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의 날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 6,33
똑같은 대화를 하였어도 그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같은 대화여도 어떤 이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이야기 하지만 어떤 이들은 부정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어떤 이는 그 대화을 통해서 풀어가 의미있는 의견을 내는 반면, 어떤 이들은 그 대화를 무겁게 해석하고 의견이 꼬이게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떤 대화와 이야기의 나눔에서 그 말을 긍정적으로 존중합니까? 아니면 부정적으로 바라봅니까? 어떤 이의 부정적 생각과 가치를 긍정적 의미와 뜻을 찾아낼 수 있습니까?
하느님을 알고 믿는 이는 상대의 현상에 드러나는 부정적인 모습 속에서 긍정적, 생명적, 구원적 모습과 가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뭇 사람들이 사회와 일상의 환경, 규범, 가치의 것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설령 그가 죄인이고 반대자이고, 사람들이 그를 손꼬락 표시 하여도 그것을 되돌릴 수 있는 선한 가치와 자비의 가치, 정의와 공정의 가치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는 세리도 있었고, 혁명당원도 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을 구현하는 제자단에게 그들이 있다는 것은 꽤나 특이합니다. 세리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크게 부담하고 받는 사람들, 더욱이 로마 제국의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로서, 그들은 그 제국의 부역자였습니다. 유대 율법에서는 자신들의 성결 때문에, 불결하거나 백정이나, 성의 직업을 가진 여성들에게 율법의 벽을 쌓았으며, 그들을 혐오하였습니다. 예수님 제자 가운데 혁명당원인 경우는 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율법이나 정치적 보복과 회복을 하는 사람들로서 칼로써 대항하고 승리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이들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관원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제자로 맞아드렸고 그의 집에서 식사하였으며, 그의 주변의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교제하였습니다. 바리사이의 율법학자들이 율법 규정을 거스린 예수님을 나무라자, 예수님은 그들이 준행하는 율법 규정과 전혀 다른 해석을 내어놓고, 당신 판단과 결정을 내렸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 1,17
예수님의 복음. 그 기쁨 안에는 어떤 특정한 종교 규범, 지위나 신분, 정치적 판단이나 행위, 선인과 죄인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그의 잘잘못, 비겁과 약함, 너울과 허울, 사회적 단죄와 규정 등 까지도 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하느님의 자녀 백성으로서 새롭게 되고 새로 태어나며 오직 그가 생명으로 쇄신되기만을 바라셨습니다. 그가 어떤 비난이나 비판, 죄를 지어 죽을 죄인이라 하더라도, 그를 살리는 것에 모든 것을 거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반대하고 율법을 어겼다고 하여도 그분은 그의 생명과 구원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였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살리시는 장면이나 세관원 레위를 제자로, 그리고 세관장이 자캐오의 집에 머무르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토요일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이 날입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묵상하고 그 길을 따라갑니다. 하느님 나라의 죄인이어도 죽을 죄를 짓었어도, 그가 다시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자비,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명을 얻어 재 탄생하는 삶의 노력을 하는 나라입니다.
주님, 오늘 선과 사랑 생명의 하느님 나라를 찾게 하소서. 누구를 만나듯 편견을 갖지 않고 선과 생명과 구원을 먼저 찾는 제자되게 하소서.
이재을 신부
첫댓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의 날>
하느님을 알고 믿는 이는 상대의 현상에 드러나는 부정적 모습 속에서 긍정적, 생명적, 구원적 모습과 가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