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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7장: 지혜와 어리석음이 대조됨
1-7절, 좋은 이름, 초상집, 우매자
[1절] 아름다운 이름(토브 쉠)[좋은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좋은 이름은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 좋은 이름이란 경건하고 선한 사람이 죽은 후에 그에게 붙여지는 이름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경건한 사람, 의로운 사람, 선한 사람 등의 이름이다. 보배로운 기름은 값비싼 향유를 가리킨다. 좋은 이름은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 값비싼 향유는 잠시 동안 좋은 향기를 내지만, 그것은 물질적 향기에 불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사라지고 없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좋은 이름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또 역사 속에 남는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로 올리운 자로 오래 기억되며,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한 자로 오래 기억된다. 아브라함은 믿음과 순종의 사람으로 오래 기억되며, 다윗은 믿음과 찬송의 사람으로 오래 기억되며, 히스기야는 경건한 자로 오래 기억된다. 이들은 다 후대의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다.
죽는 날은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 죽는 날은 사람이 일생을 마감하는 날이다. 그 날 의인은 그의 의로운 생을 정리하고 결산하며 그의 이름을 남긴다. 주 예수께서는 가장 좋은 이름을 남기셨다. 죽는 날은 또 의인이 죄와 슬픔, 질병과 고통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는 날이다. 그러나 출생하는 날은 사람이 생을 시작하는 날로서 어떻게 살지 미지수이다. 믿음으로 살고 의롭게 살면 그의 생이 복되지만, 믿음 없이 살고 죄만 짓고 살면 그의 생은 큰 화가 된다. 주 예수님을 배신하고 악한 자들에게 그를 팔아 넘겼던 가룟 유다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던 제게 좋을 뻔한 자’(마 24:26)이었다. 사람은 생일보다 어떻게 살다가 죽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2-4절]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이는]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사람이 잔칫집에 가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면 죽음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없고 경건하고 바르고 근신하고 절제하는 생활에 대해서도 잊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상을 당한 집에 조문하러 가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으며 그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유익하다.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며 진실하고 정직해야 하고, 또 죽음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일, 책망받을 일, 양심에 거리끼는 일, 시간을 낭비하는 일을 버려야 한다.
또 슬픔은 웃음보다 낫다. 왜냐하면 사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써 마음이 좋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웃을 때는 자기 부족과 연약을 잊어버리고 죽음의 일도 잊어버리기 쉽고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하며 죽음을 대비할 기회를 놓치기 쉽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을 살피며 자신의 범죄와 하나님의 징벌 때문에 슬퍼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때 심령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회복의 은혜를 얻게 될 것이다. 특히 회개의 슬픔은 유익이 많다. 주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5:4).
그러므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즐겁게 노는 집에 있다. 우매자들은 잔칫집에 모여든다. 그들은 현재의 육신적 즐거움을 좋아한다. 그러나 지혜자들은 잔칫집보다 초상집에 참석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기에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더욱 가다듬게 되고 내세를 준비하는 지혜를 얻기 때문이다.
[5절]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책망을 좋아하는 자가 없고 책망 자체는 듣는 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무겁게 하지만, 경건한 자의 바른 지적과 책망은 유익을 준다. 책망을 듣는 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6:23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했고, 잠언 27:5-6은,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말했다. 또 옛날부터 참 선지자는 책망의 설교를 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나와 너 이전 선지자들이 자고로 여러 나라와 큰 국가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고 말했다(렘 28:8). 책망을 잘 듣는 것이 복이다.
우매자의 노래는 듣기는 좋으며 마음을 즐겁게 할지 모르나 아무 유익이 없다. 그것은 전도서 2:2에서 전도자가 웃음을 논하여 미친 것이라고 표현하고 희락을 논하여 저가 무엇을 하는가라고 말한 것과 같다. 선지자 아모스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유다 백성이 비파에 맞춰 헛된 노래를 지절거렸다고 증거하며 책망하였다(암 6:5).
