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 파르티잔 (외 1편)
원도이
벽을 쌓읍시다 아니, 벽을 삶읍시다 토마토처럼
벽도 빨갛게 익어갑니다 잘 누르면 으깨지기도 합니다 벽을 말랑말랑하게 가꾸는 일입니다
잘 삶은 벽을 접시에 담아 식탁에 놓고 마주 앉아 오물오물 씹는 시간을 다정한 저녁 식사라고 해봅시다
토마토처럼 흐물흐물해진 벽 앞에서
우리는 잠시 입을 맞춥니다
입속에서도 토마토는 자랍니다
줄기는 벽을 타고 오를까요 우리는 잠시 채소이거나 과일이거나
상관없습니다 벽은 토마토를 알지 못합니다
토마토의 심장에 씨앗이 들어 있다는 걸 씨앗은 아주 작고 보드랍다는 걸
씨앗도 붉다는 걸
벽과 토마토의 거리는 유동적입니다
어느 오후 나뭇잎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의 기분에 따라 흘러 다닙니다
빗물이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기분과 토마토에서 둥글게 떨어져 내리는 기분은 다를까요
담벼락 아래 토마토 한 주를 심어볼까요
토마토가 자랄 때마다 누군가는 담벼락의 마음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토마토를 삶읍시다 아니, 쌓읍시다
토마토 상자에 탄탄한 토마토부터 쌓으며
우리는 잠시 토마토로 쌓은 거리를 이야기했습니다
검은 장마의 밤
―황병승에게
그의 장마가 끝나고 그의 책도 끝났다
봉안당홈이라는 도서관 형식의 납골당에는 ‘검은 바지의 방’이라는 책 한 권만 남아 있다 그가 생전에 쓰던 안경과 펜과 시집 세 권을 벗어버리고
그해 칠월 하순이 장마로 질척거린다
누군가의 시간을 품은 것들은 충분히 젖었다
나는 장마가 지나간 흔적들을 보고 다녔다
강물이 흘러간 방향으로 넘어진 것들이 멈춰 있었다 비닐조각이나 풀줄기, 쭈그러진 물병의 글자들이 나뭇가지에 걸렸고 둑길 웅덩이에는 구름이 까맣게 고여 있었다
검은 바지를 입은 장마처럼 장마를 입은 검은 바지처럼
신이 장마를 내려준 까닭을 생각한다
장마철에는 누구든 무성하다 무성한 것들은 쓸려가면서 장마를 벗어버린다
그래서 그는 ‘검은 바지의 밤’을 생각했을까
창밖으로 보았을 장마
마지막 바지를 벗지 못한 매미울음이 비와 비 사이에 빽빽하다
잎과 잎, 공기와 초록, 산 것과 죽은 것 사이에서 장마는 맹렬했고 강물도 맹렬했다 맹렬하지 않은 것은 검은 바지를 벗은 그의 밤뿐이었다
그가 장마를 벗고 죽음의 장막 안으로 들어갈 때, 강물이 데려가지 못한 미소가 사진 틀에 남았다
창문에 걸린 하얀 구름처럼
―시집 『토마토 파르티잔』 제9회 동주문학상 수상시집 20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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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도이 / 1959년 강원 횡성 출생. 본명 원인숙. 강원대 국어교육학과 졸업. 2019년 《시인동네》에 「모자의 방식」 외 4편으로 등단. 시집 『비로소 내가 괄호 안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토마토 파르티잔』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