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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경외자의 복
출 1: 15-22
오늘 본문에는 애굽(미츠라임) 왕 바로가 히브리인의 산파 쉬프라와 부아에게 유아학살 명령을 내리는 것을 봅니다. 조산할 때, 히브리 여인을 살펴서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살리라는 명령을 합니다. 16절에 나타난 명령에 대한 정확한 표현은 개혁성경에는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표현하지 않더래도 그 뜻을 아는데 지장이 없지만, 한 단어를 표현하지 않은 것은 성에 대한 은어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16절 말씀을 보면, 우리말로 보다, 자세히 보다라는 히브리어는 la'ah의 여성 2인칭 완료 동사인 ureiten 이란 동사가 나타납니다. 그 다음에 al- ha'abgaim 이라는 단어의 해석이 삭제되었습니다만, 이 말은 직역하면 돌이라는 말인데, 정확한 표현은 사타구니 정도로 해석해도 무방하리라고 봅니다. 문장의 순서가 조금 바뀌긴 했습니다만 공동번역이 정확히 번역했습니다.
"히브리 여인이 해산하는 것을 도와 줄 때, 그리고 애굽 왕이 말하기를 사타구니를 보고(자세히 살펴보고) 아들이거든 죽여 버리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
히브리 산파들은 세상의 절대적인 권세자인 멜레크 미츠라임 곧 애굽 왕의 말을 들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왕의 명대로 하지 않고 어린아이를 살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은 두 산파를 불러서 "남자아이들을 살려두다니 너희가 어찌하여(마뚜아) 이처럼 하였느냐?" 하고 놀람과 분노의 감정을 담고, 산파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랬더니 산파들은 지혜롭게 대답을 합니다. 그 대답은 좀 과장해서 히브리 여인은 건장하기 때문에 산파가 산모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했다고 말을 합니다.
사실 잘못 말하게 되면 죽을지도 모르는 산파들이 죽음을 모면하기 위한 변명이기도 합니다만, 산모 모르게 산파가 살인할 수 있을 만큼 히브리 여인은 약하지 않았고, 해산의 고통 와중에 힘도 정신 잃지도 않았다는 뜻도 담긴 뜻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바로 왕은 모르게 산파에게 명했지만 산모들은 건장했습니다. 확률상 애굽여인이나 히브리인이나 약하고 강한 것은 비슷해야 하는데, 히브리 산모가 특별히 건강했다는 것은 위기의 때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때문입니다.
사실 왕이 산파에게 명하고, 산파들이 왕의 명대로 하고 싶다해도 히브리여인들이 건장하면 불가능합니다. 산모가 정신이 없어야 하는데, 어머니가 눈이 뻔히 떠 있는데, 산파들이 왕의 명령이요 하고 남자아이를 죽인다면, 산모들이 산파를 다시 부르겠습니까? 부르지 않겠죠. 설령 산파가 왕의 명령을 따른다 해도, 한 두 번 성공했을지 몰라고 남자아이들이 죽는다는 것을 목격한 산모들이 소문을 내지 않겠습니까?
애굽 왕은 히브리인 사내아이들에게 대한 살해 명령의 실패 때문에, 나중에는 바로 왕은 공식적으로 온 백성들에게 남자아이는 죽여서 온 백성에게 강물에 던지라 명령합니다.
이 명령에 따르는 히브리인들의 위기는 예수님의 탄생 때와 비슷합니다. 마2:16에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실 때, 헤롯왕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두 살 아래로 다 죽였듯이, 모세가 탄생할 즈음에 애굽왕 바로는 히브리인의 남자아이를 죽여서 강에 던져버리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깊은 어둠이 시작되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민족적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할 모세를 준비하였습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은 모세를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가깝듯이 애굽 왕의 학대가 크면 클수록 구원의 날은 가깝고, 어렵고 힘들면 힘들수록 오히려 이스라엘은 더욱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였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위대한 신앙의 사람 쉬프라와 부아라는 산파를 만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두 산파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두려워하다라는 단어 yareh 라는 히브리어는 도덕적으로 두려워하다라는 말도 되지만, 신앙적인 눈으로,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출 3:6 yayoseter moseh panau ki yare -- "모세가 얼굴을 가렸다.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했다" 라고 할때 모세가 하나님 앞에 선 때의 신령한 두려움, 이 두려움이 지금 두 산파가 느끼는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사도 바울이 고전 9장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하였던 것처럼 두 산파의 두려움은 긴장과 깨어있는 믿음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을 때 당할 심판에 대한 놀라운 마음, 두려운 마음이 두 산파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두 산파처럼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없는 신앙은 온전한 신앙의 아니요 또한 신앙의 열매도 없습니다. 신앙적 두려움이란 나 같은 죄인을 조건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죄인이 응답하는 두려움입니다.
아니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니, 나 같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다니, 사랑받을 자격 없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영원전부터 나를 기억하시고, 나를 돌보시는 그 사랑과 은총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응답하지 못하고, 배신할 때 내 영혼은 주리게 될 것이라는 것과 소망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속적인 거부와 말씀에 대한 불순종 때문에 심판과 버림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믿음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롬1:28에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상실한 마음 그대로 내버려 두사 라고 했듯이 더 이상 하나님의 관심과 보호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속이고 금고의 돈을 도둑질하고, 마음에 주님을 팔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아시고, 가롯 유다가 깨달을 만큼 경고했지만, 가롯 유다는 회개치 아니하고, 마음은 더욱 완악하고 굳어졌습니다. 주님의 경고에 대한 두려움을 잃어버린 결과, 그는 영원히 버림받는 길을 갔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세상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더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을 때, 나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거룩한 두려움이 잇어야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쉬프라처럼 부아처럼 온전한 믿음을 가질 때, 두 산파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왕성함의 축복을 받을 줄 믿습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몸은 죽이되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세상의 왕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을 죽일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실제 삶에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의 정치 권력자들의 거짓말을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함도 없고, 뻔히 시간 지나면 들통 날 일을 계속해서 반복하며 속인다는 사실입니다. 계속 속인다는 것은 회개함이 없고, 같은 죄악을 반복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도 두려워하지 않고, 법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들이 오늘의 일부 정치인들의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진정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권력을 두려워하고, 세상 사람의 비판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내 양심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 성경을 통해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내 삶의 나침반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바로의 양자 길에서 두 산파가 선택할 때에,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선택한 것은 큰 믿음입니다. 죽음보다 더 소중한 믿음의 길을 두 산파는 택한 것입니다.
