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이 정주영 회장 일화(2) 사와 현대자동차 공업사를 합병하여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이 해 6.25전쟁이 터지면서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주영은 미 8군 공병감실 통역관으로 근무하는 동생 정인영 ( 한라건설 창업자)의 도움을 받아 미군 병사 10만명 수용 숙소를 만드는 공사를 따게 되었다 현대건설이 결정적으로 발판을 굳힌 것은 미군 공사를 하면서 부터다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하자 정주영도 서울로 왔다.
서울에 올라와서 또 미군의 건설공사를 수주했다 1050년 10월 전 서울대학교 문리대와 법대 건물을 개조, 미 8군 전방기지 사령부 본부 막사를 설치하는 공사이다 다음에는 미 8군 휘하 부대가 발주한 부평조병창 보충부대 막사 신축 공사를 수주했다 미군 공사뿐아니라 정부에서 발주하는 긴급복구공사을 수주하게 돤다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따낸 것을 계기로 국내 5대 건설사의 대열에 합류한다 이른바 '건설 5인조'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다
사세가 커지자 현대건설은 업종 다각화를 시작했다 정부의 외자물자 보관 창고를 신축하고 창고룔 받는 창고보관업체인 현대상운을 설립했다 이 회사는 정부 외자 물자를 보관하고 월 200만환을 받았다
이 돈은 현대건설의 운영자금으로 활용하게 되었고 한대건설의 자금난 해소에 크게 기여하였다 1958년에는금강스레이트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세번째로 1962년 2월 충북 단양에 AID 차관으로 시멘트공장을 건설하게 된다 이어서 현대조선소를 2년 여만에 건설한다 현대조선소(현대중공업)은 세게신기록의 집합소이다. 2년여 만에 건설하고 조선소를 건설하기도 전에 배를 수주한다.
최택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