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37]3년 5개월만의 특강 “기록의 나라, 대한민국”
보름 전쯤, 국민연금공단 감사실에서 ‘인문학특강을 해줄 수 있느냐’는 ‘고마운’ 제안이 왔다. 국민연금공단을 비롯한 사립학교교직원연금공단, 공무원연금공단, 한국투자공사 등 4개기관 감사팀 40여명이 1박2일 워크샵을 하는데, 마지막 순서에 인문학특강을 넣고 싶다는 것. 불감청고소원, 대답은 물론 주저없이 ‘당근’이다. 문제는 수강대상이 모두 감사업무 종사자이므로 특강내용이 ‘역사 속의 청렴 또는 감찰(감사) 사례’를 중심으로 하면 좋겠다는데, 그 주제로 못할 것은 없으나 ‘상당한 공부’(조선왕조실록 등 사서를 뒤져 수집하고 정리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림)를 해야 하므로, 내가 잘 할 수 있는 주제 ‘한국의 세계기록유산’(제목이 <기록의 나라, 대한민국>)으로 하면 안되겠느냐. 상식과 교양 차원에서도 좋은 내용이라고 했더니 “좋다”고 한다. 이 주제라면 아무 때든 자신이 있고, 코로나19 발발이후(2020년 2월이후) 5년 6개월 동안 중단된 특강을 재개한다는 의미에서 기대가 됐다.
모처럼 목욕단장을 한 후 아내가 준비해준 날렵한 생활한복을 입고 고급스런 강연장(국민연금공단 국민홀)에 도착한 게 어제 오전 9시30분. 먼저 초청해줘서 고맙다고 말문을 연 후 유네스코가 2년마다 전세계 국가나 단체의 신청을 받아 등재하는 ‘세계기록유산’을 들어봤으며, 우리나라는 이제껏 몇 건이나 되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침묵. 허나, 최근(5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날아온 낭보朗報를 전했더니, 그 뉴스는 들은 것같다 한다. 낭보인즉슨, 우리나라가 등재를 신청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1918점’과 ‘4.19혁명 기록물 185점’이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2017년이후 6년만에 동시등재가 된 것.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와 기반을 형성한 역사적 기록물에 대한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기록유산에 모두 18건이 등재되어 독일 24건, 영국 22건에 이어, 폴란드와 함께 공동3위가 되었고, 아시아에서는 단연 1위(등재된 전세계 기록유산은 모두 432건. 중국 13건, 일본 7건, 태국 5건, 베트남 3건, 북한 2건 등). 이것은 순위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가 명명백백 ‘기록의 나라’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비록 잘 못하는 특강이지만, 나는 지난 2015년 6월부터 2020년 1월까지 한 달에 1, 2회 이 주제를 비롯하여 ‘조선의 궁궐’ ‘조선의 왕릉’ ‘한양도성의 이모저모’를 주제로 특강을 해왔다(수강생 모두 5천여명). 강의 초반에 ‘한국의 세계기록유산’ 전도사를 자처하는데, 이 주제로 특강을 하는 인문학강사는 대한민국에 내가 유일하다며, 은근슬쩍 ‘잘난 체’도 덧붙였다.
다행히 소년조선일보(현 어린이조선일보)에 1주 1회(2018년 3월 6일- 7월 24) 1면 통째로 200자원고지 10장분량으로 연재한 것을 PDF를 받아 소책자로 만들어놓은 게 있어, 강의교재로 안성맞춤이었다. 1회는 총론總論이고 2-17회까지는 각론各論, 18회는 결론結論이며, 19-20회는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있는 재미난 일화들을 기술했다. 2018년 당시에는 세계기록유산이 16건. 6년이나 등재심사가 미뤄진 까닭은, 미국과 일본 때문이다. 8개국 15개 시민단체가 자료들을 수집하여 등재를 공동으로 신청한 게 ‘위안부에 대한 기록물’이었는데, 일본이 ‘해당국들의 갈등이 있는 기록은 등재하면 안된다. 수용하지 않으면 유네스코 탈퇴도 불사하겠다’며 협박조로 제도개선을 요구했고, 미국(트럼프)은 유네스코를 탈퇴해 1년 200억이 넘는 분담금(회비)을 내지 않는 바람에 우여곡절을 겪은 것이다. 18건이니만큼 1건에 3분을 설명한다해도 54분, 총론과 결론 그리고 기타 세계유산, 세계무형무산 등을 곁다리로 설명하려니 90분 특강도 짧았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최소한 한국이 보유하고 있는 18건의 세계기록유산이 무엇무엇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줄줄이 읊은 리스트를 적어본다.