우리도 어디에서든지, 무슨 일에서든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모든 일을 판단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대로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른 믿음의 삶입니다. 단3:17-18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의 믿음을 봅니다. 두라 평지에 세워진 느부갓네살 왕의 금신상 앞에서 왕의 신하였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왕의 명을 거절하고 우상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이일로 인해서 극렬히 불타는 풀무가운데 던져지게 되었지만, 그들은 우상 앞에서 절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이 설령 불타는 풀무가운데서 건져주시지 아니할지라도 우상 앞에 절하지 않겠다는 담대한 믿음을 소유했음을 봅니다. 정말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요 쉬프라와 부아도 그러합니다 오늘 우리도 그러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참다운 믿음의 사람은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감히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 못하는 옳은 길을 가기 때문에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바로 왕의 두 산파에 대한 물음에서 그 놀라움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왕이 두 산파를 부를 때, 어찌하여 이 아이를 살렸느냐 라고 묻습니다.
왕은 명령을 거역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산파들은 거역했습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원어로는 "마뚜아" 라는 말을 합니다. 깜짝 놀라운 감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니! 라는 것입니다. 두 산파가 목숨을 걸고 감히 이집트인에게는 신과 같은 바로 왕을 거역한 것입니다. 절대적인 복종만이 있지, 거역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왕을 놀라게 했습니다.
무신론자들과 우상 숭배자들 곧 세상 사람들은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건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할 일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사심을 아는 자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능히 주님 명령을 따라 죽을 수 있습니다. 히11장은 이런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난 후에 히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강담치 못하였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 깜짝 놀라는 그런 믿음의 소유자가 되야 합니다. 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이란 정의의 법을 거역해서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 거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공의에 벗어날 때 거역하는 것입니다.
잘 알다시피 오늘 본문의 바로 왕은 애굽을 하나로 묶기 위한 민족 우월주의자 입니다.
본문의 바로 왕은 애집트 인과 히브리인의 아이를 차별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 무슨 잘못된 사상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부모가 누군 줄 알고 태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히브리인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그러나 두 산파인 쉬프라와 부아는 거역합니다. 생명 살상은 하나님의 결코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믿음의 사람은 결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왕은 자신의 민족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그 외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보게 됩니다. 민족 우월주의는 하나님의 말씀, 뜻과는 정반대입니다. 민주주의와도 정반대입니다. 독재자들이 좋아하는 구호입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과거 우리 교육이 민족우월주의 교육이였습니다. 우리 민족은 타민족과 다르다. 그럼으로 우리는 잘못해도 괜찮다.
아시안게임에도 경기 룰를 지키지 않고 잘못해도 야유할 줄도 모르고 오히려 잘했다는 듯이 통쾌해한다면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도 병든 것입니다.
에집트의 바로 왕이 나그네 된 히브리인을 학대하는 것을 봅니다. 민족우월주의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런 민족우월주의 교육을 받은 이 백성들도 파키스탄이나 제 3세계의 산업연수생으로 와 있는 이웃들을 꼭 같이 학대합니다. 외국인에 대한 차별 대우을 당연시 여깁니다. 인권존중이나 생명의 존엄성도 없습니다. 외국인이 이 땅에서 당하는 산업재해에 무관심하거나, 폭력 앞에서도 어떤 보호장치도 없습니다. 법적 보호장치도 없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민족우월주의 교육의 결과입니다. 민족우월주의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평범한 진리도 그들의 삶과 사고 속에는 없습니다.
나그네 되었던 이스라엘은 가나안땅으로 들어온 후, 그 땅의 나그네들 곧 외국인들과 고아와 과부들을 보호했습니다. 우리도 일제의 식민지와 건설 노동자로 타국 땅에서의 핍박받았던 것을 생각하며, 이 땅의 나그네들, 외국인들을 자국인처럼 존중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보다 도덕적으로 앞서야 합니다.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도덕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성도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믿는 사람의 표시가 나지 않는다면, 세상과 타협해서 산다면 , 아무도 깜짝 놀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위해서라면 다른 것을 다 포기할 수 있는 그런 신앙의 소유자가 될 때, 쉬프라와 부아처럼 왕도 놀래고 세상도 놀랠 수 있는 신앙의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놀래지 못하면 세상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일들이 생깁니다. 얼마전에 미국의 필립 모리스 담배 회사는 폐암 걸린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사는 여인에게 34조에 달하는 배상을 하게 생겼습니다.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액수입니다. 우리나라 최고 갑부의 20 배가 넘는 돈을 한 생명이 죽을병에 들도록 한 댓가입니다. 꼭 담배 때문에 병들었다는 확증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이 사건은 한 생명의 가치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그 사건의 배심원들의 판결은 보여줍니다. 참 놀라운 일 아닙니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은 불의를 거역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만 가능합니다. 세상이 악하다고 탄식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세상의 개혁은 우리가 변해야 합니다. 세상 탓, 사람 탓을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신앙 생활하고 있느냐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대로 사는 순간, 우리는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에게는 심판이 있습니다.
앗수르왕 산헤립의 군대가 히스기야 왕 때에 예루살렘을 침공했습니다. 랍사게 장군은 하나님과 그분의 종 히스기야 왕을 비방했습니다. 왕하19:35-37에 보면, 하나님을 훼방하던 앗수르왕의 군대는 하나님의 사자의 침을 받아서 하루밤 사이에 18만5천명이 다 송장이 되었고, 앗수르왕 산헤립은 우상 니스록의 묘에서 살해를 당합니다.
하나님을 비방하고 조롱하고 만홀히 여기는 자의 말로를 우리는 앗수르 왕 산헤립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때문에 스스로 핍박과 고난의 자리로 내려간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해주시고, 복 내려주었습니다.
