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월에 용서를(우는 좀 더 좌아하게, 좌는 좀 더 우아하게)
전임자의 그늘을 품고 개량해 나가는 지혜를
인간은 그 어떤 누구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오류투성이의 인간을 무오한 영역인 신의 위치에 올리려는 행위가 신화창조이고 역사 왜곡이고 우상숭배입니다.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는 게 우주의 이치입니다. 정치 세계에서 권력의 교체는 흔히 단절과 부정의 연속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아득한 고대로부터 역사에 등장했던 모든 왕조의 흥망성쇠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의 정치사에는 이와는 극적으로 대비되는 독특한 불문율이 존재합니다. 바로 "전임자 주석을 절대로 폄하하지 않는다"는 원칙입니다. 이 원칙의 가장 극적인 증거는 모택동(마오쩌둥)과 등소평(덩샤오핑)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상하관계를 넘어, 중국 현대사의 가장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다 적으로 돌아섰고, 결국 서로를 품어 안으며 체제의 생존을 담보해 낸 한 편의 대서사시였습니다.
현재 중국정치가 이런 대 서사시를 만들어 낸 데에는 피비린내 나는 중국 역사에 대한 성찰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국은 황하문명 발원 이후 수많은 왕조가 부침했던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모든 새로운 왕조는 전 왕조의 실책을 부각하고 과거와의 선을 긋고 자기 정당성을 입증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그렇게 등장한 왕조 역시 얼마못가서 다시 무너지곤 했습니다. 이게 토인비가 말한 도전과 응전의 법칙, 헤겔이 말한 변증법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더 깊이 이해하면 인간의 양면성과 모순성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압축시켜서 보면 이렇게 단순한 두 단어 속에서 움직여 온 것이지만 그 단순한 원리의 반복 속에서 죽어나는 것은 우루 헤아릴 수 없는 백성(민초)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재미있게 읽는 중국의 초한지나 삼국지는 영웅호걸들의 이야기일 뿐 그 속에서 명멸하는 민초들의 삶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책을 읽으면 내가 곧 유방이나 항우나 조조나 사마의가 된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등소평은 원래 모택동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중국 공산당의 핵심 지도부로 성장했습니다. 1950년대 후반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경제가 파탄 났을 때, 경제 회복 과정에서 등소평은 주은래(저우언라이)와 함께 실용주의적 경제 조정 정책을 이끌며 국가를 위기에서 건져내는 주역으로 등장합니다. 이때 그가 남긴 "검은 고양이든 하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흑묘백묘론)"는 실용주의 철학은, 이념보다 민생을 우선시하는 그의 정치적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됩니다. 이념의 순수성을 목숨처럼 여겼던 모택동은 등소평의 실용주의 노선이 자신의 절대 권력과 혁명 대의를 위협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모택동은 1966년 대란대치라는말로 표현되는 문화대혁명을 이끌었고, 이 소용돌이 속에서 모택동은 등소평을 '당내에서 자본주의 길을 걷는 실권파(주자파)'의 우두머리로 지목하며 가차 없이 권력의 중심에서 몰아냈습니다. 모택동의 아내 강청(장칭)을 비롯한 '4인방(장춘교, 왕홍문, 요문원)' 등 극좌파 세력은 문혁의 첨병이 되어 등소평을 '자본주의의 거두'로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등소평은 박해를 받으며 일체의 공직에서 쫓겨났고, 아들이 홍위병들에게 감금당해 투신하여 하반신 불수가 되는 비극을 겪는 등 두 차례나 모진 고통을 겪었습니다. 자신과 가족의 삶을 파탄 낸 주체는 바로 전임자 모택동이었고, 그 수족은 4인방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로 이 모택동의 집권기이자 문화대혁명이라는 극심한 이념적 광기의 시대 속에서도 국가의 생존을 위한 냉철한 실용주의 외교는 병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소련과의 국경 분쟁 등으로 심각한 외교적 고립에 직면하자, 모택동과 주은래는 이념의 벽을 뛰어넘는 대담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1971년 '핑퐁 외교'의 시작이었습니다. 미국 탁구 선수단을 전격 초청하며 '죽의 장막'을 걷어냈고, 이듬해인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해 모택동과 회담을 가짐으로써 미·중 관계 정상화의 물꼬를 텄습니다. 이처럼 모택동 시기에도 국가의 장기적 안위를 위해서는 이념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실용적 통찰이 이미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1970년대 전반, 혼란 속에서 국가를 수습해야 한다는 당내 목소리가 커지면서 주은래의 보호 아래 등소평은 극적으로 다시 복권(1973년)되었습니다. 그러나 4인방은 권력을 다시 잡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고, 1976년 주은래가 서거하자 등소평을 다시 한번 실각시키며 그를 사지로 내몰았습니다.