사람의 참 의미와 가치는 하나님 안에서만 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시기 때문이다. 구주 예수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의 계명을 힘써 순종해야 하고, 그럴 때 현세와 내세에 풍성한 평안과 복을 누릴 것이다.
[6-7절] [이는]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헛됨이니라]. [참으로](KJV)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케 하느니라.
우매자의 노래소리보다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더 나은 이유는 우매자의 웃음소리가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며 이것도 헛되기 때문이다.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는 일시적으로는 요란하지만 곧 그친다. 우매자의 웃음소리도 그러하다.
또 탐학은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은 사람의 명철을 부패시킨다. ‘탐학’이라는 원어(오쉐크)는 ‘압제, 토색[강제로 빼앗음], 토색으로 얻은 이익’을 뜻한다(BDB). 이것은 위협하여 강압적으로 빼앗는 이익을 가리킨다. 이것은 개인에게나 국가에 다 적용된다. 성경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 교훈한다(고전 5:11).
토색은 탐심에서 나온다. 성경은 탐심을 정죄한다. 롯의 아내는 재산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므로 소금기둥이 되었다(창 19:26). 아간은 여리고 정복 때 시날산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3kg, 또 600g의 금덩이 하나를 탐했다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수 7장).
또 뇌물은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고 명철을 부패시킨다. 출애굽기 23: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우리는 의롭게 번 적은 소득이 복됨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잠 16:8)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보배로운 기름보다 좋은 이름을 귀히 여기자. 단지 생일을 축하하지 말고 믿음으로 의롭고 선하게 살다가 죽기를 사모하자.
우리는 잔칫집보다 초상집에 참석하자. 우리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내세를 준비하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며 악을 멀리하자.
우리는 세상의 유행가들이나 우매자들의 노래를 좋아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종들과 믿는 교우들의 책망과 권면을 좋아하자.
우리는 우매자의 기쁨을 버리고 토색과 탐심 또는 뇌물을 멀리하며 불의의 이익을 구하지 말고, 오직 정직하게 번 돈으로 살아가자.
8-14절, 겸손과 인내, 불평, 지혜, 섭리
[8절]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아무리 크고 좋은 일이라도, 일의 시작은 시작일 뿐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시작이 중요하다는 뜻일 뿐, 그 일이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일이 잘 안 되어서 오히려 해가 되거나 수치가 될 수도 있다. ‘일의 끝’은 일이 성취되어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을 말한다. 무슨 일이든지 잘 계획하고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잘 진행하고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잘 이기고 치명적 실수 같은 것을 막아 그 일을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어떤 일을 잘 성취하려면 인내가 필요하고 또 인내는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만 가능하다.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많은 노력과 많은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낙심치 않고 오래 참은 자들이다. 농부도 밭 갈고 씨 뿌리고 물과 거름을 주고 김 매고 병충해를 막고 이렇게 참고 일해야 추수하게 될 것이다. 직장인도 겸손히 참으며 일을 배우고 노력해야 성공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열심히 공부하고 커서 취직하고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는 자들의 삶 전체가 그러하다. 겸손과 인내는 인생의 성공적인 삶의 필수적 덕목이다.
신앙생활도 비슷하다. 주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성공적인 신자를,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눅 8:15). 야고보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교훈하였다(약 5:7-8). 믿음은 인내를 수반한다.
[9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마음’이라는 원어는 ‘영’이라는 말이다. 사람의 생각과 감정은 영의 활동이다. 우리는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물론, 정당한 노가 있다. 불의를 보고 노하는 의분은 정당성이 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노가 있다(나 1:6). 예수께서 채찍으로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신 의분도 있다(요 2:15). 핍박하는 악인들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의 징벌을 호소한 시편의 글들도 이런 의미에서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과 감정은 지나치고 잘못되기 쉽다. 그러므로 잠언은 미련한 자가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고(잠 12:16) 속히 노하며(잠 14:17) 그 노를 다 드러낸다(잠 29:11)고 말한다. 또 야고보서 1:20은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노하기를 더디하라고 교훈한다. 그것은 인내의 한 면모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본받는 것이다. 잠언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며(잠 14:29) 슬기로운 자이며(잠 19:11) 용사보다 낫다고 말한다(잠 16:32). 또 주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교훈하셨다(마 5:44).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성내지 아니한다고 말했고(고전 13:4-5),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교훈하였고, 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교훈하였다(엡 4:26, 31-32).