다윗왕이 다윗성으로 모시길 원했던 하나님의 법궤 이야기를 잘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레위 사람 아미나답의 집에 있다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 웃사가 손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붙드는 순간 웃사는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치 못한 결과가 죽음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죄인된 인간이 넘어진 것입니다. 제사장이 메고 갈 법궤를 소의 수레에 끌고 가다가 망한 것입니다. 율법을 어긴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법궤 때문에 죽음을 당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성경은 이런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하6:11 여호와의 꿰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고 했습니다. 꼭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고, 모셨지만 누구는 복을 받고, 누구는 화를 당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졌느냐 , 그렇지 않으냐 결과입니다.
우리가 잘 알 듯이, 엘리 제사자의 가정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하실 때로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삼상 2:30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는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멸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길 것이 아니라 존중히 여기고 경외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바로 왕 앞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그보다 하나님을 더 경외했던 두 산파 쉬프라와 부아처럼, 우리는 하나님만을 경외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 왕성케 하시는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들은 진정 영과 혼을 능히 멸하시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있고,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장 소중한 생명
출 1: 15-22
내 심장은 하루에 자그만치 10만3689번을 뛴다. 몸속의 혈액은 놀랍게도 하루에 1억6800만 마일을 달린다. 그리고 나는 하루에 숨을 몇 번이나 쉬는가 하면 무려 2만3040번을 쉰다. 내가 무슨 수고를 해서 심장이 그렇게 많이 잘 뛰어주고 내가 달리라고 해서 혈액이 그 먼 거리를 달려주는 것이 아니다. 또 내가 아무런 수고를 안해도 나의 폐는 그렇게 여러 번 호흡을 해준다. 이 모든 일에 약간의 차질만 와도 나의 생명에는 금방 이상이 오는 것인데 내가 아무런 수고를 하지 않고 생각조차 안해도 그처럼 여러 번 심장이 뛰어주고 폐가 호흡을 해주니 정말 내 생명을 지으시고 지탱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뿐이다. 이뿐인가. 당신은 하루에 두뇌 세포를 자그만치 700만개를 사용하며 사는 것이다.
대 기업의 회장이 자살함으로 인해, 자살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식까지 함께 멸망의 길로 가게 하는 사람들이 종종 뉴스에 나오는 걸 봅니다. 물론 삶이 힘들고 지친 그들의 고된 무게는 이해가 가지만,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자식의 생명 또한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도, 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고백.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생명도 있음을 알아야 함.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서만 1만3천5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루 평균 36명이며 시간당 1.5명 꼴로 자살한 셈이다. 2001년의 1만2천2백77명에 비해 6.3%가 늘어난 것. 지난 1992년의 7천4백1명에 비하면 10년 사이에 무려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 자살은 우울증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게 의학계의 분석.
요즘 많은 사람이 자살하고 죽고싶다는 말을 많이 한다. 자살사이트가 굉장히 성행하고 있다. 장기적인 경기침체로 많은 사람이 우울해져 있다. 특별히 개인 사업하시는 분은 굉장히 어려워함. 월급 받아 직장생활 하시는 분이라도 경제가 침체되면 결국 실직을 하게 될 것. 실업에 대한 불안이 누구나 다 있을 수가 있는 것. 요즘 유행하는 말 ‘사오정 오륙도’45세가 정년이랍니다. 56세가 되어도 아직 붙어있으면 도둑놈이랍니다. 참으로 지금 어려운 사회현실을 빗댄 말이다. 아무리 봐도 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다. 정치는 어떻습니까 아무리 봐도 정치판에서 희망을 발견하기 힘들 것 같다. 군사적으로는 어떻습니까? 긴장은 자꾸 높아져만 감. 그러니 어디를 봐도 살맛 나는게 별로 없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신문에 나지 않아 그렇지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자살하고 있답니다. 이민족은 지금 힘들어하고 있다. 위로자를 찾고 있다. 지도자를 찾고 있다. 부드러운 지도자 위로하고 격려해줄 지도자를 찾고 있다
여러분!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 돈, 명예, 자식,지식, 아니다. 생명임을 이 시간 다시 기억하고 생명을 사랑하기를 기원함.
1. 생명을 경시하는 사람(15-18,22)
고대 이집트는 그 당시 세계에서는 초강대국. 이집트에는 주변의 다른 소수 민족들도 많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별다른 갈등 없이 평화롭게 살았다. 그런데 새 왕이 즉위하면서 평화가 깨어졌다. 그 왕은 자기네 나라에 들어와 있는 소수 민족인 히브리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지고, 사회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을 위험하게 생각. 국가적인 위기나 전쟁이 있을 때에 적과 내통하고 합세할 것이라며 위험한 민족으로 판단. 또한 국가적인 위기가 있을 때, 저 사람들이 이 나라를 떠나 히브리 사람들의 고향으로 가게 되면 일시에 노동력을 상실하게 될 것을 염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을 잠재적인 위험요소로 판단하고 그들을 학대하고 강제노동을 시켰다. 정치적인 위험요소는 줄이면서도 경제적인 효용성은 극대화시키는 일을 했다. 그러나 그런 정책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사람들의 인구가 계속해서 늘어났다(8-14). 그 정책이 별로 효과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판명. 그래서 보다 더 강력한 정책을 지시. 히브리 사람들의 산파들에게 히브리 여인들이 아기를 낳을 때에 남자아이를 낳으면 죽이고, 여자아이만 살려 주라고 명령(15-16).
남자의 숫자를 줄여서 인구를 줄이고 정치적인 위협을 줄이자는 의도. 여자의 숫자는 유지가 되어도 위협이 되지 않으므로 노동력은 계속 사용하겠다는 의도였다.
여러분. 애굽 왕은 인간의 생명을 자기가 정치하는데 있어 하나의 도구로 생각. 인간의 생명을 필요하면 살리고 필요 없으면 죽이는 소모품으로 생각. 자기 정권 유지에 방해가 되면 죽이고, 노동력을 계속 가지기 위해서는 살리는, 인간의 생명을 정치적, 경제적인 판단에 따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 인간의 생명을 경시한 것. 결국 애굽 왕은 하나님의 벌을 받아 자기 아들을 비롯하여 애굽 사람의 맏아들이 모두 죽는 하나님의 벌을 받았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다가 자기 아들들이 죽는 벌을 받게 된 것.
