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로부터 사약을 받은 며느리
시아버지로부터 사약을 받은 세자빈
1646년 인조는 세자빈 강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조선 역사상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죽이는 참극이 일어난 것이다.
1627년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에게 시집을 와서 한때는 인조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세자빈이
시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 까닭은 무엇일까?
소현세자의 부인 세자빈 강씨는 흔히 '강빈(姜嬪,1611~1646)'이라 칭해진다.
강석기(姜碩期, 1580~1643)의 딸로 1627년 12월 소현세자와 가례를 행하고 세자빈이 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세자빈이 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원래 세자빈으로 간택된 여인은 윤의립의 딸이었다
그러나 윤의립의 조카 윤인발이 1624년 이괄의 난에 가담하여 처형당한 것을 이유로
김자점 등 대신들이 강하게 반대하면서 간택은 없던 일이 되었다.
결국 세자빈을 재간택하게 되었고, 9월 29일 서인계 명문가문인 강석기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서인세력은 ' 무실국혼을(無失國婚 : 국혼을 잃지 말자)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왕실 혼사를 무엇보다 중시했는데 소현세자의 혼례식이 첫 케이스가 된 것이었다
조선후기 왕비를 배출한 가문이 대부분 서인인 것도 인조반정 이후의 이러한 정치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1627년 17세의 나이로 한 살 연하의 세자에게 시집을 온 강빈, 그러나 그녀의 세자빈 시절은 결코 화려하지만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의 발발이 그녀의 인생길을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1637년 삼전도 굴욕으로 상징되는 항복의 조건으로 강빈은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의 신분이 되어 심양으로
보내졌다.그러나 심양에서의 8년 간의 생활은 세자와 세자빈의 의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청나라를 과거의 야만국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정치, 문화의 강국임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국제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간 것이었다.
소현세자의 세자빈 강씨는 대가 센 여인이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강빈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숙소인 심양관에 도착했을 때 일행은
모두 200여 명에 달했다.당시 명과 전쟁중이었던 청나라는 소현세자 일행에 대한 경제적인 처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사는 수가 생기느라고 , 어렵게 살던 심양 생활 3년이 되던 해 청태조 누르하치의 열두 번째 아들인
심양의 팔왕이 은자 500냥을 보내면서 조선과의무역을 원했다.
청에서 필요한 것은 종이, 면포, 생필품, 호랑이 가죽, 수달피 등이었다.
원래 여진족은 수렵과 채집을 주로 하는 민족이라 농경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생활 필수품 이나 도구 등의 생산시설도 매우 열악하여 거의 교역에 의존했다.
그런데 명이 적대국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더 이상 그런 물건들을 구할 수 없어 대신
조선을 교역 대상으로 선택한 것이었다.청국과 본격적인 무역이 시작되자 심양관의 형편이 피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래량이 커졌고, 이 모든 거래를 강빈이 직접 챙겼다
거기다 청의 요구를 조선 조정에 전달하는 공식문서인 장계도 강빈의 손을 거쳤다
중국 장사꾼들도 조선 물품을 구할 일이 생기면 심양관으로 찾아와
심양관은 도깨비 시장처럼 붐볐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모은 심양관의 부는
은 1만냥, 금160냥에 이르렀다.
그런데 조선조정에서는 이러한 강빈의 상행위를 좋아했을까요?
답은 당연히 노우~~그 이유를 알아봅시다!
첫째, 원수 나라의 오랑캐들을 상대로 돈벌이를 하는 데다가, 둘째, 장사를 천시하는
조선에서 볼 때 세자빈이 학문을 닦지 않고 돈벌이를 한다는 것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세자빈은 차치하고 양반이 장사를 하면 양반 신분을 포기해야 되는 나라가 발싸개 조선이었다
인조는 점점 강빈을 싫어하게 되었다
소현세자 일행이 심양관에 온 지 5년이 지나자 청 조정에서는 더 이상 양곡을 대줄 수 없고
그 대신 땅을 줄테니 직접 농사를 지어 먹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강빈은 청에 포로로 잡혀 온 조선인들을 돈을 주고 속환한 다음 청 조정에서 준 땅에서 농사를 짓게 했다
청에서 준 땅은 여섯 곳이었는데 비록 황무지 였으나 농사에 부적합한 땅은 아니었다
강빈이 조선인 포로들을 시켜 선진 조선 농법으로 열심히 농사를 짓도록 하자 수년 후에는 필요한
양식의 3배 이상을 수확하게 되었다. 게다가 수확한 곡식의 품질이 청나라 것보다 훨씬 뛰어나
자연히 강빈 농장의 곡물은 청나라 왕족들에게 높은 값에 팔려나갔다
강빈은 사람을 시켜 농사를 짓는 데도 수완을 발휘했고
그렇게 해서 벌어들인 돈으로 해방시킨 조선인 포로가 수백 명에 달했다
이럴 때 강빈의 아버지인 강석기(姜碩期)가 죽었다는 소식이 심양관에 전해졌다. 강빈은 아버지의 상을
치르기 위하여 조선으로 갔지만 인조는 며느리가 친정에 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강빈은 아버지의 상도 치르지 못하고 허탈하게 심양으로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인조로서는 자신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준
청나라와 잘 지내는 소현세자나 강빈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멍충한 임금~ 제가 못난 것은 생각하지 않고... 하긴 자기 자신이 멍청한 것을 알면
그냥 거기가 천당인 것이다. 1645년 8년 만에 귀국한 후 두달 만에 남편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녀의 아들이 세손이 되지 못한 현실에 부딪히자 강빈은 격렬히 시아버지 인조에게 저항했다.