[10절]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
사람이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비교가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것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도 단편적인 이야기일 경우가 많을 것이다. 역사에는 항상 이면적 이야기가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날이 오늘보다 나았다는 불평어린 평가를 버리자. 실상, 옛날에도 어려운 일들은 있었을 것이고 더 많았을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모든 현실을 겸손히 긍정하고 감사히 받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우리에게 현재 어떤 부족이나 어려움이 있다면, 우리는 그 원인을 생각하며 자신을 성찰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라면 우리는 즉시 회개하며 그것을 달게 받아야 하겠지만, 만일 그것이 단순히 하나님께서 주신 훈련 과정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참고 견뎌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려운 현실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과 돌보심을 구해야 할 것이며, 또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건하고 의롭고 성결하게 살면서 미래의 평안을 기대하며 참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하나님께 감사할 일들이 많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의 징책하심보다 크다. 사사기는 111년의 징계의 햇수와 296년의 평안의 햇수를 증거한다. 시편 30:5는,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예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셨고 우리를 인도하셨고 이곳까지 우리를 도우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시다.
[11-12절] 지혜는 유업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하도다.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
‘햇빛을 보는 자’는 모든 살아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지혜는 유업같이 모든 살아 있는 자들에게 유익하다. 부모로부터 받는 유업과 유산은 물질적 유여함을 주는 좋은 것이다. 본문은 지혜와 돈이 다 보호하는 것이 되지만, 지식과 지혜가 돈보다 더 낫다고 말한다.
돈이 있으면 영양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따뜻한 옷을 입을 수 있고 편안한 집에서 살 수 있고 몸이 아프면 좋은 의사와 약의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또 돈이 있으면 자녀도 좋은 교육을 받게 할 수 있다. 이처럼 돈은 우리의 건강과 우리의 자녀를 보호하는 점이 있다.
이와 같이, 지혜도 우리를 보호한다. 지혜는 잘못된 빚 보증을 하지 않게 함으로 재산을 보호한다. 지혜는 우리를 게으르지 않게 함으로 가난으로부터 보호한다. 지혜는 교만하여 서로 다투지 않게 함으로 인간 관계를 보호해준다. 무엇보다, 지혜는 우리를 죄와 불행으로부터 보호해주며 우리의 자녀도 죄와 불행으로부터 보호해준다.
특히, 지혜가 더 아름다운 이유는 지혜가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지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그것을 보존한다.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의지하며 죄를 버리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여 영생에 이르게 한다. 잠언 3:13-18은, 지혜가 정금보다 진주보다 귀하며 그 오른편에 장수(長壽)가, 그 왼편에 부귀가 있고 그 길은 즐거움과 평강의 길이며 마침내 생명나무의 열매 곧 영생을 누리게 된다고 말했다.
[13-14절]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섭리자이시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좋고 나쁜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곧게 할 자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5:7에서,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욥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욥기 1:21,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이것이 사람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의 태도이다(잠 3:6).
사람은 내일의 일을 알지 못하고 다음 순간의 일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현실을 좋은 날과 힘든 날,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섞어 두셔서 장래 일을 짐작치 못하게 하셨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약 4:14).
그러므로 본문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형통하고 좋은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그러나 곤고한 날, 즉 어려운 일이 있는 날에는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야고보서 5:13은,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말했다. 특히, 우리는 곤고한 날을 만나면 우리 자신에게 어떤 부족이 없는지, 어떤 죄가 없는지 우리 자신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 자신을 반성할 기회를 삼고 회개하고 성경말씀을 순종하게 된다. 시편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편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겸손과 인내를 가지고 하자. 세상에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으나, 겸손과 인내로 하면 잘 될 것이다. 신앙생활도 이치가 비슷하다. 우리는 겸손과 인내로 주를 섬기자.
