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에 접어들면서 마침내 전쟁의 포성도 멎어가고 있었다. 피난지 부산에서 ‘한겨울에 푸른 초원을 만든 기적’으로 성공한 정주영은 미군의 공사에만 의존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우리 정부의 발주 공사에도 적극 참여했다.
8월이 되자 휴전 협정이 맺어진데 이어 정부가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로 환도했다. 정주영의‘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건설’ 역시 서울로 올라와 새로이 간판을 내걸었다.
현대건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57년 9월에 착공한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수주했을 때부터였다. 착공한지 1년여 만에 준공한 비교적 단기 공사였음에도 총 계약 금액이 당시 최대 규모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대동공업·조흥토건·삼부토건·극동건설·대림산업에 이어 현대건설도 이른바 ‘건설 5인조’ 또는 ‘6인조’ 등으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면서 1000여 업체들 가운데 선두그룹에 서게 됐다.
휴전 협정과 함께 몇 년 동안 저조했던 미국 공사가 주한 미군 증강 정책으로 다시금 활기를 띠었다. 정주영은 미군 공사에 눈을 돌리는 한편, 건설 장비에도 주목했다.
그는 현대자동차공업사 안에 중기 사무소를 차려 관리 책임을 매제 김영주에게 맡겼다. 구입한 장비와 부속품들을 수리·조립·개조시켰고, 아직 보유하지 못한 기계도 만들어 썼다.
그런 결과 당시 건국 이래 최대 공사였던 인천 제1도크 공사를 성공리에 준공하면서 1960년 마침내 현대건설이 국내 건설업체 도급순위 1위 자리에 우뚝 서게 됐다. 1945년 8·15해방 이후 우연히 목격하게 된 건설업의 수주액에 놀라 다짜고짜 뛰어든 지 15년 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건설 장비에서 다른 업체보다 한 발 앞서 나가자 이번에는 시멘트가 곧잘 말썽을 부리곤 했다. 공사를 벌일 때마다 시멘트 공급받지 못해 준공 시기를 놓치곤 했다.
정주영은 생각했다. ‘시멘트 원료는 모두 다 국내에 있지 않은가. 강원도나 충청도가 거의 석회석 산이어서 좋은 석회석을 얼마든지 캘 수 있다. 거기다 철분이 든 원료 약간만 섞어 만들면 되는 건데 어려운 일 하나도 없다.
무슨 일이든 해야겠다고 결심하면 단순하고 간단하게 생각해버린 그는, 건설업계의 만성적 골칫거리인 시멘트 문제를 해결해서 시멘트로 인해 빚어지는 공사 차질을 없애기 위해 1957년 시멘트 공장 설립했다.
최택만 저 한국의 대표급 경영총수의 비화(P10-P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