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여객선 세월호의 선사인 청해진해운은 1990년대
부도가 난 세모해운의 후신(後身)으로 밝혀졌다. 세모해운은 스쿠알렌과 같은 건강식품 판매업체로 유명세를 탔던 ㈜세모로부터 분리돼
설립된 회사였다. 청해진해운의 실질적 대주주인 유혁기(19.4%)씨와 유대균(19.4%)씨는 세모의 창업주인 유병언 회장의
아들이다.
이번에 사고가 난 청해진해운의 뿌리격인 세모는 5공과 6공 정권하에서 초고속으로 성장했던 회사다. 당시
‘세모왕국’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소(小)재벌로 성장했던 세모는 한국 최초의 종교집단 자살사건으로 알려진 ‘오대양 사건’으로
1991년 유 회장(당시 직급은 사장)이 구속되면서 최대 위기를 맞았다.
오대양 사건은 170억원의 사채를 빌려쓰고
행방을 감췄던 ㈜오대양 대표와 그 직원, 가족 등 32명이 1987년 8월 경기도 용인에서 집단 변사체로 발견된 것을 말한다.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두고 논란이 많았던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 수사기관은 오대양이 빌렸던 170억원이 오대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종교집단인 기독교복음침례회(세칭 구원파)로 흘러 들어갔던 것으로 봤고, 그 중심인물로 세모의 사장이자 기독교복음침례회의 목사였던
유병언씨를 지목해 수사하기도 했다. 유 회장은 1991년 8월 사기죄로 4년간 복역하기도 했다.
이후 세모는
1997년 외환은행과 경기은행에 만기가 도래한 어음 16억7000만원을 결제하지 못하면서 최종 부도처리됐다. 당시 세모는 서남해안
운송 여객 및 화물수송의 85%를 담당하는 주력기업 세모해운의 적자가 심화된데다, 제2금융권의 대출금 회수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부도를 맞았다. 과천지역에 건립 중이었던 종합병원인 우정병원에 과다한 투자를 한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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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할 당시 세모는 자기자본비율이 12.3%에 불과했다. 매출액 대비 금융비용은 10.38%에 달하는 등 재무구조가 매우 취약했다.
세모는 세모해운 이외에 세모유람선과 세모케미칼, 세모화학 등 9개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세모는 1979년 9000만원의
자본금으로 태양주택개발로 출발해 4년 후인 1982년 세모로 상호를 변경, 사채를 기반으로 식품(스쿠알렌)과
전자ㆍ유람선ㆍ화장품ㆍ세제 등 15개 사업을 전개했었다.
해양수산부 관계자는 “유혁기와 유대균씨는 세모해운을
운영하다가 부도를 맞은 유병언 회장의 아들로 알려졌다”며 “청해진해운은 사실상 세모해운의 후신”이라고 말했다. 세모해운은
1995년 설립됐다. 서해안과 남해안 20여개 항로에 총 27척의 여객선 등을 운항하기도 했으나 경쟁사들이 많이 등장하면서
재무구조가 나빠졌다.
한편, 청해진해운은 1999년 세모해운이 소유하고 있던 인천~제주 간 세모고속페리1호와
인천~백령 간 초쾌속선 데모크라시5호를 사들였다. 청해진해운은 2010년 한강 수상택시 운영사였던 ‘㈜즐거운 서울’을 인수하고
수상택시 사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이후 수상택시 사업은 이용객이 예상치에 미치지 못한 탓에 운영 2년 만에 20억원 가까운 손실을
보며 현재까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