우리는 쉽게, 급히 노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며 우매자의 행위임을 명심하자. 우리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남을 불쌍히 여기며 살아가자.
우리는 어려운 현실에 대해 불평하지 말고 범사에 섭리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며 그를 의지하고 그에게 간구하자.
우리는 지혜가 부모의 유산보다 더 귀함을 깨닫고 그것을 사모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버리며 계명에 순종하는 지혜자가 되자.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고 인정하며 특히 곤고한 날, 어려운 일이 있는 날에는 자신을 돌아보며 생각하는 자가 되자.
14-22절, 지혜로운 처신, 지혜
[15-18절]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이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세상에는 아벨처럼 다른 사람의 미움과 핍박을 받아 일찍 죽임을 당하는 의인이 있고, 사람들 앞에 드러나지 않고 은밀하고 교묘하게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서도 내버려두심으로 장수(長壽)하는 악인도 있다. 그러므로, 본문은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사람들 앞에서 너무 드러나게 자신의 의를 나타내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사람 앞에 드러내는 의는 외식적, 율법주의적, 바리새인적 의가 되기 쉽다. 또 그런 사람은 자신을 크게 여기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쉽고 그러면 그는 주위 사람들의 반감을 사고 해를 입기 쉬울 것이다.
본문은 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적당한 악인이 되라는 뜻은 아니다. 성경은 어떤 경우에도 악을 권장하지 않는다. 본문은 드러나게 악한 자는 사회적 제재를 당하고 감금을 당하고 벌을 받고 심한 경우는 사형도 당하기 때문에 드러난 악인이 되지 말라는 뜻이라고 본다.
본문은 또한, “너는 이것을 잡으며 이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너무 드러나게 의를 행하고 의인인 척하지도 말고 너무 드러나게 악을 행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이런 잘못들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19-20절] 지혜가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열 유사보다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본문은 지혜의 가치와 지혜의 유익을 증거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잠언에서 교훈한 그 지혜이다. 그것은 세상적, 육신적 지혜가 아니고, 영적, 천적, 신적 지혜이다.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얻고 또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즉 의와 선과 진실을 행함으로 더욱 많아지는 것이다.
지혜는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열 유사(有司)보다 능력이 있게 한다. 성읍의 유사 즉 관원은 세상에서 지혜와 권세가 있는 자이다. 그는 보통 일반 사람들보다 이해력, 판단력, 언변, 용기가 더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얻은 자는 성읍의 열 유사보다 더 지혜롭고 더 능력이 있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의 저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원수보다, 스승보다, 노인보다 지혜롭게 되었다고 고백했다(97-100절). 또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그 지혜가 바벨론의 박사들보다 열 배나 더 나았다(단 1:20).
본문은 “[왜냐하면](키 י������)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없음이니라]”고 말한다. 본문은 참 지혜가 열 유사보다 나은 이유가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왕들도, 관원들도 다 죄인이며 부족한 인생들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리 세상적으로 유능하고 권세 있는 자라도, 자신의 무지와 편견과 욕심을 이길 수 없고, 세상의 악한 풍조를 이길 수 없고, 마귀의 시험이나 죄의 유혹을 피하거나 이길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고서는 세상의 지혜자들도 범죄하고 불행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지혜가 아니다.
[21-22절]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염려컨대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 네 마음이 아느니라.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좋은 친구의 의견과 충고를 들을 필요가 있다. 나라의 통치자는 백성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다. 남의 의견을 듣지 않는 자는 실수하기 쉽고 독선적이거나 편협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의 모든 말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의 말에는 정확하지 않거나 잘못된 내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들의 말만 들으면 무슨 일에 확신과 용기를 가질 수 없고 낙심하여 아무 일도 못하기 쉽다. 사람들의 말만 듣는 자는 어린이 동화 이야기처럼 결국 당나귀를 지고 가는 자와 같이 될 것이다.