여러분, 오늘날도 인간의 생명을 수단이나 도구로 생각하는 시류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유럽의 기독교 사상가인 <프랜시스 쉐퍼>라는 분이 있다. 그 분의 글을 읽어보면, 그 분이 오늘날 현대의 예언자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쉐퍼가 그의 책에서 이야기하기를 “이 시대는 인간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착취하고 다 사용한 뒤에는 폐기 처분해 버려도 좋은 소모품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독일의 <히틀러>나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유태인 600만 명을 죽이고, 자기 동족을 300만 명이나 죽였다.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사람의 생명을 손쉽게 대량학살 한 것. <김일성>을 비롯한 공산주의 독재자들도 역시 정치적인 목적으로 많은 사람의 생명을 죽였다. 생명을 경시한 것정치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일들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재물을 빼앗기 위해서 살인 강도하는 사람도 있고,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일들도 있다. 경제적인 목적 때문에 인간의 생명을 쉽게 죽여버리는 것. 그런데 오늘날 대량으로 인간의 생명을 죽이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낙태. 태아는 뱃속에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눈을 감아 버리고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이 생명을 죽이는 것. 애굽 왕이 아기들을 죽이듯이, 오늘날도 뱃속에 있는 아기들을 죽이는 것. 대량살인이 일어나고 있다. 생명을 경시하는 것. 태아는 수정된 순간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고귀한 생명. 1개의 세포가 수정된 지 23일째가 되면 이미 심장이 형성되어 뛰기 시작하고, 45일쯤 되면 뇌가 구성. 12주가 되면 이미 몸의 모든 형체가 생길 뿐 아니라 손톱과 지문도 발견되고 성구별도 뚜렷해 지게 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완벽한 하나의 생명이란 것. 존귀케 여겨야 할 생명.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도 쉽게, 너무도 공공연하게 마치 몸의 귀찮은 부분을 떼어내듯이 낙태를 자행하고 있다. 전세계에서 1년에 5500만 명의 아기가 낙태되고 있다
한국은 1년에 150만 명의 아기가 낙태로 죽어가고 있다고 추산
낙태의 이유는, 터울조절 9.1%, 경제적 사정 5.9%, 산모 건강이 4.6.
여러 가지 이유 중에 낙태를 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경우는 산모의 건강 때문인 4.6% 밖에 없고 나머지 95%는 인간의 생명을 하나의 수단이나 도구로 생각해서 생명을 경시하기 때문에 쉽게 태아의 생명을 죽이는 것.
2.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17,19)
어느 헬리콥터에 과학자 목사 학자 학생 등 4명이 타고 있었다. 학자는 늘 거드럼을 피우며 교만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 옆에는 배낭이 놓여 있었다. 방학을 이용해 여행중이었다. 한창 비행중에 엔진에 고장이 생겼다. 그런데 낙하산은 3개밖에 없었다. 1명은 죽어야 할 운명이었다. 과학자가 말했다. “나는 이 나라를 위하여 살아야 할 존재다. 나는 죽을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서 낙하산 1개를 재빨리 집어들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렸다. 거만한 학자도 “나도 이 나라에 독보적인 존재다. 나도 살아야 한다”라면서 낙하산을 안고 뛰어내렸다. 이제 낙하산은 1개밖에 안 남았고 사람은 2명이 남았다. 물끄러미 낙하산을 바라보고 있던 목사님이 학생에게 말했다. “학생! 이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리게! 나는 늙었어. 그리고 예수를 믿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네. 나는 당장 죽어도 하나님께 갈 자신이 있네” 이때 학생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다 살았다. 지금 뛰어내린 학자가 낙하산인줄 알고 제 배낭을 메고 뛰어내렸다”
어려움에 처하면 사람은 자기 생명이 귀한 줄 안다.
애굽에서 이렇게 생명경시 사상이 강한 중에도 히브리 산파들은 생명을 경외. 애굽 왕이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지만, 히브리 산파들은 그 명령을 거역. 히브리의 남자 아기들을 죽이지 않고 살렸다. 이 시대에 전제 군주의 명령을 거역하면 죽을 수도 있고, 감옥에 갈 수도 있고, 자신들의 직업을 잃을 수도 있다. 남 살리려다 내가 죽을 수 있는 위험에 처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17절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말씀하고 있다. 히브리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다. 왕의 명령이 중요하고 무섭긴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왕보다 더 권능 있는 분임을 믿었고, 하나님의 명령을 더 중요하게 생각. 그래서 왕은 아기를 죽이라 명령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불이익과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것?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인간의 생명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셨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이해관계 때문에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는 것. 십계명 중 6번째 계명에서와 같이 살인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명령하고 있는 것. 또한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고 기초이시므로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살을 함. 자기 생명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끊는 것. 그것은 하나님 앞에 큰 범죄.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생명을 주장할 권리가 없는 것. 자기 생명조차도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자살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 또한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현재의 삶의 여건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서는 안 되는 것. 이렇게 히브리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존엄한 한 아기의 생명을 죽일 수 없었다.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생명에 대하여도 경외하는 생각을 가졌다. 결국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 히브리 산파들을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 20-21절 보면, 그 히브리 산파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고, 그래서 그들의 집이 왕성하게 되었고, 히브리 사람들은 번성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러분, 우리는 생명 경시의 시대 속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시대의 풍조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생명을 경외해야 함.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믿고 성경을 따라가는 사람들. 성경은 시대나 유행에 따라서 변화할 수 없는 것. 성경은 어떤 시대, 어떤 환경에서든지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표준. 그런데 그 성경은 우리들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분명히 명령. 그리고 막8:36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가장 존귀한 것이며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
여러분, 각 개인은 유일무이하며 특별하며 결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엄한 존재인 것. 생명은 경외하고 존중해야만 하는 것.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으로서, 생명을 경외하는데 우리가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1) 생명을 경시한 죄를 회개.
알지 못해서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고 낙태를 경험한 분들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회개. 혹은 낙태를 동조하거나 지시한 분들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회개
요한1서 1장 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
2) 경제적인 문제나 여러 가지 각종 문제들 때문에 생명을 놓고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기도하며 돌봐야 할 것.
3) 우리나라에 만연된 남아 선호사상을 바꿔나가야 되겠다.
