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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여러분들 성서 강의가 매일 있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에 이제 두 번 있으니,
새로 강의를 들으시려면 바로 전 강의를 한번 들으시고 새로 올라온 강의를 들으시면 훨씬 문맥이 잘 통할 거라 생각됩니다.
오늘 아브라함의 믿음 이야기 두 번째죠.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사흘 만에 가까스로 하느님이 지시하신 산으로 갑니다.
저는 이 ‘사흘’이라고 하는 단어에 참 많이 고민했습니다.
고민이라기보다 왜 사흘일까, 사흘 동안 걸었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먼 거리인데
왜 사흘씩이나 걸리는 먼 산을 선택하셨을까 하는 겁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번제를 올려도 될 터인데, 아니면 눈앞에 보이는 앞산에서 번제를 올려라 해도 될 터인데,
사흘이나 걸리는 그 산에 가서 번제물을 바치라고 한 이유가 뭘까?
첫 번째 떠오르는 것은 사랑하는 자식과 사흘 동안 충분히 석별의 정을 나누도록 배려하신 것은 아닐까?
이렇게 처음에 생각했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야훼 하느님도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이게끔 미리 계획하고 계신 것은 아니었죠.
분명히 아브라함은 하느님 입장에서 볼 때 원하는 방식대로 순명할 것이기에,
사흘 동안 자식과 이별하는 아픔을 석별의 정으로 승화시키라는 뜻으로 사흘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흘이라고 하는 시간은 꽤 긴 일수입니다.
옛말에 그런 말이 있죠. ‘작심삼일’
본인이 스스로 자진해서 힘차게 시작한 일도 3일 지나면 그 마음이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고
3일 전에 했던 결심이 흐려진다는 뜻일 겁니다.
우리도 이 말에 충분히 공감합니다.
고백소에서 다시는 죄짓지 않겠다고 했던 그 죄에 3일이 아니라 몇 시간 후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통감하며 삽니다.
하물며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서 자기 자식을 번제물,
다른 말로 통구이를 해서 바친다는 그 결심은 3일이 되면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분명히 컸던 겁니다.
처음부터 기쁜 마음으로 절대로 순종할 수 없는 명령이었던 것이니,
하느님께 절대 순종하는 신앙이 가령 있었다고 해도 사흘 안에는 어지간히 동요할 겁니다.
그 3일간, 아브라함의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하느님은 지켜봤던 겁니다.
‘내가 지금 너에게 네 아들 바치라 할 때 너는 아무 소리 안 하고 순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디 며칠 지내봐라.
그때도 똑같은 마음이 될까, 너를 지켜보겠다.’
그래서 사흘이나 되는 그 먼 거리에 있는 산에 가서 번제물을 바치라고 한 것이 아니었을까?
사흘 동안 자식과 석별의 정을 나누라고 하는 뜻으로 시간을 준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테스트하는 거죠.
‘사흘 안에 분명히 네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 어디 어떤가 보자.’
여러분들, 이 첫 번째 테스트 아브라함 분명히 통과했습니다.
사흘 안에 마음이 바뀌어서 ‘내가 미쳤어. 내가 내 새끼를 왜 죽여? 처음에 하겠다고 했을 때는 내 마음이 아니었어.
아들아, 돌아가자. 내 저 위에 있는 양반 이제 안 보면 된다.’
이렇게 오던 길을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은 끝까지 하느님이 일러준 산으로 갔습니다.
왜 사흘이나 걸리는 산에 가서 번제물을 드리라고 했는지 이해되시죠?
이제 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맞닥뜨리기 싫은 시간이 온 겁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 앞에 구워서 올릴 때가 온 것이다 이겁니다.
그 장면이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죠.
창세기 22장 6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씨와 칼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둘이서 길을 떠나려고 하는데,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불렀다.
"아버지!" "얘야! 내가 듣고 있다."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얘야!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나,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놓은 다음,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막 찌르려고 할 때, 야훼의 천사가 하늘에서 큰 소리로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어서 말씀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게 하지 말아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
아브라함이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보니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숫양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아브라함은 곧 가서 그 숫양을 잡아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렸다.
아브라함은 그곳을 야훼 이레라고 이름 붙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 하고 말한다.
신앙의 사람이었던 아브라함의 일생에서 이때만큼 괴로운 시련의 때는 없었을 겁니다.
제 자식을 제 손으로 태우라고 하는 그 이상의 가혹한 명령 요구는 사실 이 세상에 없습니다.
네가 죽으라는 명령보다 더 괴로운 명령이 네 자식을 죽이라는 얘기였을 겁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은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하느님에게 순종하는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교우들에게 수도 없이 많이 얘기했죠.