느헤미야서에 보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성의 중건을 위해 유대 땅에 총독으로 왔을 때, 산발랏, 도비야, 게셈 등은 그를 대적하였고 그를 해치려 하였다. 그들은 느헤미야가 유다 사람들로 더불어 모반하려 하여 성을 건축하고 왕이 되려 한다는 거짓말을 퍼뜨렸다. 그것은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고 그와 그의 동료들의 손을 피곤케 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한 것이었다(느 6장).
오늘날도 사탄은 하나님의 종들을 낙심케 하여 하나님의 바른 일들을 못하게 하려 한다. 사도 바울은 전도사역에서 매 맞음, 갇힘, 자지 못함, 먹지 못함 등 많은 고난을 받았고 또 영광도 얻고 욕도 먹고 악한 이름도 얻고 아름다운 이름도 얻었으나(고후 6:5-8) 낙심치 않았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확신하여 그 뜻을 행하는 것이다(엡 5:15-17).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를 얻어 지혜롭게 처신해야 한다. 의를 행해도 은밀히 하고 드러날 경우도 자랑치 말고 높은 마음으로 남을 정죄하지 말고, 또 물론 드러나게 악을 행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지혜를 귀하게 여기자.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자.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사람들의 의견을 참고할 필요는 있으나 그 모든 말에 마음을 쓸 것은 없다. 우리는 성경말씀만 믿고 행하자.
23-29절, 사람의 무지함, 하나님 형상의 회복
[23-24절]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 무릇 된 것이[이미 있는 것도] 멀고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23절의 ‘이 모든 것’이라는 말은 앞에 말한 세상의 모든 일들 곧 하나님의 섭리의 일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솔로몬은 지혜로 세상의 모든 일을 이해하려고 힘썼고 스스로 지혜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참 지혜에 이르지 못했고 참 지혜는 그와 거리가 멀었다.
24절의 ‘무릇 된 것이’라는 원어(마-쉐하야)는 ‘이미 있는 것도’라는 말로서 솔로몬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지혜를 가리킨다고 본다. 솔로몬은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지혜도 너무 멀고 너무 깊어서 다 파악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본문은 사람의 지식의 한계성 곧 사람의 무지함을 증거한다. 사람이 무엇을 꽤 아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며 또 하나의 무지(無知)일 뿐이다. 우주만물에 대한 사람의 지식은 지극히 미미하고 지극히 단편적인 지식일 뿐이다. 우주는 사람이 파악하기에는 너무 광대하고 광활하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이 파악할 수 없이 높고 깊으시다. 여기에 인간의 겸손과 하나님 경외의 이유가 있다.
욥기 36:26에서 엘리후는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선지자 이사야는 “보라, 그[하나님]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고 증거했다(사 40:15, 17).
[25절]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궁구하여 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후반부의 원문은 “어리석은 것 곧 미련한 것과 정신 없는 것의 악을”(KJV) 혹은 “어리석은 것의 악과 미련한 것과 정신 없는 것을”이라는 뜻이다.5) 세상에는 어리석고 악하고 정신 없는 일들이 많다. 솔로몬은 그 모든 일들을 살피고 연구하고자 하였다.
[26절] 내가 깨달은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하나님을 기뻐하는[기쁘시게 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히리로다.
남자가 아내를 잘 만나는 것은 큰 복이다. 잠언은 슬기롭고 현숙한 아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그 값이 진주보다 귀하다고 말했다(잠 19:14; 31:10). 그러나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줄 같은 여인은 사람을 죄악과 사망으로 이끈다. 솔로몬은 그런 여자를 “사망보다 독한 자”라고 부른다. 이것은 그의 실패의 경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가 나이 늙었을 때 왕비들은 그의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했다(왕상 11:4). 또 그는 잠언에서 다투는 여인에 대해 여러 번 말했다. 그는 다투는 아내가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 같다고 말했고(19:13; 27:15) 그런 여자와 큰 집에 살기보다 광야나 지붕 모퉁이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21:9, 19). 그런 여자의 남편은 그 마음에 큰 고통을 당하고 결국 불행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라는 원어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자’라는 말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KJV, NASB, NIV)’라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는 그런 여자를 피할 수 있지만, 죄인은 그런 여자에게 잡혀 결국 큰 낭패를 당할 것이다.
