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경환의 명시감상
발가락에 대하여
박언숙
보도블럭 위를 알짱거리는
비둘기 발가락을 무심코 본 후로
종종 걸음 멈추고 안쓰럽게 세는 버릇
발가락 하나가 잘리고 없는 놈
그나마 둘 달린 놈
드물지만 한 쪽 발가락 다 잘리고
뒤뚱거리는 녀석도 보게 된다
배고픈 날 서대구공단 야적장을 뒤진 모양이다
명줄만큼 질긴 나일론실에 걸렸을 것이고
올가미처럼 졸려서 발가락들은 질식당해 있다
작두에 잘린 할머니 집게손가락 생각한다
겨울이면 그 손가락 시려 콧김 호호 쐬면서
손발이 성해야 벌어먹기가 수월하다는 당부
잠금장치에 갇혀 군말 없던 내 발가락들
곰팡내로 밀폐된 독방살이를 이제는 알겠다
밥벌이에 골몰해 손발가락 내 줄 뻔했던 일
바쁜 걸음 멈추고 비둘기 발가락 보다가
내 손발의 품삯이 어찌나 송구스럽던지
꼼지락거리며 경배 드리듯 엎드려 아는 체 해 본다
----박언숙, [발가락에 대하여]({나비, 봄을 짜다}, 애지문학회 편, 도서출판 종려나무 2007년) 전문
밥이란 무엇인가? 밥이란 곡물을 익혀 끼니로 먹는 음식을 말하고,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주로 쌀밥을 의미하게 된다. 물론 보리밥과 수수밥과 조밥과 팥밥 등도 있지만, 그 밥들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밥들에 지나지 않는다. 밥이란 동물의 먹이의 총칭을 가리키기도 하고, 또한 여러 식물들의 먹이(자양분)의 총칭을 가리키기도 한다. 밥(먹이)이란 동체성을 보존하는 유일한 젖줄이며, ‘열흘을 굶어서 도둑질을 하지 않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 먹이를 구하지 못하면 곧바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리걸식流離乞食, 남부여대男負女戴, 초근목피草根木皮는 지난 날 우리 한국인들이 외세에 짓밟히고 사랑하는 조국과 그 비옥한 터전을 잃어버렸을 때에 아주 유행했던 용어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모든 다틈, 싸움, 전쟁은 그 먹이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에 지나지 않는다. 농사꾼의 물꼬싸움도 밥그릇 싸움이며, 장사꾼의 영업 행위도 밥그릇 싸움이다. 학자들의 연구실적 싸움도 밥그릇 싸움이며, 회사원들의 승진을 둘러싼 싸움도 밥그릇 싸움이다. 정치인들의 온갖 권모술수도 밥그릇 싸움이며, 문학상을 둘러싼 시인들의 이전투구도 밥그릇 싸움이다. 국가와 국가간의 영토분쟁도 밥그릇 싸움이며, 국가와 국가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면전도 밥그릇(천연자원의 확보와 상품판매 시장의 확보) 싸움이다. 더욱 더 비옥한 땅과 보다 나은 자리, 더욱 더 좋은 회사와 보다 나은 인간 관계, 더욱 더 부유한 국가와 더욱 더 부유한 문화시민이 될 수만 있다면, 이 세계는 보다 풍요롭고 행복한 세계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렇지가 못하면 이 세계는 그 어떠한 의미도 없는 불행한 세계일 수밖에 없다. 부자일 때는 가난한 자를 욕하고, 가난할 때는 부자를 욕한다. 인간의 심리란 고정불변한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위치에 따라서 끊임없이 극좌에서 극우로, 또는 극우에서 극좌로 그때 그때마다 변신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가난한 자는 밥그릇 싸움에서 패배한 자를 말하고, 부유한 자는 밥그릇 싸움에서 승리한 자를 말한다. 가난한 자는 자기 자신의 못남과 게으름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며, 오직 만인평등과 부의 공정한 분배만을 외치게 되고, 부유한 자는 그의 노동력 착취와 사기와 약탈에 대한 그 어떠한 반성도 없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부유함과 미덕만을 합리화시키게 된다.
