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말에서 / 김신용
갈대밭이었습니다
갈대 셋이 몸 엮어 서 있었습니다
둘은 넘어지기 쉬우니 셋이 기둥 버티고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누가 그것을 눈물의 집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눈물로 벽돌 쌓은 집이 아니라고 고개 갸우뚱 하겠습니까
마치 솥 정(鼎)자처럼 갈대 엮인 그곳에 조그만 새의 집이 지어져 있었습니다
뻘흙을 물고 날라 갈대잎 촘촘히 침 섞어 놓은
작은 새의 집이 지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간장 종지만한 작은 흙집에, 쬐그만, 아기 손톱 만치 쬐그만
새의 알이 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새의 알을 갈대 셋이서 품고 서로 몸 엮어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전신으로 서로가 서로를 버팅기면서
바람 속에서, 서로가 몸 부대껴 버텨내면서
안간힘으로 품고 있는 정말 간장 종지만한 새집 속의 새알 한 알
그것을 어찌 빛나는 눈물방울이라고 하면 안 되겠습니까
솥 정(鼎)자 속에 담겨진 빛나는 눈이라고 하면 안 되겠습니까
작은 새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갈대도 셋이 엮이면 기둥이 된다는 것을
바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집이 된다는 것을
갈대밭이었습니다
모두가 바람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벌판이었습니다
바람의 입 / 김신용
아프리카에서는
메뚜기 떼를 바람의 입이라고 부른다
바람을 타고 공중을 가득 뒤덮으며 날아와, 지평선을 지우고
하늘을 지우고
들판의 곡식들을 갉아 먹어버리는 메뚜기,
메뚜기 떼들.
앉은 자리를 폐허로 만들어버리는
그 바람의 입들.
누가 바람처럼 살고 싶다고 하나?
바람에게도 입이 있다. 저렇게 바람의 입을 발견한 아프리카人들에게
나는 무릎을 치며 경탄한다
숲을 지나온 바람
푸른 풀밭을 걸어 온 바람을 <바람>이라고 발음만 해도
입술이 초록으로 물드는, 내 고정관념의 목덜미에 차가운 물방울처럼
떨어지는 그들의 언어 감각.
그러면
에메랄드와 철광석 같은 광물들을 먹어치우기 위해, 새카맣게 몰려든
西歐人들을 그들은 뭐라고 불렀을까?
엔진을 가진 바람의 입?
혹은 총?
낡은 집
풍화하고 있는 늙은 고목만이, 바람의 입이 스쳐간 자국이 아니다
세계화의 바람을 타고 날아와, 이윤만 빼먹고 튀어 버려
먹튀族이라고 불리는, 그 바람의 입도 있다
그 입이 스쳐간 자리는, 정리해고의 빈 쭉정이들만 남는다
그리고 저 간판들
건물의 벽면에 메뚜기의 形象으로 앉아 있는 무수한 돌출 간판들
저것은 바람의 입이 아닌가?
기호화된, 보이지 않는 그 낱낱의 입들
의식이 들판의 곡식인 그 메뚜기 떼들
앉은 자리를 아예 無化시켜 버려야 식성이 풀리는
그 바람의 입들.
조개 무덤 / 김신용
껍질들이 모여 커다란 더미를 이루고 있는 조개 무덤 앞에 선다
저 껍질 하나하나를 열기 위해 웅크린 등은 더욱 둥그렇게 모서리가 닳아갔겠지만
앞에 놓인 조그만 그릇에 담기는 조개의 살들은 하루 삶의 핵(核)!