[27-28절] 전도자가 가로되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궁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솔로몬은 하나님의 진리를 참으로 깨닫고 인생에 대해 깨닫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중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천 명의 남자들 중에 겨우 한 명을 찾았고 천 명의 여자들 중에서는 하나도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 여자들은 아마 그가 거느렸던 700명의 왕비와 300명의 첩들을 가리켰을 것이다. 실상, 온 세상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참 지혜자이시다. 그의 모친 마리아까지도 그와 비교할 수 없는 비천한 죄인에 불과하다. 바울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고전 1:21). 참 지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질 수 있다.
[29절]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그들은](원문)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꾀’라는 원어(킷쉐보노스)는 ‘고안들, 계획들’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본래 정직하게 만드셨다. 사람은 본래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도덕적 중성 상태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상태로 지음을 받았다(엡 4:22-24).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이후, 사람들은 많은 꾀를 내었고 많은 악한 것들을 생각하고 계획하였다. 창세기 8:21,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하시는 모든 일들에 대해 우리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오직 겸손히 엎드리며 그를 섬기자.
우리는 마음이 올무 같은 자가 되지 말고 선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좋은 사람이 되어 마귀의 시험을 피하자.
사람은 정직하고 선한 본래의 하나님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며 성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의 죄성을 죽이고 절제하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좇아 행함으로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간증: 어느 악귀에 잡힌자를 치유 기도하는데 그 환자의 입으로 성령께서 찬송가 202장 “죄에서 자유케함은” 찬송가 부르면 치유가 된다고 하여 치유를 받았다. 또한 성경책을 얼굴에 대면시킨바 떨면서 그 입으로 ‘내가 진화론 마귀인데 무저갱으로 들어간다면서 빠져나가는 현상을 보여주셨다. 그 진화론 마귀가 고등학교 대학교 등에서 수업할 때 들어와 정신을 혼미케 하여 그 인생에 대한 많은 부작용을 주었다. 그러므로 학교에서 진화론 교육을 막아야 한다. 그렇치 아니하면 청소년 학생들에게 악한 마귀를 넣는 교육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옥을 보내기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마귀를 보내기위해서 만들었다고 하시고 그렇나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은 마귀에 미혹되어 따라간다고 말씀하셨다. 이 사건을 통해서 주님께서 특별히 전도자 사역를 시작할때 영원한 하나님나라와 무저갱 같은 불속에서 고통하는 지옥이 있음을 알게해주셨어 너무나 감사합니다.(눅16:1-13) 2019.3.7.김목사)
(간증; 부흥강사로 같은 노회 회원으로서 목사님 영성이 대단하여 주변에서 “쪽 집게”목사라는 별명이 있는 부흥강사였다. 주님의 성령께서 꿈에 그 목사에 대한 주님의 경고의 계시를 보여주셨다. 즉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박재규) 중에 사기꾼이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를 비유로 보여주셨다. 즉 그 목사님의 사역이 자기복음을 전하고 있으면 사기꾼과 같은 사역을 한다는 주님께서 경고를 보여주셨다. 처음에는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마귀에 미혹되어 사기꾼 사역하므로 그림 한장을 보여주시면서 회개하고 징계를 받지 말라는 경고 싸인을 보여주셨다. 즉 주님께서 기회를 주신 것이다.그래서 그 목사님에게 권면한 사실이 있습니다. (2019.2.21.김 목사)
