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달 오천 원가량의 용돈을 현금으로 지급받았다. 당시의 우리는 매우 어렸어서 정부에서는 현금계좌를 개인에게 별도로 지급하지 않았다. 금융에 대한 계념과 이해도가 나이에 비해 덜 교육되었기 때문에 반 전체의 돈 관리는 담당 수녀님과 보육선생님이 총괄하셨다. 그리고 각자의 이름이 기입된 용돈기입장을 초등학생 6학년까지 관리받았다. 저학년 때는 담당 수녀님께서, 고학년 때는 우리들이 알아서 관리했다. 결과적으로는 그 모든 기록을 수녀님이나 보육선생님께서 생활기록부에 담아 시설장 수녀님께 통보하는 식이었다. 기입장을 쓰는 일은 매우 귀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쓰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기입장 문제로 반의 세간에 화제가 되는 친구도 있었다. 비틀즈 소속의 가수 링고 스타만큼이나 스타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기억하는 것과 쓰는 것이 지그재그로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면 감정도 같이 직선형 미끄럼틀에서 지그재그로 삐뚤 해졌다. 기입장 글씨도 넌씨눈처럼 마찬가지였다.
여름방학이 되면 우리는 점심을 먹고 나서 엄마 수녀님과 함께 시장놀이를 했다. 이 프로그램은 1년에 한두 번꼴로 발생하는 빅 이벤트였다. 돈을 써본 적이 없어 쓸 줄 몰랐던 우리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10원짜리 동전을 발견하면 엄마 수녀님한테로 달려가 "엄마, 이거 어떡해요?" 하는 신참 햇병아리였다. 엄마 수녀님께서 길거리에 있는 동전까지 관리하게 된다면 맡은 일이 더욱 번잡해질 수 있었기에 그냥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놓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매 달마다 정해진 날에 월급이 들어오는 것처럼 용돈도 그와 같은 날짜에 지급되었다. 대략적으로 월말이나 월초였다. 이 용돈으로 불광천 건너 보이는 이마트에서 팔백 원짜리 2L 콜라 한 통과 작은 장난감 몇 개, 로봇 장난감을 살 수 있었다. 개중 가장 많이 눈에 들어온 것은 시설 후문과 가까이 위치한 금성 문구에서 파는 장난감이었다. 오백 원짜리 동전을 들고 에그몽을 뽑거나 혹은 감자떡 같은 끈끈이 장난감. 탱탱볼과 액체 괴물, 그리고 딱지를 샀다. 장난감이 성행하던 그 당시 주류를 이룬 진귀품은 고무로 되어 있는 캐릭터 딱지로, 에그몽 장난감과 치열한 경쟁력을 뽐내는 센세이션이었다.
노란 알 장난감 에그몽. 에그몽은 노란 플라스틱 캡슐 안에 미니 조립식 장난감이 들어있는 계란 형태의 장난감으로 주로 초콜릿을 좋아하는 어린이들에게 인기 대폭발 아이템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흔하기도 했지만 독특한 장난감이 나오면 한순간에 희소성으로 인정받는 레어 등급 아이템이기도 했다. 꽝과 광(光)이 엇갈렸다. 나는 이 장난감을 무척 좋아해서 친구들과 가진 딱지를 맞바꿀 정도인 은둔형 수집가였다. 수집가가 되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한 물건에 집착하고 차곡차곡 모으기만 하면 간단했다. 공식은 심플하나 인내가 어려웠다. 인생이 마법 따나 잘 되는 공식은 결국 비극 같은 희극이었다고 찰리 채플린 감독님이 말씀하셨다. 은밀하게 위대하게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수집가가 될 수 있었다. 열린 입으로 정보가 샌다면 경쟁자들이 몰려와 호시탐탐 빼앗을 기회를 노렸기 때문이다. 그림자로 도사리고 있는 불안감은 장난감을 많이 보유함으로써 정서적 충만감이 티끌을 끌어모아 단단히 채워졌다. 현실적인 의미로는 가난했지만 다른 의미로 부자였다. 에그몽은 은박재질의 껍질과 초콜릿이 타원 모양에 맞는 형태로 뒤덮인 '군것질 속 장난감'이다. 초콜릿을 다 먹어치우고 나면 노란 캡슐이 나왔다. 이 캡슐은 성인 남성이 손으로 쥐면 한 번에 다 들어오는 크기였으며, 그 크기가 실제 달걀과 정말 똑같았다. 고사리손이었던 우리가 이 장난감을 쥐어도 그리 크지 않아 꽝이 나오면 눈처럼 던져버렸다. 장난감 종류도 정말 다양했다. 보통 아이들은 복잡하게 조립할 수 있는 장난감을 좋아했다. 창조성의 시작은 살점 피질로부터 자취를 감춘 신경 말초 내지 두뇌에 도달하기까지 창조력을 관장하는 영역에 작은 파도와 쓰나미를 일으킨다. 더불어 장난감이라면 환장하던 난 욕심이 엄청났다.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암거래상처럼 과자를 내주어서라도 손에 기필코 넣고야 말았다. 그렇게 딱지 부자가 되었고 어느 대전에도 참가할 수 있는 자격조건을 갖출 수 있었다. 덕분에 어깨가 뽕얹은 듯 두툼하게 울었고 딱지를 담은 주머니가 묵직해질수록 부자가 된 허영심에 절었다. 비록 용돈기입장은 투머치하게 진솔한 것이 최대의 함정이었다.