박언숙 시인은 경남 합천에서 출생했고, 2005년 계간시전문지 {애지}를 통해서 등단했다. 현실은 시의 텃밭이며 상상력은 그 텃밭의 꿈나무들이다. 그의 시, [발가락에 대하여]는 그 현실과 꿈의 변증법의 산물이며, 비록, 그의 꿈이 현실이라는 덫에 걸려서 뒤뚱거리거나 허우적대고 있을지라도 보다 나은 세계로 가고 싶은 소망을 너무나도 간절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느 날 그는 “보도블럭 위를 알짱거리는/ 비둘기 발가락을 무심코 본 후로/ 종종 걸음 멈추고 안쓰럽게 세는 버릇”이 생겨났다고 말하고 있는 데, 왜냐하면 “발가락 하나가 잘리고 없는 놈/ 그나마 둘 달린 놈/ 드물지만 한 쪽 발가락 다 잘리고/ 뒤뚱거리는 녀석”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비둘기란 어떠한 새란 말인가? 비둘기는 흔히 평화의 상징이라고 불리우며, 집비둘기와 들비둘기로 대별된다. 집비둘기는 ‘리비아 비둘기’를 개량하여 만들어낸 품종이고, 우리 대한민국의 들비둘기로는 멧비둘기, 양비둘기, 흑비둘기, 염주비둘기, 녹색비둘기 등의 다섯 종류가 있다고 한다. 비둘기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이며 자유와 평화의 상징이다. 그 자유와 평화의 새가 인간의 손에 길들여져 집비둘기가 된 것은 다른 한편, 매우 커다란 불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집비둘기는 자연의 터전과 야성을 잃어버린 애완용의 새에 지나지 않으며, 스스로 먹이를 사냥하고 자기 자신의 세계로 날아갈 줄을 모르는 불행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먹이의 사냥 방법(먹이를 구하는 방법)을 모르고, 우리 인간들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의 동체성을 보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유로운 비둘기보다는 배 부른 노예가 된 것이지만, 그러나 그 비둘기는 그나마도 먹고 살 걱정이 없어서 다행일는지도 모른다. 들비둘기와 집비둘기 사이에는 떠돌이--부랑자로서의 비둘기가 있는 데, 그 집비둘기를 마다하고 뛰쳐나간 비둘기이거나 대도시의 공원에서 살고 있는 비둘기가 바로 그 새들이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먹이를 사냥하는 것도 아니며, 또 그렇다고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부터 먹이를 얻어먹고 있는 것도 아니다. 들비둘기는 되도록 인가人家를 피해서 숲속에서 살며 먹이를 구하고 집비둘기는 하루종일 재롱을 떨어대는 댓가로 주인으로부터 배 부르게 먹이를 얻어 먹으면서 살아간다. 따라서 이 집비둘기도 아니고 들비둘기도 아닌 떠돌이--부랑자의 비둘기가 자연의 비옥한 터전과 그 야성을 잃어버리고 인간의 도시에다가 그 정처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비둘기는 우리 인간들을 무서워하지 않으며, 대도시의 공원, 상가, 쓰레기 하치장, 공단 등을 떠돌아 다니며, 너무나도 손쉽게 다양한 먹이들을 찾아서 먹고 살아가게 된다. 때때로 먹고 살기가 너무나도 힘겨운 들비둘기보다도 그들은 더 행복하고, 언제, 어느 때나 새장 속에 갇혀서 재롱이나 떨어대는 집비둘기보다도 그들은 더 행복하다. 하지만 이 안일함과 이 행복함의 댓가는 때때로 너무나도 크기만 한데, 왜냐하면 수은에 중독되거나 자동차에 부딪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배 고픈 날 서대구공단의 야적장”에서처럼, “명줄만큼”이나 “질긴 나일론 실에” 걸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발가락 하나가 잘리고 없는 놈/ 그나마 둘 달린 놈/ 드물지만 한 쪽 발가락 다 잘리고/ 뒤뚱거리는 녀석”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박언숙 시인은 그 비둘기들의 발가락을 본 후로는 “종종 걸음을 멈추고 안쓰럽게 세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데, 왜냐하면 “보도블럭 위를 알짱거리는” 비둘기는 절대로 ‘하는 일 없이 자꾸만 돌아다니는 비둘기’가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 또는 ‘먹이를 구하느냐/ 못 구하느냐’라는 생존경쟁의 장에 내몰린 비둘기에 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비둘기를 바라보는 박언숙 시인의 마음은 매우 착잡하고, 그 착잡함은 그를 옛날의 기억 속으로 되돌아가 보게 만든다. 그 옛날, 그의 할머니 역시도 “작두에” “집게손가락”을 잘렸던 것이고, “겨울이면 그 손가락 시려 콧김 호호 쐬면서/ 손발이 성해야 벌어먹기가 수월하다는 당부”를 하시곤 했던 것이다. 그는 떠돌이--부랑자의 비둘기를 바라보면서 그 옛날의 할머니를 생각하게 된다. 이때에 비둘기와 할머니는 동일시되고, 그 할머니의 시린 손과 “손발이 성해야 벌어먹기가 수월하다는 당부”의 말씀을 떠올려보면서 그 비둘기를 더욱 더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 안타까운 마음은 동정과 연민이 아니며, 그 비둘기의 아픔에 기꺼이 동참하는 안타까운 마음이다. 작두란 말과 소에게 먹일 짚이나 콩깍지 등을 써는 연장을 말하며, 그 시퍼런 칼날에 손가락을 잘린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다. 