우리 자신이 끌려 다니지 말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도 생각을 바꾸도록 노력해야 할 것.
4) 미혼모가 생기지 않도록 순결교육을 강화해야 하며, 미혼모가 생겼을 시엔 그들을 돌보고 보호해야 함.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생명을 경시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동반 자살, 낙태)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시대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 오늘날 우리가 생명 존중의 생각을 가지고, 생명경시의 이 시대 풍조와 이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기를 기원함.
제 2의 모세를 키우자
출 1: 15-22
고대 역사의 한 야사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아테네 군대보다 스파르타 군대가 더 강했다고 합니다. 스파르타 군대 중에 특별히 특수부대가 있는데 500명의 용사들로 구성된 이 군인들은 애국심이 강하고 전투가 능해서 백전백승하는 용감한 부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대가 아테네군에게 포위를 당했습니다. 보급로가 끊기게 되고 식량이 떨어지면서 굶게 되고 아주 어려운 지경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견디며 항복하지 않습니다.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성안에서 끝까지 죽기를 각오한 500명의 스파르타 군을 아테네 군은 그저 포위만 하고 시간을 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아테네 군이 갑자기 스파르타 군 성안으로 기습해 왔습니다. 스파르타 군은 그 동안 먹지 못해서 허기진 데다가 갑작스러운 기습에 대항할 여지도 없이 그만 삽시간에 전멸되고 말았습니다.
너무 배가 고픈 병사가 그만 비밀통로를 통해 탈출해서 적진으로 달려가 빵 한 조각과 고기 한 덩어리를 얻어먹고는 그 비밀 통로를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아테네 군은 그 비밀 통로를 통해서 성안으로 들어가 일시에 기습했고 그 동안 배고픔과 추위에 떨던 스파르타 군은 대항할 겨를도 없이 모두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 병사는 빵 한 조각을 전우들의 생명과 바꾼 셈이 되었고 고기 한 덩어리를 나라의 운명과 바꾼 셈이 되었습니다.
보세요! 아무리 500명의 군사 중에 용감하고 충성된 애국투사 499명이 있다해도 한 병사의 비열한 배반으로 인해 전우들이 죽고 나라까지 패망케 된 것을 봅니다.
성경에도 보면 아담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사탄의 미혹에 끌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이 세상에 죄를 가져 왔고,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와 죽음을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처형됨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우주 속에서 나 하나는 보잘 것 없는 존재라 하겠지만 그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인식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국가적으로도 한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특별히 미래를 책임지고 나갈 젊은이들은 바로 가정과 교회와 국가의 소망이며, 꿈이며, 내일이라는 사실입니다.
한 여자의 행복은 좋은 남편을 만나는데 있고, 배우는 사람의 기쁨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데 있습니다. 백성들의 행복은 좋은 지도자를 만나는데 있고, 위대한 시대는 위대한 인물을 만나는데 있는 것입니다.
옛날 구약시대에 애굽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이 기근으로 어려움을 당하여 허덕이고 모두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치려 할 때 한 사람 위대한 인물이 이 고난을 극복하게 하였습니다. 바로 그 사람은 요셉이라고 합니다. 요셉 때문에 애굽은 위기를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부강한 강대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애굽 땅 한 모퉁이를 얻어서 살던 요셉의 아버지 야곱과 그 모든 가족 70명이 번성하고 번성하여 강성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렇듯 이스라엘 백성의 번성에 위협을 느낀 애굽의 왕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로 삼아 압제를 가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이러한 노예의 고난과 고통으로 시달려온 세월이 400년이 됩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포악한 정책은 이스라엘 민족을 멸종시키려는 잔인한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남자아이를 낳는 즉시로 나일 강물에 던져 죽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토록 노예살이로 인한 고통만이 아니라 한 맺힌 억울함 속에서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말할 수 없는 고역과 원한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어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의 피맺힌 탄식과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출2:23-25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여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의 탄식하며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은 한 인물을 역사 속에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레위 사람인 아므람이 요게벳이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 어린 아들이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어린 아들을 살려 보려고 석 달을 숨겨 키웁니다. 그러나 더 이상 숨겨 키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를 만들어 역청을 바르고 나무진을 칠하여 그 속에 아이를 넣고 나일 강물에 띄웁니다.
세상에 모든 존재를 설명한 것 가운데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중세 위대한 신학자가 표현 한 것으로 ACT와 POTENT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액트와 포텐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든 존재는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액트와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미래에 나타날 포텐트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한 겨자씨가 우리 눈에는 아주 작은 한 알의 씨앗인 액트에 불과 하지만 그 속에는 커다란 겨자 나무가 포텐트로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병이어는 어린아이의 점심거리에 불과한 액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는 5000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대 기적이 포텐트로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사건에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미래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우린 알아야합니다. 나일강에 버려진 한 어린 아이 모세에게는 보이지 않는 미래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출2:2-6절에 보면 이 사건을 기록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하숫가에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이를 보니 아이가 우는지라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라고 말입니다.
천만 다행으로 나일 강의 고기밥이 될 뻔한 아이의 운명이 바로 왕의 공주가 때 마침 목욕하러 나왔다가 모세를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는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제 바로 왕의 공주는 모세를 애굽 궁궐로 데려다가 양자로 삼아 애굽의 문물과 학문을 가르치며 훌륭한 인물로 키웁니다. 때 마침 유모를 실제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감당하게 됩니다. 모세는 비록 애굽의 궁궐에서 자랐지만 그 어머니의 품에서 젖을 빨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히브리 민족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자랍니다.