(간증: 소직이 요한 계시록 13장 과 다니엘서 9장을 묵상하는중 주께서 종말에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꿈에 그림 한장을 보여주셨다. 즉 옛날에 우리나라가 유엔으로부터 식량 배급품에 “밀 가루 포대와 시멘트포대 면에 ”두 손이 악수하는(프레이맨숀의 암호)” 그림을 보여주셨다. 즉 열 뿔의 정체를 보여주셨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본주의자들(러시아, 중국, 아랍등)의 ”프레이멘숀, 일루미나티아,뉴 올드 워드, 등의 단체들이 인공지능의 로봇드(Al)를 이용하여 우상을 만들어 하늘과입에서 불이 나오게하는등 공포를 주어 666표를 받지 아니하면 식량배급 금지 하는등 전 세계를 장악과 동성애로 통해서 소돔고모라와같은 적그리스도나라 뉴 월드워드 나라로 만들려고 하는 정체성을 나타내고 있다. (계13장14절. 다니엘9장27절)(2019.3.30.김 목사 )
(간증: 몇 년전에 “이신칭의론“을 주장하는학파(개혁주의자)와 새 관점학파들이 “유보적인 칭의론”을 주장(김세윤)하는 학파들과 떠거운 감자가되어 논쟁이 가열된 적이있었다. 그때 그들의 주장이 헤갈리어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주님이 즉시로 그림한장을 보여주셨다. 즉 간경화로 죽어가는 사람이 먹는 “약초인 인진쓱”을 보여주셨다. 인진쑥은 간에독을 뽑은 특효 약초이다. 즉 이신칭의(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셨다.요한19:30)는 우리의 죄의독을 뽑는 효과가 있다고 주님께서 그림한장으로 가르쳐주셨다. 유보적인 칭의론자들은 이신칭의를 종교개혁 시대의 산물이거나 기껏해야 바울을 그 창작자로 봅니다. 그러나 칭의의 기원이 루터,바울, 아브라함을 거슬러올가 영원 전의 성부와 어린양 그리스도의 언약에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신칭의 구조 안에서만 성령이 있고,믿음을 부정하는 유보적 칭의론자들에게는 성령이 유보된다고 지적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그러므로 이신칭의론은 “간 경화”로 죽어가는 사람에서 죽음의 독을 뽑는 특효약임을 비유로 보여 가르쳐 주셨다.아멘(2019.4.26.,김목사)
(간증: 주님의 성령께서 Wcc(세계종교다원화연합회)와 Wea(세계복음연맹)에대한정체를 꿈에 그림한장으로 가르쳐 보여 주셨다. Wcc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자를 찾는 악한 마귀 사냥개 (시속 100키로 달리는 검정색의 그레이하운드 사냥개)로 비유해 보여 주셨다. WEA는 시장에서 금품을 갈취하는 조폭으로 보여주셨다. 또한 부산에서 Wcc 종교다원화 연합 대회시 주께서 그 정체에 대해 그림 한장으로 보여주셨다. 즉 올림픽 경기장에서 세계 각종교 단체들이 입장하는데 그 앞 선두에 시속 100키로를 달리는 ”사냥개 그레이 하운드개“가 앞장서고 그 뒤을 따라서 각종 단체장들과 한국 교회 (wcc 연합된 교회 단체장)단체장을 따라서 입장하는 귀신들의 올림픽 잔치라것을 주께서 그들의 정체를 가르쳐주셨다. 즉 그 단체들에 속한 교단는 그들로부터 물이든다는 것이다. 즉 그들 단체에 속한 교회(한국 7개 교단 가입.한국교단 통합등)는 마지막에는 그들과 같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요한계시록 18장5절에 악한귀신의 처소에서 주님께서 나오라고 하셨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양들을 받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25장에 예수님의 비유말씀같이 열처녀 중 슬기로운 다섯 처녀만이 혼인 찬치에 참여하고 어리석는 다섯처녀는 탈락하는 것 같이 예수를 믿는 사람 중에 50%는 탈락할 것이다는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2019,3.9.김목사)
(간증: 우한 코로나 전염병을 통하여 전세계가 불안하고있다. 인간이 얼마나 약한것을 가르쳐주고있다.그렇나 성경(진리)에서 전염병을 이기고 재양으로부터 탈출하는 비밀을 가르쳐준다. 출애굽기(탈출기) 12장에 창조주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죽음사자들이 애굽의 장자를 멸할 때에 어린양의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받으면 죽음의 재양이 넘어가는(유월) 비결을 가르쳐주셨다(출12:23-28).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요한계시록7장 3절에 예수님께서는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온 지구가 온역과 큰 지진이 날때에 “이마에 인 맞은 자를 해하지 말라고 하셨다”. 성령의 인치심이라는 것은 주님의백성이라는 것과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자, 주님의 백성들은 임마누엘로 보호해주신다는 성경적인 진리를 믿어야한다. 2020.2.19일 새벽에 주님께서 전염병 재양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꿈에 그림 한장을 보여주셨다.즉 권총을 가진 범인이 총을 숏아 사람을 죽이고 있는데 주님께서 소직을 창문을 넘어 탈출시키는것을 보여주셨다. 즉 예수를 믿고 거듭난자들 주님의 백성들에게는 주님께서 그 재양에서 탈출시키는 그림 한장을 보여주셨다. 즉 마태1장23절에 말씀대로 임마누엘로 보호해 주신다는것을 믿고 두려워 말라고 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갈 것을 가르쳐주셨다.2020.2.19. 김에스겔 목사.)
