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의 궤
2사무 6,12-19; 마르 3,31-35 / 연중 제3주간 화요일; 2024.1.23.
성모 마리아께 붙이는 많은 호칭 중에 ‘계약의 궤’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본시는 오늘 독서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대로, 십계명을 새긴 돌판을 넣은 궤짝을 뜻합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이래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궤’를 하느님 현존의 가시적 표시로 알고 모셔왔습니다. 임금이 된 다윗도 나라가 안정되자 하느님의 궤를 하느님의 성막 안으로 모시고 제사를 바치고 백성에게 축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이는 이 ‘계약의 궤’에 담겨져 있는 하느님의 법을 이스라엘 백성이 잘 준수함으로써 하느님 현존을 흠숭하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법에 따라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들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시던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시기심으로 ‘마귀 들렸다.’는 악소문을 퍼뜨리자 이 소문이 그분의 친척 형제들의 귀에게까지 들어갔던 모양입니다. 놀란 친척들은 성모님까지 모시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그분이 계신 곳까지 찾아왔습니다.
군중을 가르치고 계시다가 전갈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친척들이 성모님까지 모시고 찾아온 이유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서운한 마음이 드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모셔 들이지도 않고 계속해서 군중을 가르치시면서 오히려 군중에게 되물으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떠도는 고약한 소문에 귀가 얇아져서 경거망동하는 친척들은 하느님의 뜻을 가르치고 실행하고 계셨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그들이 들으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혈연관계가 하느님의 뜻을 담보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가족이기주의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경우도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을 넘어서서 하느님의 가족을 모으고 계셨습니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또 실행하고 계셨던 성모 마리아께서는 비록 아드님으로부터 예의를 갖춘 대접을 받지는 못하셨으나, 들려온 괴소문과는 달리 멀쩡하게 군중을 가르치고 계셨던 예수님을 보시고 가슴을 쓸어 내리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들으란 듯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거침없이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보시고 안도하셨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으로서는 당신 어머니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삶을 살아오신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모자의 말없는 교감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가족이야말로 살아있는 계약의 궤입니다.
다윗이 십계명을 새긴 돌판을 하느님의 궤로 모셔 놓은 이래로 이는 하느님의 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규율하는 기준이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도 앗시리아 등 주변 강대국들에게 멸망을 당하고 바빌론으로 유배되어 포로 신세가 되자 이스라엘 안에서는 통렬한 반성의 기운이 일어났습니다. 하느님의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받은 벌로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유배 이후 바리사이들은 본시 열 가지 계명으로 시작되었던 하느님의 법을 세세하게 규정하기 시작하여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서는 모두 613가지나 되는 구두 주석을 방대하게 덧붙여 놓았습니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금지령만 하루에 한 가지씩 실천하라는 뜻에서 365가지였고, 나머지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강제 규정이었습니다.
이런 율법주의로 인해 백성들은 엄청난 정신적 속박을 받아야 했는데, 복음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은 그래서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하느님의 자비로 고쳐 주시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자 율법을 독점적으로 해석하며 백성의 정신적 스승을 자처해 오던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더러 “마귀 들렸다.”고 모함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방대한 율법 규정 대신에 하느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사랑의 계명을 가르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이는 율법 학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하신 것이고, 당신 제자들에게는 단 한 가지 계명으로 더 줄여서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4,12).
이는 율법으로 전승되어 온 하느님의 법을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시려던 것이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형제요 자매이며 어머니로 여기신 이들, 즉 하느님의 가족에게는 계명으로서가 아니라 축복을 전해 주셨으니, 그것이 바로 참된 행복에 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 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3-12).
교우 여러분!
앞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가족이야말로 살아있는 계약의 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하느님의 그 뜻이란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삶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니 이 참된 행복을 누리는 이들이야말로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보여주는, 그래서 진정으로 살아있는 계약의 궤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