그것을 부화하기 위해 엄지손톱만치 쬐그만 바지락 껍질을 까며 늙어온
시간들은 이미 갯골처럼 깊게 주름 패여 퇴적층으로 쌓이고 있지만
엽피(葉皮)같은 껍질들이 모여 크고 둥그런 무덤으로 부풀어 오를수록
하루라는 껍질 속에서 숨 쉬고 있는 일상의 탄생이, 경이로워―
그 껍질 하나가 글자라면 붓 씻은 바다는 묵지(墨池)가 되었을 것 같다
모서리가 닳아 둥그렇게 웅크린 등은, 한 생의 일필(一筆)에 찍힌 낙관 같다
그렇게 무봉으로 쌓여 커다란 더미를 이루고 있는, 조개 무덤 앞에 서면
오늘, 하루의 껍질을 벗기고 석양을 남기는 것 같은 무수한 반복 속에서도
갯골처럼 깊게 주름 진, 이 하루의 껍질을 벗기는 손은 날렵하다
등 뒤에 쌓이는 해거름도, 편편(片片)의 무덤으로 부풀어 오른다
그 무료한 일상의 밀집 속에는, 또 태어날 하루가 숨 쉬고 있다
섬말 시편 - 바자울에 기대다 / 김신용
가시 돋은 연꽃이 있다기에 연꽃 마을*에 가서
가시연을 보고 온 날, 제 몸의 털 다 세워도 올올한
남루 하나 세워두지 못한 생, 갈대숲에 기대 놓는다
화음은 사금파리로 부서지는 봄 햇살인지 눈이 부셔
천 길 벼랑이듯 아찔해 눈 감으면, 가시 세워 피운 연꽃
그 자태가 더 눈에 따가워, 바람 속에 수천수만의 몸뚱이를
서로 부대끼며 견디는 갈대숲을 본다. 그 갈대 하나씩 떼어 놓으면
바람 잠시 앉았다 갈 의자 하나 되지 못하지만, 수천수만의 몸
서로 얽혀 있으니 저렇게 바람을 견디는 울이 되는구나
울타리가 되는구나. 지난날의 산1번지 같은
그 密生이 눈물겨워 가만히 귀 기울이면, 무엇인가
수런거리는 소리 날갯짓 소리 알을 품고 부화의 순간을 기다리는
줄탁의 소리, 아, 화엄이 여기도 있었구나!
귀 떨어진 소반에 금간 그릇 두어 개뿐인 생이라도
저 울타리 안에서는 살아 있는 것이 되는구나. 빛나는 것이 되는구나
야윈 몸끼리 서로 얽혀 만든 그 울이 갈대들의 연꽃이었구나
가시 돋힌 연꽃도 보리의 꽃을 피운다기에, 연꽃 마을에 가서
가시연을 보고 온 날, 제 생 다 허물어뜨려도 올올한
남루 하나 세우지 못한 마음, 그 울에 기대어 놓는다
햇살 눈부시게 고여 있는, 그 바자울에 기대 놓는다
* 경기도 시흥시 하중동에 있는 연꽃단지
도장골 시편 - 넝쿨의 힘 / 김신용
집 앞, 언덕배기에 서 있는 감나무에 호박 한 덩이가 열렸다
언덕 밑 밭 둔덕에 심어 놓았던 호박의 넝쿨이, 여름 내내 기어올라 가지에 매달아 놓은 것
잎이 무성할 때는 눈에 잘 띄지도 않더니
잎 지고 나니, 등걸에 끈질기게 뻗어 오른 넝쿨의 궤적이 힘줄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무거운 짐 지고 飛階를 오르느라 힘겨웠겠다. 저 넝쿨
늦가을 서리가 내렸는데도 공중에 커다랗게 떠 있는 것을 보면
한 여름 내내 모래자갈 져 날라 골조공사를 한 것 같다. 호박의 넝쿨
땅바닥을 기면 편안히 열매 맺을 수도 있을 텐데
밭 둔덕의 부드러운 풀 위에 얹어 놓을 수도 있을 텐데
하필이면 가파른 언덕 위의 가지에 아슬아슬 매달아 놓았을까? 저 호박의 넝쿨
그것을 보며 얼마나 공중정원을 짓고 싶었으면―, 하고 비웃을 수도 있는 일
허공에 덩그러니 매달린 그 사상누각을 보며, 혀를 찰 수도 있는 일
그러나 넝쿨은 그곳에 길이 있었기에 걸어갔을 것이다
낭떠러지든 허구렁이든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 갔을 것이다
모랫바람 불어, 모래 무덤이 생겼다 스러지고 스러졌다 생기는 사막을 걸어 간 발자국들이
비단길을 만들었듯이
그 길이, 누란을 건설했듯이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 가, 저렇게 허공중에 열매를 매달아 놓았을 것이다. 저 넝쿨
가을이 와, 자신은 마른 새끼줄처럼 쇠잔해져 가면서도
그 끈질긴 집념의 집요한 포복으로, 불가능이라는 것의 등짝에
마치 달인 듯, 둥그렇게 호박 한 덩이를 떠올려 놓았을 것이다
오늘, 조심스레 사다리 놓고 올라 가, 저 호박을 따리
오래도록 옹기그릇에 받쳐 방에 장식해두리, 저 기어가는 것들의 힘.