▲훈민정음해례본+조선왕조실록(1997) ▲직지심체요절+승정원일기(2001)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조선왕조 의궤(2007) ▲동의보감(2009) ▲1980년 인권기록유산 광주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일성록(2011) ▲난중일기+새마을운동 기록물(2013)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기록물+한국의 유교책판(2015)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물+국채보상운동 기록물(2017) ▲동학농민혁명 기록물+4.19혁명 기록물(2023).
이러니 이 18건에 대하여 아무리 소략疏略하게 설명한다해도 할 말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야말로 무궁무진, 이 주제로 3시간을 한대도 부족할 판이다. 중국의 13건, 일본의 7건과 비교해도 압도적이다. 그래서 ‘기록의 나라,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다. 모 일간지에 처음 내가 지은 이 작명이 실렸다(저작권은 당연히 나에게 있다). 흐흐. [기고] ‘기록의 나라’ 대한민국/최영록 한국고전번역원 홍보전문위원 | 서울신문 (seoul.co.kr) 한편 북한은 ‘먹고 살기 바빠’ 세계기록유산 등재신청에 뒤늦게 눈을 떴다. 2017년 정조때 펴낸 군사교본 ‘무예도보통지’가 처음 등재되었고, 올해 천문도 ‘혼천전도’가 등재되어 모두 2건.
유네스코가 하는 일이 제법 많은데, 세계유산과 인류무형문화유산도 신청을 받아 등재를 한다. 우리나라의 세계유산은 모두 15건, 북한은 4건. 세계유산은 3종류가 있는데, 세계문화유산, 세계자연유산, 세계복합유산이 그것이다. 화산섬 제주와 용암동굴이나 한국의 갯벌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므로 자연유산, 수원 화성이나 석굴암 등은 문화유산이다. 자연과 인위적인 것이 혼합된 유산이면 복합유산이다. 그 목록도 적으니 일별해 보면 좋겠다.
▲종묘+해인사 장경판전+석굴암과 불국사(1995) ▲수원 화성+창덕궁(1997)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경주역사유적지구(2000년)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 ▲조선왕릉(2009) ▲한국의 역사마을:하회마을과 양동마을(2010) ▲남한산성(2014) ▲백제역사유적지구(2015)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2018) ▲한국의 서원(2019) ▲한국의 갯벌(2021). 세계유산은 이탈리아가 58건으로 가장 많고, 중국이 57건, 일본이 25건으로 우리보다 앞섰으나, 북한은 고구려고분군과 개성역사문화지구로 2건이다. 전세계적으로는 1154건이 등재돼 있다.
인류무형문화유산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는 ▲종묘제례 및 제례악 ▲판소리 ▲강릉단오제 ▲영산제 ▲남사당놀이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 ▲강강술래 ▲처용무 ▲가곡, 국악관현반주로 부르는 서정적 노래 ▲매사냥, 살아있는 인류유산 ▲대목장, 한국의 전통 목조건축 ▲한산 모시짜기 ▲택견, 한국의 전통무술 ▲줄타기 ▲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 ▲김창,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 ▲농악 ▲줄다리기 ▲제주해녀문화 ▲씨름, 한국의 전통 레슬링 ▲연등회, 한국의 등축제 ▲한국의 탈춤 등 모두 22개. 북한은 ▲조선민요, 아리랑 ▲김치 담그기 전통 ▲씨름, 한국의 전통 레슬링 ▲평양랭면 풍습 등 4건. 여기에서 재밌는 것은 남북관계가 한참 우호적이었던 2018년 씨름이 남북한 공동등재됐다. 등재된 전세계 인류무형문화유산은 모두 498건.
마지막으로, 우리나라는 독특하고 유일한 기록도 등재돼 있다. 팔만대장경은 세계기록유산이며, 그 대장경을 천년도 넘게 수장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은 세계유산으로, 유산 2관왕이다. 또한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은 세계기록유산인데, 이 ‘책보(어책와 어보)’를 임금 신위 뒤에 비치한 종묘는 세계유산이며, 해마다 10월 제례를 지내는 종묘 제례 및 제례악은 세계무형문화유산이므로, 유산부문의 3관왕, 이른바 그랜드슬램의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다. 자랑스럽고 멋진 일이다.
아무튼, 어제는 특강 100분을 하고나서 “ 열강熱講, 좋은 내용, 잘 들었다”는 말을 여러 번 들으니 으쓱으쓱, 기분이 좋았다. 이제 코로나도 대충 해제된 만큼, 이런 강의 요청이 줄을 이으면 좋겠다. 특히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면 좋을텐데. 왜냐하면 우리의 상식과 교양을 위해서라도 알 것은 알아야 하니까.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그전과 생판 다르다는 말은 진리일 테니까.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