(간증: 코로나19 점염병이 전국적으로 전파되어 사망자가 3명이 나왔고 계속하여 생명이 위험한 중증 환자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얼마나 인간이 나약한 것을 잊져 버릴때가 많다. 목사 안수를 받을 때 “하늘의 보좌를 보여주시고 보좌 뒤에 하나님을 상징하는 무지개를 보여주셨고, 계시록 22장에나오는 생명수강을 보여주시고 또한 에스겔 성경책을 보여주시면 에스겔 파숫꾼을 사명을 주셨다”. 점염병은 사사시대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고 교만하여 창조주하나님을 부인하고 패역할때마다 다웟같이 정신을 차리라고 징계를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누가18장 8절에”인자가 세상에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탄식하셨다. 우리의 믿음은 고난이 올 때 온전한 믿음이 된다(학2:4). 주님께서 소직에게 ‘고난이 유익이다“는 말씀을 주셨다. 이번 점염병으로 인하여 고난이 유익이될 것이다. 또한 이번 점염병의 기간과 범위에 대하여 그림한장으로 보여주셨다. 즉 한국 남한 지도를 보여주시면서 사람을 컵라면을 상징하여 전국에 뜨문 뜨문 퍼지는 것을 보여주셨다. 현재 전국적으로 뜨문 뜨문 일어나므로 주님의 징계 계획이 곧 끝이 날것임을 보여주셨다.성도가 당하는 고난에는 (1) 죄에 대한 징벌로 받는 고난이 있다. 그것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이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2) 특정한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니고 단지 신앙 인격의 훈련을 위한 고난도 있다. 바울이 당한 고난(고전 4:11-13; 고후 6:6-10; 11:23-27)은 이런 고난이었다. 욥의 고난도 그런 고난이었다. 성도는 이런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마 5:10-11; 행 14:22; 빌 1:29; 골 1:24; 딤후 3:12)(2020,2,22,김에스겔 목사)
(간증: 주님께서 2020.2, 26자 코로나19 죽음의 사자(신천지)를 전파하여 세상과 교회를 파괴하는 사단 무리들이 잡히는 것을 그림 한장을 보여주셨다. 즉 사단 무리들이 화물차 타이탄 2,5톤에(소수인들이 건축물을 파괴하고 수리하는 집단) 타고 다니면서 세상과 교회 건물을 파괴하는 자들을 형사들이 승용차를 타고 다니면서 어렵게 사단의 세력을 잡아 머리에 주사기를 뽑아 혈액 채취하는 것을 보여주셨다. 즉 코로나를 전파하는 무리들을 다 잡아 조치(죽음의 비 진리 독 뽑아냄)하는 것을 보여주셨다. 즉 주님은혜로 수일 내에 해결하고 끝이 날것을 보여 주셨다. 아멘(2020.2.25.김 에스겔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