세자빈의 오라비들인 강문성과 강문명까지 곤장을 맞고 죽음을 당하자 강빈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인조의
침실로 달려가 하소연을 늘어놓으며 통곡하는가 하면, 국왕에게 올리는 조석 문안도 한때 중지해버렸다.
이제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정적이 되어버렸고
분노한 인조는 강씨를 유폐시켜 궁궐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갈등의 끝은 결국 세자빈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갈등의 골이 깊었던 상황이 계속 되던 중인 1646년(인조 24) 1월 3일, 인조의 수라상에 오른
전복 구이에 독이 든 것이 발견되었다
강빈의 나인 5명과 수라간 나인 3인을 문초한 끝에 이것을 강빈(姜嬪)이 사주했다는 진술이나왔다
결국 강빈은 3월 15일 시아버지에게 사약을 받고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제주도로 유배를 간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두 명도 풍토병에 걸려
사망하는 등 소현세자 일가는 그야말로 참혹한 화를 당했다
인조실록'은 강빈의 죽음을 기록하면서, 그녀의 강한 기질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소현세자빈 강씨를 폐출하여 옛날의 집에서 사사(賜死)하고
교명죽책(敎命竹冊), 인(印), 장복(章服) 등을 거두어 불태웠다
의금부 도사 오이규가 덮개가 있는 검은 가마로 강씨를 싣고 선인문을 통해 나가니 길 곁에서 바라보는 이들이 담장처럼 둘러섰고 남녀노소가 분주히 오가며 한탄하였다. 강씨는 성격이 거셌는데, 끝내 불순한 행실로 상의 뜻을 거슬러오다가 드디어 사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죄악이 아직 밝게 드러나지 않았는데 단지 추측만을 가지고서 법을 집행 하였기 때문에 안팎의 민심이 수긍하지 않고 모두 조숙의(趙淑儀)에게 죄를 돌렸다
위의 기록에서도 보듯이 강빈의 죽음에는 '추측만을 가지고 법을 집행하였다' 그러나 인조의 후궁인 조숙의에게 혐의가 있음을 시사 하는 등 당시에도 많은 의문이 제기 되고 있었다.
강빈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으니 신원을 해야 한다는 점은 효종대(봉림대군)에 이르러 정국의 이슈로 떠올랐다. 효종 즉위부터 강빈에 대한 신원 문제와 강빈 옥사의 의혹이 제기되자 효종은 강빈의 옥사를 재론하는 자는 역률(逆律)로 다스리겠다는 특별 하교까지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쉽게 열어서는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힌 인물은 김홍욱(1602~1654) 이었다. 1656년(효종 7) 황해도 관찰사로 있던 김홍욱은 강빈의 신원과 소현세자 셋째 아들의 석방을 요청하는 직언을 하여 조정에 파문을 일으켰다. 격분한 효종은 그를 곤장을 때려 죽게 했고, 이렇게 사건 자체는 일단락 되었다.
김홍욱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7대조로 조선 후기
경주 김씨 가문이 절의(節義)의 집안으로 자리를 잡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후로도 강빈의 옥사를 둘러싼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고, 1718년(숙종44) 강빈은 마침내 신원되기에 이르렀다. 강빈의 묘소는 현재 광명시에 소재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민회빈 묘'로불렸으나
1903년(고종 40) 영회원(永懷園)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심양에서 청의 신문물을 보며 북학(北學)의 기운을 조선에 심으려 했던
소현세자와 이어진 강빈의 죽음 그리고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역사!
이것은 조선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기를 갖는다.
만일 선진 문물에 눈을 뜬 소현세자와 실리에 밝은 강빈이 즉위했으면 조선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조선은 광해군에 이어 벌써 두 번째 기회를 잃고말았다
하여간 기회를 위기로 만드는 한심한 인간들만 살아남고,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그저 뭐라고 좀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한 것이 조선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