누군가가 믿음이 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아주 간단하죠.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는 것이다.’ 그의 믿음의 가장 핵심입니다.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지 않으면 절대 순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에게 복종하자면 내 마음을 버려야만 합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기도하신 것 같이 ‘저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예수님의 이 기도에서 나온 온전한 봉헌, 이 말씀이야말로 하느님에게 대한 완전한 신뢰이고 복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이제 막 내 자식 가슴에 칼을 대어 찌르려는 순간 손을 대지 말라는 야훼의 사자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대신 그곳에서 한 마리의 산양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이 산양이야말로 신약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멘
하느님은 항상 우리가 날마다 범하고 있는 죄의 보상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독자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하느님 자신이 독생자 예수님을 전 인류에게 주신 겁니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받게 하려 하십니다.’라는
성경 말씀 기억이 나실 겁니다.
여러분들 아브라함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바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 자식이 ‘어머니, 아버지 나 사제 되고 싶어요.’
얘기했을 때 기쁘게 그 말을 받아들이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
당황스러울 겁니다.
‘아들아, 잘 생각해 봐. 사제 생활이 얼마나 힘드니? 신부님들 사는 거 보면 만만치 않아. 공부 기간도 길고.
너 차라리 공부 잘하니깐 의사가 돼라. 믿음이 있는 의사가 되면 더 좋은 거 아니니,
자식도 없는 신부님 보니까 처량해 보이기도 하더라.’
아무튼 이런저런 설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전에 어느 본당에서 열심한 회장님 아들이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신학교 간다고 하니 그 회장님 부부가 절대적으로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어느 날 회장님이 술을 잔뜩 먹고 저를 찾아와서 울면서
‘신부님, 우리 아들이 독자입니다. 대가 끊어집니다. 신부님이 좀 설득해 주십시오.’
회장님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굉장히 괴로워하셨죠.
‘신부님, 이론적으로 제가 본당 총회장인데 당연히 아들이 사제 되겠다고 하면 기뻐해야 하는데 그러질 않습니다.
우리 대가 끊어집니다. 그리고 저 회장 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절대로 아들 못 보냅니다.’
결국에 그 회장 아들은 신학교를 못 갔습니다.
그리고 회장님은 내가 극구 말렸지만, 양심의 가책을 스스로 받으셨는지 회장직 사퇴했죠.
그래서 신부님 중에도 가족들과 친지들 축복을 받고 사제가 된 분들도 많이 있지만, 반대 중에 된 분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렇게 자식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식을 어떻게 봉헌하라는 명령을 들었던 겁니까?
‘죽여서’ 봉헌하라는 명령을 들었던 겁니다.
우리들 대부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갈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분이 우리들의 믿음의 멘토가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느님께 바친다고 하는 것은 사람만이 아닐 겁니다.
하느님께 자기 자신의 시간을 바치거나, 돈을 바치는 일에도 우리는 주저하고 살 때가 참 많습니다.
여러분들 성가 214번이 뭔지 아시죠? ‘주께 드리네’입니다.
같이 불러볼까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사랑하고 의지하여 주만 따라 가겠네.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사랑하는 내 주 앞에 모두 드리네.
또 뭐 부릅니까? 211번 ‘주여 나의 몸과 맘’
주여 나의 몸과 맘 모두 드리오니 주여 나의 몸과 맘 모두 받으소서
세상 풍파 중에 헤매던 양들 주님의 품안에 받아 주옵소서
214번 2절에 보면 ‘내게 있는 모든 것을 겸손하게 바치네.’,
1절은 ‘아낌없이 바치네’.
3절은 ‘주를 위에 바치네.’
그리고 후렴은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사랑하는 내 주 앞에 모두 드리네.’
우리 이 노래 부르면서 헌금하러 나갑니다.
헌금하러 나가실 때, 어느 색깔의 돈을 낼까 망설이신 적은 없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쓰셨지만, 하느님을 위해서 입으로만 ‘주께 드리네’ 했을 뿐, ‘겸손하게’ 드린다고 했을 뿐,
그렇게 드리지 못한 적 많죠.
입으로만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가 후렴 부분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모두 드리네’가 아니라 ‘내가 드리고 싶은 것만 드리네.’ ‘내가 아까운 것은 못 드리네.’
제가 늘 강조했죠. 봉헌이 무엇입니까?
‘내 것의 일부를 떼어서 하느님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을 하느님에게 되돌려 드리는 것이 봉헌의 정의다.’
그 생각이 박혀 있다면, 자식이 신학교 간다고 하고 딸이 수녀원 간다고 했을 때,
애초부터 내 자식이 아니거든요. 하느님 자식이죠.
그런데 자기 자식이라고 생각하니 신학교, 수녀원 못 가게 막는 겁니다.
