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은 항일 투사였나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암흑가 두목 쌍칼은 만주로 떠나겠다는 김두한을 이렇게 설득하며 만류한다. “총을 들고 싸우는 것도 독립 운동이지만 종로의 상권을 지키는 것도 독립 운동이야. 우리는 거리의 독립군이 될 수 있어.” 신주백 성균관대 연구교수(한국사)는, 그러나 이같은 대의 명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김두한은 조직을 먹여 살리기 위해 조선 상인들에게 기생했던 깡패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명동 상권을 장악했던 하야시패와의 대립 또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과장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63년 김두한이 펴낸 회고록 <피로 물든 건국전야>를 보면 조선인 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야쿠자패와 맞섰다거나 하는 대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광복 이후 공산주의자를 섬멸하기 위해 자신이 어떻게 활약했는지를 상세하게 기술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물론 김두한이 힘깨나 쓴다는 일본인을 주먹으로 제압한 것만으로도 당시 사람들이 대리 만족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야시와는 대립하기보다 공생하는 관계였다는 것이, 하야시패의 중간 보스였으며 훗날 김두한과도 절친한 사이였던 김동회씨의 증언이다. 1999년 MBC가 방영한 <깡패와 건달로 본 한국 100년>에 출연한 김씨는, 이른바 장충단 대혈투 사건 이후 하야시가 김두한에게 자전거보관소 운영권을 넘겼고 그 뒤 두 사람이 호형호제하는 관계를 유지했다고 주장했다.
김두한 또한 회고록에서 하야시가 자신에게 매달 용돈 삼아 천 원씩 보내주었다고 기술했다. 측근의 회고에 따르면, 광복 직후 하야시는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김두한에게 남은 한국 돈 일체와 일본도 및 권총 한 자루를 선물로 주고 갔다고 한다. 이 시기 박헌영에게 설득당해 조선공산당 전위대장을 맡았던 김두한은 하야시가 준 이 무기들로 무장하고 박흥식·백낙성 등 조선인 유지들의 집을 털러 다녔다.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김두한은 액션 장르의 영원한 ‘스테디 셀러’이다. 영화 <장군의 아들>(왼쪽)과 SBS 월화 드라마 <야인시대>(오른쪽).
김두한은 건국의 일등공신이었나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씨는 생전에 이런 질문을 즐겨 던졌다고 한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세 사람이 누군지 아나? 이승만, 나 그리고 김두한이야.”
대공(對共) 투쟁에 관한 한 이는 맞는 말이다. 광복 직후 공산당에 몸 담고 있던 김두한은 우익 비밀결사 조직이었던 백의사 단장 염응택을 만난 뒤 무자비한 ‘백색 테러리스트’로 변신했다.
염응택으로부터 아버지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뒤 ‘이남 출신으로는 유일한 백의사 단원’이 되었다는 김두한은 박헌영 저격 미수 사건, 여운형 암살 사건 등 각종 테러 사건에 깊숙이 간여했다.
당시 김두한이 이끈 청년단체 대한민청(대한민주청년동맹)은, ‘경찰에 걸리면 살아도 청년단에 걸리면 죽는다’는 말이 있을 만큼 좌익계 활동가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대한민청의 활약은 1946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주도한 9월 총파업에서 두드러졌다. 당시 김두한은 실습용 총과 수류탄, 죽창으로 무장한 돌격대원 3천명을 위스키에 만취케 한 뒤 용산역 기지에서 파업 중이던 철도 노조원들을 덮쳤다. 순식간에 노조원들의 무장을 해제한 대한민청은 이 중 핵심 간부 8명을 추려내 죽창으로 살해한 뒤 역 구내 하수도에 시체를 묻었다.
김두한은 또 공산당 간부나 노조 핵심 요원들을 몰래 납치해 죽인 뒤 열차가 철교 위를 달릴 때 이들의 시체를 던져 버리는 수법도 즐겨 썼다. 회고록에서 김두한은 이렇게 해치운 ‘인간 화물’이 72구에 달했다고 회고했다. 수표교 아래서 거지 생활을 할 때부터 죽마고우였던 정진영을 납치해 쇠파이프로 직접 때려 죽인 것도 이즈음이다. 정진영은 김두한이 전향한 뒤 공산당에 그대로 남아 ‘좌익 주먹’을 이끌고 있었다. 이들 테러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김두한은 미군정 재판부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특별 사면을 받기는 했지만, 김두한은 이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여보게, 사람 좀 그만 죽이게”라는 핀잔을 들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를 백색 테러의 선봉장으로 만든 배후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이승만이었다. 해방 정국 청년운동사를 연구한 김행선 박사에 따르면, 대한민청은 이승만 및 한민당의 친위대이자 이들이 지향하는 건국 이념을 전파하는 ‘대공 전투부대’였다.
