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1.월
시국기도회
집전
순서
12월
28일
서울, 의정부교구 등
1월
4일 전주교구/ 11일
안동교구/ 18일
구속주회, 도미니코수도회
/ 25일
/
2월 1일
광주교구/ 8일
의정부교구 (집전 순서는 변경될 수
있습니다.)
2015.12.21.
거룩한 저항
강론 :
서영섭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어떤 나라에 포악하고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왕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왕은 과도하게 세금을
착취하고 죄 없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일삼으며 심지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인도 저질렀습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과
신하들이 왕을 손에 가시처럼 미워하고 원망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이 포악한 왕이
죽고 선하고 어진 사람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단 한 명,
궁궐의 문지기 한 사람이
울고 있는 것을 본 착한 왕이 이상히 여겨 물었습니다.
“문지기 그대는 왜
우는가?
죽은 왕이 그대를 무척
사랑해주었나 보군?”
그러자 문지기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죽은 포악한 왕은 궁궐을
드나들 때마다 제 뺨을 여덟 번씩 때렸습니다.
혹시나 지옥에 가서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지옥의 옥졸이나 염라대왕의 뺨을 때린다면,
지옥의 사자들이 매우
귀찮아서 죽은 포악한 왕을 다시 지상으로 되돌려 보내면 어쩌나 싶어 걱정이 되어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남 얘기 같은가요?
어쩌면 우리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우주가
들어줄 거라고 하는 이 분,
살아생전에 회개라도 해서
저 세상에 간다면 다행일까?
싶은데 개 버릇 남
못준다는 말이 있듯이 훗날 하느님 앞에 서서 당당하게 이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젊은이들 일자리 때문에 속이 타들어가고
그리고 올바른 역사를 제대로 못 배우면 혼이 비정상이 될까봐?
밤잠을 설쳤는데 그걸
알기나 하냐며 오히려 하느님에게 면박을 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 나아가 이곳 하느님
나라에도 대테러방지법이 없다는 걸 IS가 알았으니 강력히 대테러방지법을 도입하여 내가
이곳 하늘나라를 다스리겠으니 여기서 나가시라고 하느님을 황당하게 하지 만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솔직히 하느님은 무슨
죄입니까?
앞서 말씀드린 예화처럼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이지 궁궐의 문지기처럼 하느님도 저분의 유체이탈 화법에 너무 질려서 다시 지상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을까봐?
진심으로 걱정이
됩니다.
어째 저의 상상이 너무나
지나쳤는지요?
하지만 사방이 암흑천지인 이 나라의 꼴을 보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분명 저만의 걱정은 아닐
것입니다.
교수신문이 뽑은 올해
2015년 사자성어는 혼용무도(昏庸無道)라고 합니다.
혼용무도는
‘나라 상황이 마치 암흑에 뒤덮인 것처럼 온통
어지럽다’는 뜻입니다.
혼용은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를 가리키는 혼군과 용군이 합쳐진 말로 혼탁하고 어지러운 사회분위기의 책임을 군주,
다시 말해 그 책임을
지도자에게 묻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교수들이 혼용무도를 추천한 이유는 연초에
메르스 사태 대응 실패,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비롯한
국민 여론을 수렴하지 않은 각종 정책과 노동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고 있는 노동개악 강행 그리고 삼권분립과 의회주의 원칙이 크게 훼손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어렵사리 이루어낸 우리의 민주주의가 불과
몇 년 만에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유신독재의 부활을 이렇게 빨리 체험하게 될 줄은 정말 미처 몰랐습니다.
이처럼 역사가 과거 독재시대로 소급되는 사상
초유의 긴급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은 분명 성장과
변화라는 진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법칙입니다.
하지만 독재는 이러한
역사의 법칙을 부정하며 더 나아가서는 시간을 자꾸 과거로 되돌려 자신들의 과오마저도 끊임없이 정당화시키며 모든 상식과 인간성을 파괴해버리고
맙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지난
3년 간 독재시절에나 있었던
내란죄,
정당해산,
소요죄가
부활하였습니다.
일각에서 여전히 심심찮게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70·8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1세기 현재의 상황과는 너무 많이 다르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상황이 너무나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지
보겠습니다.
“70·80년 대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키라는 근로기준법마저도 없애려고
하며 노골적으로 노동자들을 쉽게 해고하겠다는 노동개악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동개악에 맞서
80만의 노동자를 대표하고 2000만 노동자들의 가족을 대변해서 노동자로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했던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을 소요죄로 구속했습니다.
대선 전 쌀값 17만원을 21만원으로 인상하겠다던 공약은 내팽개치고 개 사료
보다 못한 가격으로 만든 이 기막힌 현실에 대해 쌀값보장과 식량의 주권을 지키고자 정당한 외침을 한 농민들을 향해 물대포로 타격을 가해 급기야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를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는 70·80년대 이 땅에 민주화를 위해서 고초를
겪었습니다.