히11:23-26절에 보면 모세의 어린 시절과 성장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고 말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모세가 애굽 궁궐에서 애굽의 것을 먹고, 애굽의 것을 보고, 듣고, 자랐지만 믿음으로 성장해 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역과 고통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이스라엘 민족의 탄식 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라는 위대한 믿음의 인물을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위대한 포텐트를 숨겨 놓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세를 통하여 종살이, 노예살이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켜 주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모세와 같은 믿음과 정신을 가진 인물들입니다. 위대한 민족은 위대한 지도자를 가진 민족이요, 위대한 시대는 위대한 인물을 만난 시대입니다. 오늘의 이 시대가 불행하게 생각되는 것은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라보고 따라가야 할 존경할만한 지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교회가 관심을 기울여야할 최대의 관심거리는 무엇일까요? 바로 모세와 같은 인물을 길러내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 젊은이들이 마음껏 꿈을 갖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교회가 해야할 일은 바로 인물을 키우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의 성장과정을 추적하여 봄으로써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제2의 모세를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모세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아이였습니다. 왜냐하면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물에 띄워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어린아이들은 물결을 따라 떠내려가다가 물결이 휩쓸려 가라앉아 죽음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어머니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찾아 최선을 다했습니다. 삼 개월을 숨겨 키웠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키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갈대 상자를 만들 때도 그 속에 역청을 칠해서 물이 새들어 가지 않게 하여 안전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한 결과 모세는 바로 왕의 공주에게 건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애굽 시대에 어린 생명들이 나일강에 던져져 죽어갔듯이 오늘 이 시대도 여전히 불의와 타락과 죄악의 물결 속에 우리의 어린 자녀들이 무방비 상태로 던져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사상과 음란과 혼탁한 죄악의 물결에서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지켜주고 보호해 줄 수 있는 갈대 상자는 무엇일까요?
역청과 나무의 진이 발라져 있어 오늘의 젊은이들을 보호하여 주고 지켜줄 갈대 상자! 바로 이 갈대상자는 예수님의 보배 피가 묻어 있는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모세의 부모의 능력으로는 삼 개월 이상을 키워 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의 부모는 역시 어린 자녀들의 생명과 그들의 영혼을 지켜 주고 보호하여 주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어린 생명들은 제 발로 제 힘으로 다 자라서 걷고 뛰기도 전에 험악하고 험난한 세상의 물결 속에 던져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르게 성장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세상에서는 안됩니다. 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배 피가 묻어 있는 교회 안에다가 어린아이의 생명을 담아 놓아야합니다.
아무리 세상의 파도가 뒤흔들려도 예수님의 보배 피가 발라져 있는 교회 안으로는 세상의 물결이 들어 올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교회에서 제2의 모세를 키워야 합니다. 여기에 교회는 관심과 기도를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교회로 보내야합니다. 교회 안에서 우선이 말씀 듣고,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자라게 해야합니다. 진정으로 우리의 자녀들이 예수님 안에만 거한다면 그리고 교회 안에서 말씀대로만 자란다면 절대로 잘못된 인생으로 타락과 방조의 길을 걷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온전히 지켜줄 수 있는 능력이 이 세상에 교회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외는 우리 자녀들을 지켜주지 못함을 부모들이 먼저 올바로 인식해야합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은 우리의 사랑스런 자녀들의 몸과 삶과 영혼을 아름답게 지켜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로 행복하고 풍요로운 인생을 살아가도록 축복하여 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갈대 상자는 교회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애굽의 궁궐 안에서 풍요롭고 넉넉하게 살았지만 모세의 뼈대는 히브리 민족이요, 모세에게는 히브리 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며 히브리 민족이 섬기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히11:23절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보는 대로 배우고 듣는 대로 인격이 형성되어 갑니다. 죄 되고 불의한 것을 보고 듣고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지 못합니다. 때문에 어렸을 때의 교육이 중요한 것입니다.
잠22:6절에 가르침에 대한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는데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말씀대로 어렸을 때의 교육과 가르침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렸을 때부터 무엇을 가르쳐야 하겠는가? 오늘날의 현대 교육은 보다 좋은 상품을 생산하기 위한 기능적 교육이며, 취직을 위한 대학 교육이 되어가고 있다고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일반적 교양과목들을 개설해 놓아도 수강생이 없어서 자동 폐강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취업에 도움이 되는 과목으로만 몰려들고 있다니 사회가 스스로 기능적 인간기계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전인 교육이 되지 못하기에 사회 문제가 점점 복잡해지고 포악해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성도여러분!
모세는 애굽의 궁궐에서 당시의 최고의 문화의 문명 속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교육은 통치자가 되는 교육이며, 정치적인 인물이 되는 교육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육이 모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분명 모세는 믿음으로 성장했다고 말씀합니다. 모세는 어머니 품 안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성장하였고, 하나님에 대해서, 민족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서 배웠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의미의 죽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 죽은 사람을 가리켜 순국했다고 하고, 자기가 맡은 일에 충실하다가 현장에서 죽은 사람을 가리켜 순직했다고 합니다.
또한 자기 신앙을 지키다가 죽은 사람을 가리켜 순교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어떤 죽음일까요? 나라를 위한 순국도 아니요, 직무를 수행하다 죽은 순직도 아니며, 신앙을 지키다 죽은 순교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모든 범주를 넘어서는 죽음입니다. 그 분의 죽음은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대속의 제물이 되어 자신을 내어주신 희생의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이 진리를 깨달았기에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1)고 할 수 있었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게 마련입니다. 때문에 언제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에 우리는 더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처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살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 받아 죽는 멋진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서야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제2의 모세를 키워야 할 사명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믿음으로 죽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오늘의 시대에 필요한 인물은 믿음으로 장성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배운 사람이 필요합니다. 민족과 역사를 배운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 교육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우선 순위가 교회입니다. 그리고 금번 짧지만 동계수련회를 통해서 우리 청년부가 더욱 믿음으로 변화되고 헌신된 일꾼들로 거듭나며,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와 기도를 아끼지 말아야합니다. 교회가 사명감을 가지고 제2의 모세를 키우는 일에 전심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멋진 신앙인으로서 정치가, 기업가, 군인, 교수, 예술인들이 배출되는 교회, 사법부와 행정에서도 뛰어난 신앙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헌신하는 일꾼들과 나아가서 민족의 영혼을 책임지고 세계적인 전도자를 키워내는 사명도 교회가 감당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생명으로 응답하는 사람, 민족의 아픔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기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우리 젊은이들 속에 있는 숨겨진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있는 숨겨진 미래를 발견하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과 섭리가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드리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시대는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순종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인물들이 되어야할 것이며, 우리의 자녀들이 바로 이런 인물이 되도록 키워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를 주신 목적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난의 신비
출 1: 15-22
엊그제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8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종로를 비롯해서 전국 각 지에서 그 날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기념행사가 있었다.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병합" 조약을 강요하여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었고, 그들은 최고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인 기본권은 모조리 박탈당하였고, 민족교육은 물론, 종교의 자유도 탄압을 당하였다. 극소수의 친일파. 친일지주, 예속자본가를 제외하고는 지극히 비인간적 대우와 민족차별을 받는 중에,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전민족적인 분노와 저항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 때 마침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가의 식민지 처리에 민족자결주의를 적용하자고 주장했다. 이것은 식민지 약소민족을 크게 고무하였고, 민족해방운동을 고양시켰다.