돈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니 하느님이 필요하다 할 때 못 내놓는 거죠.
시간도 마찬가지고요.
시간이건 돈이건 자식이건 아무튼 모든 것은 다 하느님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머리끝에서 발가락까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시간이요? 자식이요? 뭐요?
자식이 여러분 것이라면 여러분 맘대로 만들어져야 하는데 자식이 속 썩이지 않으십니까?
내 속으로 난 자식이지만 그 자식이 다 잘하고 삽니까?
‘하느님 것을 하느님에게 되돌려 드린다.’
아브라함은 아마 이 생각이 철저했던 겁니다.
늙은 나이에 자식을 주셨는데 아마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자기 자식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을 겁니다.
하느님의 선물. 그래서 그 자식을 돌려 달라고 했을 때, 내가 거기에 대해서 분노할 이유도 없고,
화를 낼 이유도 없고, 하느님에게 따질 이유도 없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은 담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간도 하느님 것이니 하느님께 드려야죠.
물질도 마찬가지죠.
또 내가 받은 재능이 있다면 그 재능도 어떻게 내 것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없는 재능도 선물이지요.
그 선물은 자기만족을 위해서 주신 탈렌트가 아닙니다.
선용해야 합니다.
입으로는 ‘모두 드리네, 아낌없이 드리네’ 하면서 그렇게 드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 성가는
절대 가슴에 와닿지 않는 노래이고 별로 부르고 싶은 성가가 아닐 겁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저는 은퇴 후 거의 2년 정도 식복사 없이 제가 혼자 밥하고 살림합니다.
며칠 전에 부엌에서 당근을 자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근은 어디를 자르거나 당근이구나,
그렇다면 우리 생활은 어디를 잘라도 크리스천일까? 내 생활 어느 단면에서나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께 순종하고 있을까?’
당근은 분명히 어디를 잘라도 당근이고, 무도 어디를 잘라도 무입니다.
고구마도 어디를 잘라도 고구마죠.
고구마의 가운데를 짜니까 감자가 나올 수 없는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신앙도 삶도 이렇게 다 똑같을까, 아닐 겁니다.
쇠고기 통조림 속에 말고기가 들어가 있을 수 있고요.
게장인 줄 알고 먹었더니 가짜 상품일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내 생활을 들여다보면서 ‘이래도 내가 과연 크리스천일까?’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나는 껍데기만 크리스천 아닌가, 가짜 크리스천이 아닌가, 이렇게 살아도 크리스천일까?
본인이 크리스천이 아니라고 생각이 드는 것은 결국에는 뭡니까?
내가 지금 하느님에게 순종하지 않고 살고 있다는 그 증거일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을 아브라함과 같이 진실하게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본인이 자신을 생각해도 가짜 크리스천 같은 생각이 들게 되는 거라는 뜻이지요.
여러분들 명심하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의 단순한 위안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서를 하느님 말씀을 단순히 일시적인 위안을 위해서 읽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우리는 반성해 봐야 합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성구 하나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는
정말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식으로 남아 있을 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을 100번을 읽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경 말씀 그대로 순종을 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었을 땐 거기에 따라오는 우리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결심했던 그 결심의 100분의 1이라도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들은 하느님에게로 나가는 데 방해가 되는 에고이즘을 분명히 버릴 수가 있을 겁니다.
아브라함의 신앙 이야기 1번에서 제가 어느 신자집에 방문했더니 십자가 고상 밑에 성경 구절이 쓰여 있었다고 그랬죠.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
이것 수십 개를 방에다 붙여놓은 들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그냥 인테리어이고 장식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서 나온 순종이 밑바탕이 되어 있을 때에만,
십자가 밑에 걸려 있는 그 아름다운 성경 구절은 빛을 발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집에 있는 좋은 성물들도 빛이 나게 돼 있는 겁니다.
우리들이 진실하게 하느님에게 순종하려고 할 때만,
야훼 산에 준비된 그리스도가 확실하게 살아계신 하느님으로서 우리에게 우리 가정에 분명히 다가오신다는 것을
믿도록 노력하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도록 노력합시다.
여러분들 다음 시간에는 좀 쭉 건너뛰어서 37장 요셉 이야기를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미리 꼭 읽어보시고요.
그리고 건너뛴 것도 여러분들이 한번 쭉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하늘의 별보다도 더 많이 여러분들 사랑하고 있고요.
미사 때마다 늘 합당한 축복 내려갈 수 있도록 미사 중에 늘 기억하고 삽니다.
여러분들도 은퇴한 사제가 정신 흩어지지 않고 주님이 언젠가라도 불러가실 때까지
온전하고 또렷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은퇴 사제를 위해서도 기억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늘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첫댓글 늘 사랑으로 살게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