一이라도 奉答하도록 다같이 자각하고 충성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라고 담화를 발표하였는가.
답 그때 담화를 발표한 것은 틀림없습니다마는 자세한 내용은 기억되지 않습니다.
문 피고인은
배영동지회 결성에 관계한 일이 있지 않은가.
답 관계한 일이 없습니다.
문 단기 4277년(소화 14년)[1944] 잡지 「
朝光」(9월호 제9항)에 同年 7월 12일 오후 7시 30분 於
부민관 대강당,
배영동지회 결성대회, 상담역
박흥식, 「선언」皇師 대륙에 聖戰하기 2주년, 我純忠無比한 정예는 항일세력을 구축 섬멸하여 그 武威는 中外에 퍼졌다. 국민 또한 擧國 一致하여 동아 신질서의 건설에 매진하며 銳兵 철벽의 安固를 기하고 있다. 이때에 당하여 頑迷하고 老獪한 영국의 擧措는 傍若無人하여 언어에 强한다. 吾等은 금일까지 切齒隱忍하였으나
天津 租界문제는 드디어 제국의 단호한 租界 隔絶을 보았다. 대개 이는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국민 또한 일치하여 이를 지지한다. 그러나 당황한 영국은 외교 교섭으로써 一切를 호도하려 하여
日英東京會談이 열리려 한다. 그러나 그 오만불손하고 음험사악하고 奸智策謀를 일삼는 그 癌腫을 剔抉 芟除하지 않으면 그 禍害는 마침내 백년에 미치리라. 그러므로 吾等은 屈하여 和를 바라지 않는다. 이에 전국에 檄하여 國憂의 士 서로 모여
배영동지회를 결성하여서 동아 □亂의 巨魁 영국을 응징하여 그 세력을 분쇄하기를 기함. 7월 12일
배영동지회.
강령
一. 吾等은 영국의 모든 授蔣 행동을 배격함.
一. 吾等은 동양평화의 公敵인 英세력을 구축하기로 期함.
一. 吾等은 일치 협력하여 장애를 배제하여 興亞大業의 달성을 期함.
이런 내용의 記載가 有한데 如何.
답 본인은 그 결성대회에 참가한 일도 없고 그후 역시 관계한 일이 없습니다.
문 단기 4274년(소화 16년)[1941] 9월 7일부
每新에 「
臨戰對策協力會에서 가두로 債券奉公隊, 明日 70명이 11개소에 동원」이라는 제목 하에 지난 4일 밤
부민관 대강당에서 강연회를 열고 총후 반도 민중들에게 애국의 충성으로 국가를 위하여 궐기하라고 부르짖는
임전대책협력회에서는 또 다시 7일 오후 1시부터 3시 반동안 이동□호[伊東□昊],
이가진호[李家軫鎬],
가산린[佳山麟],
한지룡[韓支龍]씨와 김□계[金□季] 사장 등 역원 76명이
경성부 내 11개소로 총동원하여 가지고 노상에서 통행인들에게 1원 짜리 꼬마 채권을 팔기로 되었다. 이것은 애국운동은 이름보다도 실천이 중하다는 협력회의 운동방책을 실천하는 첫걸음으로 특히 가두에 나가서 민중들에게 자발적인 애국 충성을 발휘하도록 지도하는 동시에 저축 보국운동에 협력하라는 것으로 뜻 깊은 일이다. 그래서 이날 채권을 팔 때에는 강제하지 않고 일반에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자손의 장래를 위하는 마음으로 채권을 사자는 취지를 철저히 인식시키기로 되었는데 채권 파는 장소와 담당 회원의 氏名은 다음과 같다.(個所와 氏名 생략) 黃金町隊(일본생명 前)
고원훈,
서원종린,
박흥식,
장우식,
박창서[朴彰緖],
김위남[金緯南] 云云 기재되어 있는데 如何.
답 본인은 이때에 참관한 일도 없고, 따라서 가두에 나가 채권을 판 일도 없습니다. 당시 신문을 보고 본인 氏名도 기재되어 있는 것은 알았습니다.
재판장은
사실 심리 속행한다고 告하고, 次回 期日은 추후 지정한다고 宣하고 폐정하다.
단기 4282년[1949] 3월 28일
반민족행위특별재판부 제1부
재판장 재판관
신태익 서기관
최종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