1918년 11월 여운형, 김규식, 장덕수 등이 신한청년당을 결성하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고 중국에 온 미국특사에게 전달하였고, 일본에서는 1919년 2월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독립청원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알게되자 국내에서 33인이 중심이 되어 독립선언서가 작성되고, 3월 1일 태화관에서 낭독하고, 학생들이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 운동을 전개함으로 3.1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3월 1일에 시작하여 4월 30일까지 두 달 동안 집중적으로 일어난 이 운동은 1,542회의 시위 집회에 202만명이 참가하였으며, 7,509명이 살해당하고, 1만 6천 여명이 부상당하였다. 52,770명이 피검되었고, 교회47개소, 학교 2개소, 민가715채가 불탔다.
이 운동은 극소수의 친일파들을 제외한 전민족적 항일 독립운동, 계몽운동, 의병운동, 민중생존권 투쟁운동으로 역사상 최대규모의 민족운동이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 식민지에서는 최초로 일어난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으로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알릴 뿐만 아니라, 주변나라들의 해방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는 고난과 가난의 역사라고 말할 정도로 많은 전쟁을 치렀고, 불과 30년 전만 해도 당장 먹을 끼니를 걱정해야만 했었다. 단군기원 4,336년 동안 약 930여 회의 전쟁이 있었으니, 4-5년마다 한번씩 전쟁이 있었고, 15-20 간격으로 크게 외침을 당했다. 고구려 시대의 광개토왕이 만주를 한 번 징벌한 것 외에는 모두 다른 나라들로부터 침략을 당한 것들이다. 평화를 누리고 살아온 세월이 6.25이후의 약 50년간뿐이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 "진지 드셨습니까?" 라고 인사했다. 끼니를 걱정하는 인사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라는 미국사람들의 인사는 우리들에게는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이런 역사 속에 형성되어져 온 우리민족의 문화를 한의 문화라고 말한다. 이 잔인한 고난과 가난의 역사 속에서도 오늘처럼 살아있는 것은 기적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민족은 뜨거운 풀무 불 속에서 강하게 연단 된 무쇠 같은 민족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민족의 특성을 "은근과 끈기" 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정신을 집약해서 온 세계에 밝히 드러낸 것이 바로 3.1운동이다. 고난과 가난을 통과한 민족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오늘의 성경은 이스라엘민족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시대의 한 실상을 전해주고 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재직하던 시대에 애굽으로 이주한 70여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여년을 지나는 동안 거대한 민족을 형성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 왕이 즉위하자, 이스라엘 자손의 많고 강함을 두려워하여 탄압정책을 실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였다. 애굽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인하여 근심하다가, 마침내 인구감소정책을 강제로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산모가 아들을 나으면 산파들에게 모조리 죽이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히브리 산파들은 위협을 무릅쓰고 히브리인들의 아들을 살려주었다. 하나님께서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셨고, 이스라엘민족은 생육이 번성하여 심히 강대하였다.
이스라엘은 우리 민족 못지 않게 주변국들로부터 수많은 전쟁의 위협과 침략을 받는 속에 살아온 민족이다. 주전 2,350년 경, 샘족의 사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하여 시작된 이스라엘은 이삭과 야곱의 대를 이은 요셉의 떼에 애굽으로 이주하여 430년을 종살이하다가, 출애굽하여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정착한 후 주전 1,000년경에 국가를 형성하였다. 사울을 첫 왕으로 세운 이후, 다윗과 솔로몬까지 통일 왕국을 이어가다가 주전930년경 남북으로 분열되어, 북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하여 망하고, 남 유다는 주전 586년경 바벨로니아 제국에 의하여 망하였다. 그 이후 주변 강대국들의 각축전 속에 메대와 파사에게 국권이 넘어갔고, 그리고 헬라에게 넘어갔다가, 주후 70년에는 로마에 의하여 완전히 망하고 난 다음 세계 제2차 대전 때에는 독일의 히틀러에 의하여 600만 명이 학살당함으로 민족 생존이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1948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1967년에는 겨우 300만 명의 인구로 5억의 아랍권과 전쟁을 해서 6일만에 대승리를 거둔 이후, 오늘까지 끊임없이 전쟁을 계속 하고 있는 민족이다.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 냉전국가인 우리보다 더 심각한 전운이 감돌고 있어,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려지고 있는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다. 이 나라 역시 고난의 역사를 살아온 민족이다.
이 시간 우리는 이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고난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은혜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의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은, 그 극한 고난 가운데서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자기 백성을 도롭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강성한 민족을 만드시기 위하여, 요셉의 시대에 애굽으로 이주하게 하셨다. 그 곳에서 400여년을 지나는 동안에 이스라엘은, 70명에 불과했던 한 가족이, 전쟁에 동원될 수 있는 남자만 60만 명에 이를 만큼 큰 민족이 된다. 이것은 그들을 애굽 땅에 정착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애굽 땅에서 거대한 민족으로 일어선 이 민족은 가나안으로 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아니하고, 그 기름진 고센 땅에 영원히 정착하려 하였다. 이 때 하나님은 그들의 자리를 불편하게 만드시기 시작했다.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도록 만드셨다는 말이다.
조류의 왕자인 독수리는 그 보금자리를 만들 때에 바닥에 찌르는 가시를 놓은 후 부드러운 깃털로 덮고 그 위에 알을 낳아 새끼를 깐다고 한다. 그리고 새끼들의 날개가 어느 정도 자라서 날 때쯤 되면 큰 날개로 보금자리에 깔았던 깃털을 모두 날려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새끼들이 불편한 그 보금자리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도록 하여, 밖으로 나가서 나는 연습을 시킨다고 한다. 그래서 조류의 왕자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강대한 민족으로 육성된 후, 그곳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고난의 역사를 섭리하셨다. 이방민족과는 다르게 살아야 하는 거룩한 백성이 세상 재미에 깊이 빠져서 세속화되어져 가는 모습을 그대로 방치해 두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시어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고 나의 표징과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마는"(출 7:3, 4:21, 8:18, 9:12...)