손은 물건을 집을 때 사용되고, 발은 그 목적지를 향해 걸어갈 때 사용된다. 손과 발이 불편하면 그는 불구자가 되고, 그 불구자는 생존경쟁의 장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가 없게 된다. “겨울이면 그 손가락 시려 콧김 호호 쐬던” 할머니를 생각해볼 때, 그 비둘기들의 발들은 얼마나 시릴 것이며, 또한 “손발이 성해야 벌어먹기가 수월하다는” 할머니의 당부 말씀을 생각해볼 때, 그 비둘기들의 밥벌이란 얼마나 더욱 더 힘들고 고단할 것이란 말인가? 그는 그 안타까움--안쓰러움 때문에 눈시울을 붉히면서, 그제서야 간신히 “잠금장치에 갇혀 군말 없던 내 발가락들/ 곰팡내로 밀폐된 독방살이를 이제는 알겠다”라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된다. 이때에 “잠금장치에 갇혀 군말 없던 내 발가락들/ 곰팡내로 밀폐된 독방살이를 이제는 알겠다”라는 시구는 이제 내 발가락들은 신발에 의하여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타인들의 불행을 보고 자기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대단한 행운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떠돌이--부랑자의 삶을 살고 있는 비둘기의 삶이란 얼마나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이겠으며, 또한 작두날에 집게손가락을 잘려버린 할머니의 삶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이었단 말인가? 그 비둘기와 할머니의 삶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도, “밥벌이에 골몰해 손발가락 내 줄 뻔했던 일/ 바쁜 걸음 멈추고 비둘기 발가락 보다가/ 내 손발의 품삯이 어찌나 송구스럽던지/ 꼼지락거리며 경배 드리듯 엎드려 아는 체 해 본다”라고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을 깨닫게 된다. 그 역시도 “밥벌이에 골몰하다가 손발가락 내 줄 뻔했던 일”이 있었으며, 따라서 그는 “바쁜 걸음 멈추고 비둘기 발가락 보다가/ 내 손발의 품삯이 어찌나 송구스럽던지/ 꼼지락거리며 경배 드리듯 엎드려 아는 체 해”보고 있는 것이다. 집비둘기이건, 들비둘기이건, 떠돌이--부랑자의 비둘기이건, 할머니이건, 손녀이건, 모든 생물들에게는 밥벌이처럼 소중한 것이 없다. 나의 손발이 소중하면 타인의 손발도 소중하고, 나의 밥벌이가 소중하면 타인의 밥벌이도 소중하다. 이 너와 나의 ‘타자의 현상학’에 의해서 사랑이 생기고, 그 사랑에 의해서 만인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경배의 마음이 생긴다. 손과 발이 성하고 내 손과 발의 품삯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또한 그만큼 자랑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박언숙 시인은 그것을 더욱 더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비둘기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밥벌이는 신성한 일이며, 그 신성한 일을 위해서 불구가 된 모든 존재들은 다같이 거룩한 존재들인 것이다. 밥벌이에는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어느 것 하나 장난인 것이 없다. [발가락에 대하여]는 밥과 밥벌이(일)의 중요성을 알고, 그 밥벌이를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존재에 대한 박언숙 시인의 경의의 찬가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더없이 선량한 양심과 티없이 맑은 천성을 지닌 시인이다. 그의 선량한 양심은 떠돌이--부랑자의 비둘기, 즉, 그의 할머니가 암시하고 있듯이, 더욱 더 낮은 곳으로 향하고, 그의 티없이 맑은 천성은 밥벌이를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존재에 대한 경배심에서 알 수가 있듯이, 더욱 더 높은 곳으로 향한다. 현실은 시의 비옥한 텃밭이며, 상상력은 그 텃밭의 꿈나무들이다. 그는 그 어렵고 힘든 밥벌이의 텃밭 속에서, 그 밥벌이의 신성함과 그 신성한 일에 종사하고 있는 존재들에 대한 무한한 경의의 꿈나무를 심고 있는 것이다. 박언숙 시인의 시는 무기교의 기교의 시이며, 그 삶의 진정성에 의하여 만인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감동의 메아리로 울려 퍼지게 된다. 화장도 존재의 본질을 은폐하고, 기교도 존재의 본질을 은폐한다. 화장이나 기교가 필요한 것은 그 존재의 아름다움을 더욱 더 빛내주고, 그 존재의 가치를 더욱 더 돋보이게 해줄 때이지만, 그러나 때로는 화장이나 기교가 그 주체자를 죽이고, 그 시를 더욱 더 형편없이 만들어 버린다. 왜냐하면 화장이나 기교가 그 진정성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성의 세계는 발가벗음의 세계이며, 진실이 진실 그 자체로서 살아 움직이는 세계이다. 그 세계는 기교가 필요없는 세계----‘무기교의 기교의 세계’----이며, 남녀노소의 구별없이 그 어느 누구도 영원히 돌아가 안기고픈 우리들의 마음 속의 고향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