굴비 / 김신용
화석이 되어도 살아 있는 물고기를 보네
소금 무덤에 묻혀서도 지느러미 활짝 편 물고기를 보네
염장 속에서도 아직 푸른 바다의 물비늘을 반짝이는 것 같아
살들은 팽팽히 물방울을 튕기며 튀어오르는 듯하여
어골문으로 세한도를 그리는가
삭풍에도 굴신하지 않는 야윈 뼈들을 세워놓는가
그런 모습 누런 물감 칠한 부세처럼 바라보는 눈길 있겠으나
그 몸에 금가루마저 입히는 浮世의 손길도 있겠으나
개의치 않네. 다만 그 뼈의 세한도를 가난에게
먼저 부치지 못할 마음의 가난을 더 부끄러워할 뿐, 굴신할 뿐
이렇게 살의 물기를 말릴수록 뼈 더 단단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흘림체로 쓴 겨울의 가지들을 석쇠 삼아
제 몸 올려놓는 것도 보네
시린 바람 몇 자락까지 더 얹어놓네
그 바람의 공복에 살의 남은 물기까지 다 채워주지만
배어 있는 비릿한 바다 내음은 메말라가면서도 지워지지 않아
그런 굴비 한 마리 숯불에 구워놓고 식탁에 앉은 마음의
허기들이 부세처럼 더 눈물겨울 때, 그리하여 살 한 점
남김없이 목구멍으로 넘기는 가난이, 더 뼈아프게 식도를 찢을 때
고드름이겠네
어깨 처진 처마 끝에 가만히 흘러내려
차가운 눈빛으로 이 겨울을 지켜보는
고드름이겠네
영실(營實) / 김신용
산비탈 가시덤불 속에 찔레 열매가 빨갛게 익어 있다
잡풀 우거진 가시덤불 속에 맺혀 있어서일까?
빛깔은 더 붉고 핏방울 돋듯 선명해 보인다
겨울 아침, 허공의 가지 끝에 매달린 까치밥처럼 눈에 선연해
눈이라도 내리면, 그 빛깔은 더욱 고혹적일 것이다
날카로운 가시들이 담장의 철조망처럼 얽혀 있는 찔레 덤불 속
손가락 하나 파고들 틈이 없을 것 같은 가시들 속에서
추위에 젖은 손들이 얹히는 대합실의 무쇠난로처럼 익고 있는 것은
아마, 날개를 가진 새들을 위한 단장일 터
마치(磨齒)의 입이 아닌, 부드러운 혀의 부리를 가진 새들을 기다리는 화장일 터
공중을 나는, 그 새들의 눈에 가장 잘 띄일 수 있도록
그 날개를 가진 새들만 다가올 수 있도록
열매의 채색(彩色)을 운영해왔을 열매
영실(營實)이라는 이름의 열매
새의 날개가 유목의 천막인 열매
새의 깃털 속이 꿈의 들것인 열매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했을까, 그 유목의 천막에 드는 일
새의 복부(腹部)속에 드는 일
남의 눈에는 영어(囹圄) 같겠지만, 전락 같겠지만
누구의 배고픔 속에 깃들었다가 새롭게 싹을 얻는 일, 뿌리를 얻는 일
그렇게 새의 먹이가 되어, 뱃속에서 살은 다 내어주고 오직 단단히 씨 하나만 남겨
다시 한 생을 얻는 일, 그 천로역정을 위해
산비탈의 가시덤불 속에서 찔레 열매가 빨갛게 타고 있다
대합실의 무쇠난로처럼 뜨겁게, 뜨겁게 익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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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용 시인
1945년 부산 출생
시집
『버려진 사람들』
『개 같은 날들의 기록』
『몽유 속을 걷다』
『환상통』
『도장골시편』
『바자울에 기대다』
『잉어』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