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외 1편)
박소란
부제는 '병실에서',
그러나 붙이지 않는 편이 좋겠지 부제란 언제나
부질없는 것
고치고 또 고쳐도
침대 옆 소변기에서 냄새가 가시지 않는다
곧 썩어 문드러질 것처럼
칠월,
슬쩍 가져다 놓은 나의 새 시집을 아버지는 펼쳐보지 않았지
제목이 된 전처의 이름을 내내 모르는 척
'수옥'은 이미 오래전 죽었다는 사실 또한
지난달엔 앓는 아버지를 그늘진 방에 눕혀두고
수도 없이 연과 행을 나눴었는데
가파른 계단을 달려 어딘가로 도망치듯
'자꾸'를 '계속' 으로 바꿨다 다시 자꾸를 자꾸로 자꾸, 자꾸
바꾸고 싶었는데
'상조'나 '장례'를 검색하며
급히 써 내린 페이지에선 괴이한 연기가 새어 나온다
미처 사르지 못한 문장들이 이제 와 새삼 홧홧하고
잠시 홧홧하다 말고
가슴에 펜타닐을 몇 장씩 붙이고
나면 병실에서 넘어져 찢어진 뒤통수를 서너 바늘씩 꿰매고도
아플 일이 없어
거 참 좋은 약이네, 그런 생각만 든다
아버지도 나도
삐걱거리는 침대에 나란히 앉아
반쯤 막힌 목구멍으로 눅눅한 산도를 녹여 넘기면서
간신히 짚어보는 창밖 나무 이름 풀 이름
먼지 쌓인 이파리가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온몸을 들썩일 때
안과 밖은 더 멀어지고
귀를 기울일수록
차 소리 말소리 하교하는 아이들의 욕설마저
아스라하기만 한데
애꿎은 과자 봉지만 구기고 또 구긴다
아직 버리지 못한 것들,
나의 시는
지금쯤 비 내리는 광화문 교보 뒷길을 우산도 없이 헤매고 있겠지
아, 지린내,
금방 끓여 온 보리차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아버지
나는 시집이 있는 쪽을 돌아보고
용각산 두 스푼, 캘리포니아산 건포도 한 알, 오만 원짜리 네장
저승 노자라는 것, 미신이든 아니든, 어쨌든 내일은 면회 오지 말 것, 하루쯤 쉴 것,
나는 급히 메모장을 열어 적는다
고맙다. 저승에 가서도 잊지 않으마,
마지막은 역시 사랑?
사랑, 요양, 병원, 213 호,
이런 걸 쓰고 싶지는 않았는데
잠들기 전 아버지는 생각하겠지 버려야 할 게 너무 많다고
끝내 버릴 수 없는 것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시, 시를 봐도 나는 그게 시인 줄 모른다
―월간 《현대문학》 2024년 9월호
숨
겨울의 한 모퉁이에 서 있는 것이다
언 발을 구르며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버스가 아닌 다른 무엇이라 해도
기다리는 것이다
이따금 위험한 장면을 상상합니까 위험한 물건을 검색합니까
이를테면,
재빨리 고개를 젓는 것이다
남몰래 주먹을 쥐고 가슴을 땅땅 때리며
어쨌든 기다리는 것이다 시도 쓰고 일도 하며
어쨌든
주기적으로 병원도 다니고 말이죠
과장된 웃음을 짓기도 하는 것이다
오지 않는 것들에 목이 멜 때마다
신년 운세와 卍 같은 글자가 비스듬한 간판을 흘끔거리는 것이다
알바가 주춤거리며 건넨 헬스 요가 전단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버릴 수 없다는 것,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디라 해도
한숨을 쉬면 마스크 위로 터지듯 새어 나오는 입김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다
지나치게 희고 따뜻한 것 어느 고요한 밤 찾아든 귓속말처럼
몹시 부풀었다가 이내 수그러지는 것
텅 빈,
다시 부푸는 것
다시 속살거리는 것
어째서 이런 게 생겨났을까 알 수 없는
하나의 이야기가 곁을 맴도는 것이다
말갛게 붙들린 채로 다만 서 있는 것이다
얼어붙은 길
무슨 중요한 볼일이 남아 있기라도 한 듯
기다리는 것이다
아 신기해라, 조용히 발음해보는 것이다
―시집 『수옥』 2024.6
----------------------
박소란 / 1981년 서울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문학수첩》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 『한 사람의 닫힌 문』, 『있다』, 『수옥』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