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옥천초등학교를 다니다가, 3학년 때 강릉 성덕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래서 강릉 월대산 밑에 살게 되었다.
아버지가 10월 유신으로 강제 퇴직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월대산 밑에서 닭을 키우게 되었다.
고추도 많이 재배했다.
고추를 너무 많이 키워 고추를 팔기 위해 어린 어머니와 강릉 중앙시장에서 팔고 오다가, 어머니를 유혹하는 청년들의 휘파람 소리도 들었다.
월대산 밑의 소년 시절은 나의 황금기였다.
여름이면 남대천에서 수영을 했고, 장마철에 수영을 하다가 남동생이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다가 겨우 살아나고 부모님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하기로 하고, 남동생은 변소에서 똥을 싸면서 나에게 말했던
“형.......똥이 너무 잘나와”
그 말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월대산 밑의 어린 시절의 가장 생각나는 일은 과수원 서리였다.
학교 갔다 오다가, 주변에 넘처났던 과수원에 들어가 여름이면 복숭아 자두, 가을이면 사과 배를 원 없이 먹었다.
그때는 그것이 범죄가 아니었다.
아이들의 놀이였고 ‘서리’ 라고 불리우는 추억었다.
서리의 기억이 고등학교 때까지 이어졌다.
고등학교 때 나는 전과자였다.
너무나 많은 사고를 쳐서 학교에서 유명해서 누구도 나를 건들지 못했다.
정학은 1주일 짜리부터 무기정학까지 다양하게 받았다.
지도과장 선생의 기소부터 재판까지 일사천리였다.
한번은 정학을 받고 강릉고 테니스장 건설로 노가다를 하다가, 쉬는 시간에 강릉고 뒤의 과수원을 습격했다.
나를 위해서 노력하는 선생님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보답을 하고 싶어서 였다.
과수원의 복숭아를 후배 아이들을 동원을 해서 10 바게스를 따왔다.
그리고 반성문을 첨가했다.
나의 반성문은 이과를 벗어나 국어 선생이 문과 아이들에게 글은 이렇게 써야 한다는 교재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선생님들이 쉬는 시간에 버리고 간 담배 꽁초를 모았다가 아이들에게 팔아서 돈을 버는 부업을 하기도 했다.
며칠 후, 복숭아를 먹은 교무실은 난리가 났다.
과수원 주인이 선생님들을 절도로 고발을 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돈을 물어줘야 했다.
복숭아 값을 물어주기 위해 강릉고 선생님들의 월급을 전부 모아야 했다.
과수원을 싹쓸이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의 반성문이 내가 글쓰기 취미가 된 원인이었고,
그 시절의 남대천에서의 수영이 육군에서 사고를 치고 내가 해군에서 SSU 군인이 될 수 밖는 원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닭을 키우다가 닭 콜레라로 닭이 전부 죽자, 다음 해 봄에 농고 선생님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기여이 강릉고를 졸업을 못하고, 묵호로 전학을 왔고, 아버지는 교사가 되어서도 나 때문에 고생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