이에 대해 김두한은 회고록에서 자신의 테러 행동이 영웅적인 단독 결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미군정도 경찰도 방관만 하고 있기에 자기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당시의 정치사회적 역학 관계를 고려할 때 믿기 어려운 주장이다. 더욱이 김두한은 자신의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한 측근 인사의 주장이다.
한때 김두한의 전기를 집필하기도 했던 이 측근 인사(전기는 결국 발행되지 않았다)는, 김두한을 일컬어 ‘단순하고 직정적이며 귀가 얇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훗날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은 국회 오물 투척 사건 또한 김두한 자신이 아니라 핵심 브레인이었던 박 아무개씨(시나리오 작가)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그는 주장한다.
1966년 국회에서 오물을 뿌리기 직전의 김두한. 왼쪽에서 쳐다보는 사람은 정일권 당시 국무총리.
김두한은 독재 정권에 저항한 투사였나
드라마 <야인시대>는 앞서 언급한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시작된다. 그만큼 이 사건을 비중 있게 해석했다는 뜻이다. 1966년 9월 벌어진 이 사건은 재벌가 삼성이 벌인 사카린 밀수 사건에 항의해 당시 한독당 의원이었던 김두한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똥이나 처먹어. 이 새xx아!”라는 폭언과 함께 정일권 총리 등 국무위원들에게 오물을 흩뿌린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김두한은 의원 직을 상실했을 뿐더러 박정희의 미움을 사 중앙정보부에 불려다니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대신 김두한은 일반 국민들의 가슴 속에 ‘서민의 대변자’‘군사 정권에 대항한 투사’의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비록 그의 행위가 1인 정당의 한계를 극복해 보려는 쇼맨십이자 법치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는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그가 보여준 행각은 군사 정권 아래 억눌려 있던 서민들에게 속시원한 돌파구를 열어 주었다.
뒷골목 깡패에서 정치인으로 거듭난 김두한은 우리 역사에서 다시 만나 보기 힘든, 드라마틱한 성공 신화의 주인공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소설가 서해성씨의 말마따나, 철학 없는 폭력은 끔찍한 폭력의 악순환을 낳을 뿐이다. 영웅이 될 수도 있었을 김두한은 올바른 세계관의 부재로 인해 결국 한국 최초의 구사대이자 극우 청부 테러리스트의 원조로서 한국 현대사를 폭력으로 얼룩지게 만드는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고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연구원은 평가한다.
물론 드라마는 픽션이다. 역사적인 인물을 어떻게 해석하든 그것은 제작진의 자유이다. 그렇지만 제작진 스스로 제작 의도에서 밝혔듯 <야인시대>는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보려는 대하 드라마이다. ‘긴또깡’ 숭배자들이 액션에 압도되어 역사는 돌아보지 않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1917년 서울 사직동에서 탄생.
1920년(4세) 아버지 김좌진 장군,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대파.
1927년(11세) 외할머니·어머니 사망.
1930년(14세) 외숙댁 가출. 혼자 서울로 상경. 거지 왕초에게 붙들려 거지 생활.
1932년(16세) 쌍칼에게 영입돼 주먹 세계 입문.
1934년(18세) 신마적, 구마적 등을 꺾고 종로 우미관 뒷골목 주먹 황제로 등극.
1946년(30세) 대한민청 감찰부장 겸 별동대장으로 좌익 파업 진압 활동.
1947년(31세) 미군정에서 사형 선고 받고 오키나와 형무소에 수감.
1948년(32세) 건국 특별 사면 대상자로 석방.
1954년(38세) 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 당선 3일 만에 김관철 살해 미수 사건으로
구속됐으나 자유당 입당 조건으로 석방.
1958년(42세) 4대 민의원 선거 출마, 낙선.
1965년(49세) 보궐선거에 한독당 공천받고 입후보, 당선.
1966년(50세) 한독당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 고문당함.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의원직 박탈.
1972년(56세) 뇌출혈로 쓰러져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