독재자 아버지에게 그렇게
고난을 받더니 결국 그 독재자 아버지의 자식에게 기어이 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독재자 아버지는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정치인들,
지식인들,
종교인들,
농민들,
노동자들을 모질게 탄압하고
심지어는 살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밀실 정치를 통한 간첩조작과
공안탄압으로 온갖 인권을 유린했던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 자식은 서슬
퍼런 철권통치를 한 독재자를 이 나라를 살린 탁월한 영도자로 둔갑시키려합니다.
그렇다면 그 독재자의 자식은
어떠합니까?
자신의
7시간은 목숨처럼 귀중하게 생각하면서 정작
304명의 소중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거짓 눈물을 흘리며
진실규명을 하겠다던 세월호 참사는 여전히 고귀한 생명이 희생된 304명보다 자신의 7시간을 더 소중히 여기며 진실을 감추는데 급급하고
있습니다.
사흘 후면 암흑 같은 이 땅에 고요하게 찾아올
아기 예수의 운명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아기 예수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함께 자신의 존재를 위험하게 만들 거라고 불안을 느낀 폭군 헤로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이성을 잃은 헤로데의 광기는 극에 달아 아기
예수로 추정되는 모든 남자 아기들을 학살해버렸습니다.
우리에게 곧 다가올 아기 예수는
평화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는 평화의 존재가 지금 그렇게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평화는 정의의
작품(사목헌장 75항)입니다.
평화의 결과는 불의에 대한
침묵이 아닙니다.
평화는 정의를 지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정의가 없는 평화는
거짓입니다.
우리의 평화는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쫓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화는 농민들이
일궈낸 생명의 열매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화는 세월호
유족처럼 억울한 이들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화는 거짓이 아닌
진실한 것입니다.
우리의 평화는 강자가
아니라 약자가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 평화가 여지없이 죽도록 몰매를 맞고
있습니다.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평화를 외치는 노동자들을 붙잡아 갑니다.
생명의 열매를 지키겠다며
평화를 외치는 농민들에게 물대포로 가격합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알고
싶다며 평화를 외치는 유족들과 미수습자 가족들을 업신여기며 조롱합니다.
힘이 없다고 고백하며
평화를 외치는 약자들을 모질게 짓밟아버립니다.
이처럼 우리의 평화는 어두운 골목에서 흠씬 두들겨
맞고 혼절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어둠을
누구나 모르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건 어둠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어둠을 이겨내고 환히 밝힐 수 있는 빛이며 우리 서로가 평화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성모 마리아에게 아기
예수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조금은 한가하고 사치스러운 말을 건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의 행복은
무엇이며,
우리의 믿음은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져서 행복한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내용은 다름 아닌 오늘 독서 아가에서
이야기하는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달라는”
(아가
2,14)
간절한 열망 다시 말해
하느님의 정의로운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온전히 실천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바로 그 실천하는 삶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그 행복은 물질을 많이
소유하고 내 삶이 성공하는데 있지 않고 옳은 일을 하며 평화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교회와 우리 신앙인들은
진리,
생명,
가난,
정의에 관한 문제에 대해
결코 피해갈 수 없으며,
피해서도 안
됩니다.
그 믿음은 고상하고 화려한
언어로 진술하는 신학적인 증명이 아니라 예수의 삶을 통한 우리의 복음적인 실천입니다.
그러니 우리 좌절하지 맙시다.
예수처럼 살겠다고 다짐한
우리가 과연 두려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지금 앞에 놓인 이
어두움은 빛을 보기 위한 과정일 뿐 영원히 머무르지 않습니다.
어둠을 탓하고 좌절하기보단
그 어둠을 이겨내는 빛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 빛을 만드는 것은 어두운 악에 맞서는 거룩한
저항입니다.
성전에서 장사를 하는
이들에게 분노하며 저항한 예수를 기억합니다.
바로 그 거룩한 저항은
믿음이 살아 숨 쉬는 맥박이라고 했습니다.
억울함을 하소연할 곳 없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피난처가 되어버린 이 곳 광화문에 열렸던 공포의 문을 없애고 하느님의 자비로 시대의 모든 이를 위로하는데 부름을 받았음을
기억하며,
그 누구보다도 자비의
손길과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자비의 문을 활짝 열어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연대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콜트콜텍 기타노동자와 함께 하는 성탄
전야미사
12월
24일(목)
19:30,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 농성장(국회의사당역
3번
출구)
화상도박경마 추방을 위한
성탄미사
12월
25일(금)
11:00,
용산
화상도박경마장 앞(용산
전자랜드 옆 원효대교 방면)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매일미사
매일
16:00,
서울대병원
앞 농성장(24,
25일도
16시
미사)
박근혜정부의 폭력을 고발하는 전국 동시다발
시국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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