용돈이 나오면 외간 곳에 쓰는 또 다른 경우는 오락실이었다. 금성 문구 앞에 두 세대의 오락기기들이 투명한 천막으로 가려진 곳으로 오면 주변에 어슬렁거리던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소박한 군집을 이뤘다. 우리들은 평일에 여기로 올 수 없었다. 가끔 주말에 오거나 외출 후에 보육원으로 다시 돌아오다 문구에 불이 켜져 있으면 미리 짠 것처럼 게임을 했다. 게임이 끝나면 지각한 걸 티 나지 않도록 일행의 꽁무니를 쫓거나 화장실에 갔다고 친구들에게 미리 거짓 귀띔했다. 식사시간에 늦기라도 하면 곤란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오락실 앞에서 다른 친구가 게임하는 것을 보다 늦은 친구는 더군다나 할 말도 없었다. 늦은 이유가 게임이란 걸 아시는 수녀님은 짐작하는 정도가 아니라 <매트릭스>의 오라클처럼 꿰차셨다. 눈치 백 단인 수녀님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지 궁리만 하던 우리는 짬나는 시간에 어떻게든 게임하려는 악습관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학교에서 오전 수업시간이 끝나면 우리는 실내수영장 앞에 있는 분홍 대리석재 단상으로 가 주머니에 숨겨놓은 딱지를 하나씩 꺼내 놓았다. 크기도 매우 다양해서 큰 딱지를 들고 있는 강적에게는 그에 맞게 큰 딱지를 꺼내야 했다. 부자아이는 가방 속에 아예 따로 딱지 백을 챙기고 다녔다. 교과서 사이로 틈틈이 딱지를 숨기는 경우도 있었다. 딱지가 많은 사람은 친한 친구들끼리 유희왕 카드나 딱지 일부를 베팅을 심심치 않게 걸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꼭 영화에서만 보던 베팅. 타짜들의 여흥 거리는 사뭇 달랐다. 미나리과 풀의 진한 내음이 풍겼다. 고수군? 이땐 나처럼 가난한 친구는 투명인간처럼 쓱 빠지는 게 유일한 승천 길이었다. 만일 딱지를 걸기라도 했다간 잘하는 친구에게 다 털리는 건 안 봐도 비디오였기 때문이다. 배심원이나 검사가 법정 배틀을 위한 증거물 소지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전에 조사를 기각하고 뒤로 돌아서야만 했다. 뜯기지 않으려면 그래야 했다. 언젠가 한 번 많은 딱지를 딴 적도 있었는데 고수 친구에게 대결 신청을 했다가 호되게 당해 눈물을 머금어야 했다. 누가 싸웠냐고 물어보면 아니라는 대답 대신 축 처진 머리를 저었다.
'알거지.'
의도치 않게 히든(hidden)이란 명찰을 갖게 되었다. 딱지를 얻고 나면 승리감과 우월감을 쓸어 담게 되지만, 잃으면 좌절감과 슬픔을 긁어모았기에 위험한 일에 배팅하는 시도는 되도록이면 하지 않았다. 위험을 감당할 정도라면 시도해 보는 건 괜찮았지만 감당할 힘이 없다면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방법임을 이를 통해 깨달았다. 고무딱지뿐만 아니라 종이딱지도 장안의 화제였다. 그때는 스마트폰이란 것이 없었기에, 아날로그식 필통 게임과 딱지, 카드 등이 인기이자 시대의 오락을 한 줄로 대변하는 대세였다. 어린양처럼 순수한 마음에 이런 것이 아니면 다른 물건에 딱히 '이렇다' 할 감흥이 없었다. 이 오락이 성행하던 때는 초1~4학년 때까지였다. 고학년이 되고 나서부터는 필통 게임에 더 많은 관심이 쏠렸다. MP3라는 전자기기가 처음 나오던 시절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간 후부터는 노래를 듣는 것이 취미가 되었고, 이어폰 줄을 따라 오묘한 멜로디를 연주하는 외계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잼민 카사노바가 만든 복잡하게 얽힌 연줄은 아쉽게도 패착인 것 같았으나, 산등성이에 걸친 노란 해가 다음에 뜰 해를 인양할 때마다 그때 친구들과 함께 바라본 해가 가장 값어치 있는 잭팟이란 걸 시대의 가무꾼(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대표 가수)은 알려주었다. 바로 그때 마음속의 비열한 웃음을 짓는 원숭이가 주머니를 짤랑거리며 다가왔다.
"나한테 갚을 돈 어디 갔어? 또 삥땅 친 거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