성도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과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할 특별한 사명이 있는 사람들이다.
에베소서1:3-6의 말씀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베드로전서2:9에도 말씀하셨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완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거룩한 백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지 않는다든지,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지 못한다면, 다시 말하면 소금이 그 맛을 내지 못한다면, 밖에 버려서 사람들에게 밟히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마태복음5:13에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이것이 고난이다. 고난은 공연히 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훈련과 연단의 기회이다. 이것이 출애굽기 1장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이다.
그리고 본문이 게 주는 또 하나의 영적인 교훈은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서도 돌보시는 손길을 펴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그 백성을 눈동자와 같이 지키신다.
오늘 성경의 본문은, 애굽의 바로 왕이 이스라엘의 번성을 보면서 민족억제 정책으로 히브리 산파들에게 이스라엘의 산모들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죽이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고난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산파들을 통하여 돌보게 하신 것이다. 비록 그 백성이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한 백성으로 살지 못하여, 바로 왕으로부터 고난을 받고 있으나, 그 백성에게 베푸는 산파들의 사랑을 하나님은 귀중하게 보셨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산파들의 집은 왕성케 하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는 일은, 어느 시대나 쉬운 일이 아니다. 힘이 있다고, 돈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명을 깨닫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숨은 봉사자들을 예비해 두셨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축복하신다. 히브리파 산파들처럼!
사무엘하 6장을 읽어보면,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다윗이 나라를 견고히 하고 삼만의 사람들을 선택하여 바알레유다에 있는 하나님의 궤를 모시고 오도록 명령했다. 웃사와 아효가 중심이 되어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오다가 웃사의 실수로 인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그 때에 다윗이 법궤를 모시기를 두려워하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이 자기 집에 모시기로 결심하였다.
사무엘하6:11의 말씀이다.
"여호와의 궤가 가드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웃사의 죽음으로 인하여, 모두가 꺼려하는 법궤모시는 일을 자청한 오벧에돔에게 하나님은 소문날 정도로 큰복을 내려주셨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숨은 봉사까지 하나님은 축복하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가실 때,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간 구레네 사람 시몬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정말 뜻밖에, 아니 억지로 그 주님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사람과 그 가정에 특별한 은혜를 베푸셨다. 그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는 처음 교회에서 귀한 일꾼들이 되었고, 그의 아내를 바울 사도는 내 어머니라고 까지 말하면서 교인들의 돌봄을 당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막15:21, 롬16:13)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까지도 결코 잊지 않으신다.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 사랑까지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산파들의 수고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였고,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가장 귀중한 교훈은 이것이다. 고난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성경은 많은 부분 이스라엘의 고난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하나님은 왜 이 고난의 역사를 기록하여 두고 그 백성들로 읽게 하시는 것일까?
1. 죄를 각성하게 하신다.
에스라9:13-14의 말씀이다.
"우리의 행한 행실과 큰 죄로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이 경하게 하시고 이만큼 백성을 남겨 주셨사오니,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일을 행하는 족속들과 연혼 하오리까? 그리하오면 주께서 어찌 진노하사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
오늘의 고난이 죄의 결과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하시어, 다시는 죄 가운데 빠지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죄로 말미암은 고난을 기억하게 하시는 것이다. 망각의 존재인 우리들이 과거를 잊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를 결코 잊지 말 것이다.
2.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하신다.
고난의 역경 속에서 구원받은 것은 결코 내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해방되었다" 라는 수동태를 쓴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이다.
신명기 6:12의 말씀이다.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다시 기억하거니와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시고, 전쟁에서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다윗은 그 은혜를 망각했다. 그리고 부하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여 범죄하고, 부하를 고의적으로 살해하는 중죄를 지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목동이었던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시고 때를 따라 은혜를 베푸시고 부족한 것 없이 주셨는데, 감사를 잃고 죄를 범하다니 하나님은 그 죄를 괘심 하게 여기셔서 책망하셨다. 무엇이 부족했단 말인가? 만일 부족하다 했으면 더 주었을 것인데! 은혜를 망각하는 일은 자신을 죄에 빠지게 하는 시작이다. 하나님은 고난의 때를 기억하게 하신다.
3. 더 큰 재앙을 막게 하신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역사는 우리들에게 소중한 교과서이다. 지난날의 일을 통하여, 오늘의 삶의 지침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박물관을 세우는 가장 중요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옛 일을 기억하고 원수를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는 똑같은 고난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오늘 우리는 북한의 현실을 보며 쇄국 정책이 남긴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지고 오는지를 생각한다. 최근에 세계 종교인의 통계를 낸 것을 보면, 기독교가 33.3%로 약 20억명, 이슬람이 13억 명, 힌두교가 9억명,....그런데 북한은 주체사상종교로 1,900만 명으로 세계10위 종교로 분류한 것을 보았다. 백성들은 굶어 죽이면서까지 전쟁에 광분하여 증오와 미움으로 가득한 폐쇄적인 국가체제는 한 사상을 넘어서 하나의 종교를 를 만든 것이다. 역사적인 교훈을 망각한 처사이다. 역사조차 조작한 민족의 비극이다.
4. 희망을 갖게 하신다.
그 극심한 고난의 역사 가운데서도 소멸되지 않도록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오늘의 고난의 역사 가운데서도 지켜주실 것을 바라보며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이다.
유대인들의 기억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사막 길은 뜨겁고 목마르고 죽음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사막을 여행하다가 묘지를 발견하게 되면 반가워한다. 무덤 근처에는 반드시 동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절망의 죽음 뒤에는 반드시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무덤 앞에서 희망을 갖듯이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 3.1절 83주년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고난과 가난으로 점철된 민족의 역사를 기억한다. 그러나 그 오랜 역사의 어둠 속에서, 소중한 영적인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난은 죄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말라. 더 큰 재앙을 대비하라.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고난을 통과한 민족답게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긍지를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