운명의 해인 1976년, 모택동이 사망했습니다. 모택동이라는 거대한 우상이 사라지자마자, 화국봉(화궈펑)과 예검영(예젠잉) 등 합리파 군부 세력은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4인방을 전격 체포했습니다. 이로 인해 등소평은 마침내 세 번째로 화려하게 부활(1977년)하였고,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되며 중국의 운명을 바꿀 '개혁개방'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라인강의 기적을 배워서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듯이 적극적으로 한강의 기적을 배워갔습니다.
자신을 핍박하고, 아들을 불수로 만들었으며, 죽음 직전까지 내몰았던 모택동과 4인방. 권력 투쟁의 논리대로라면 등소평은 집권 직후 모택동의 과오를 낱낱이 파헤치고 그의 흔적을 지우는 '역사 바로 세우기(부정)'에 나섰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등소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4인방은 철저히 심판하고 단죄하여 문혁의 광기를 청산했으나, 최고 지도자이자 체제의 상징인 모택동 본인에 대해서 만큼은 끝내 칼을 겨누지 않았습니다. 대신 "모택동 동지의 공이 크고 과오는 작다(공칠과삼)"라는 유명한 역사적 평정을 내리며, 모택동의 초상을 천안문 광장에 그대로 남겨두었습니다.
사회주의의 뼈대 위에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이식하는 개혁개방이라는 거대한 변혁을 추진하면서도, 그 정당성의 뿌리인 모택동이라는 거목을 베어내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을 짓밟은 전임자를 부정하는 대신, 그를 체제의 영원한 수호신으로 박제하여 숭상함으로써 공산당 일당 지배의 연속성을 지켜낸 것입니다. 만약 고난 끝에 집권자가 된 등소평이 모택동을 전면 부정했다면, 모택동이 이끌었던 혁명과 공산당의 역사 전체가 가짜가 됩니다. 그것은 곧 공산당 정권이 서 있는 대지를 스스로 폭파하는 자해행위가 됩니다. 자신을 쫓아낸 전임자를 부수는 선례를 남기는 순간, 후임자 역시 언제든 자신을 부정할 수 있다는 공포가 지배하게 되어 정권은 권력 교체기마다 피바람 부는 내전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나라의 역사가 과거와의 단절에 매몰되면 백년대계의 일관된 국가 비전은 실종되며 파멸의 길로 가게 됩니다. 자신을 핍박한 전임자의 과오마저 거대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품어 안을 줄 알았던 등소평의 지혜는, 오늘날 거대 국가 중국이 흔들리지 않고 영속할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뿌리가 된 것입니다. 한강의 기적을 배워간 등소평에게 다시 배워와야할 게 바로 이점입니다.
대구수필가협회 회칙에 역대 회장을 역임한 분들과 협회 발전에 기여한 원로 회원으로 자문위원회를 둔 것은 자문위원회가 무슨 큰 역할을 해서가 아니고 협회의 역사와 정통성을 후임자가 함부로 훼손시키지 못하도록 하여 협회의 설립 정신을 이어 나간다는 철학을 담은 담은 것입니다. 전대의 집행부가 만든 업적을 후대 집행부가 죄다 무너트린다면 협회가 존속하겠는지요? 인생은 오류투성이고 열심히 노력했을 때 햇빛 삼일 눈비 사일입니다. 인생칠십고래희라 했으니 칠십이 넘어 보면 알게 됩니다. 이걸 40대 50대에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에서 이런 글도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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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서) 2026. 10. 15.자 조선일보 아침 신문 A4면과 5면에 "원룸 월세내면 월급통장 텅텅,----" "분노한 유럽청년들 거리로 나섰다" "독 베를린서 '만간주택 몰수' 극좌정당 승리--- 주택민심이 유럽정치도 흔들어" 강북. 노원. 관악 아파트도 월300만원---. 월세 거래가 전세 첫 역전" 이라는 기사가 떳네요. 월세 300만원 내고 뭐로 먹고 사나요? 기가막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