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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함을 자랑하리니
고린도후서 12:5-10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길 빈다.
성령강림 후 제6주일이다. 일 년의 절반을 살았다. 2024년의 반환점을 도는 느낌이 어떠한가? 너무 빠르게 흘러갔다는 느낌이 드는가? 시간의 매듭을 기억하고 사는 일은 지혜로운 삶이다.
지난 주 초에 화성시 서신면에 있는 리튬 건전지 공장에서 불이나 무려 23명이 희생되었다. 그중 외국인 노동자가 18명이라고 한다. 외국인 노동자를 사람이 아니라, 도구 취급하는 관행이 이번에도 도마 위에 올랐다.
서울 종로에서 필리핀교회를 사역하는 목회자가 있다. 그는 필리핀을 좋아하고, 필리핀 노동자들을 위해 애쓴다. 그들 대부분은 한국에서 불법으로 일하는 노동자와 가난한 유학생이다. 이번에 교회에서 기도문집을 만드는데, 십자가 이미지를 넣고 싶다고 부탁해 약속하였다.
이런 말을 하더라. 필리핀 사람들이 한국에서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 줄 아는가? 6.25전쟁 필리핀군 참전기념비라고 한다. 지금 한국에서 구박받는 자신들이 유일하게 자존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필리핀군 참전기념비에서 이 나라를 도운 역사를 기억하면서, 종살이 같은 이 땅에서 느끼는 푸대접을 이겨내려는 것이다.
누구나 인생에는 장단이 있다. 장단은 긴 장(長), 짧을 단(短)이다. 무슨 뜻인가? 삶에는 저마다 길고, 짧은 것이 있다는 의미이다. 성공이 있는가 하면 실패도 있고, 기쁨이 있는가 하면 슬픔도 있다는 것이다.
항상 긴 대로 사는 사람도 없고, 늘 짧은 대로만 사는 사람도 없다. 인생에서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한다. 그러니 당장 강하다고 교만할 일도 못되고, 약하다고 주눅들 일도 아니다.
가장 좋은 것은 길고 짧은 것이 서로 어울려 장단을 맞추며 사는 일이다. 길면 긴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그 인생의 고비마다 서로 맞춰주는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내 인생의 길에서 박자를 맞춰주고, 장단을 맞춰주는 친구를 찾아보면, 정작 별로 없다. 모두 제 살기에 바쁘다. 그러니 가장 가까운 사람 간에도 의리가 중요하다.
1)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강함이 아닌 연약함을 자랑한다. 그는 수 많은 배신 속에서도 가까운 사람들과 가족처럼 어울려 지냈다. 그의 강함 때문이 아닌, 그의 약함과 고달픔 덕분이다.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영적 은사나 환상과 계시에 대해 남다른 자랑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영적 체험을 했다는 것은 자기를 신뢰하게 만들어주는 일종의 보증 수표였다.
이러한 영적 체험 여부에 따라 사도의 자격유무를 따지기도 하였다. 떠돌이 전도자들은 사도 바울을 향해 예루살렘에서 발행한 증명서를 따지고, 신뢰할만한 자격증에 대해 집요하게 물었다. 바울도 그런 논쟁에 참여하였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2).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3).
여기에서 바울이 아는 그 사람은 사실 바울 자신을 가리킨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3인칭을 사용하여 자기가 체험한 놀라운 일을 마치 남 이야기하듯 말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다. 바울은 당시 사람들의 영적 체험을 자랑하는 일이나, 영적 자부심을 갖는 일이 과연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할 일인가 하고 생각하였다.
바울은 환상과 계시는 자신의 영적인 범주에서는 놀라운 것이지만, 자기 주관적인 체험을 마치 보편적인 것처럼 말하는 것을 위험하게 여겼다. 오늘에도 그런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런 영적 오만함이 공동체를 어렵게 만든다. 자기 과시, 자기 자랑은 얼마나 남을 불편하게 하는가? 신앙이나 영적인 문제도 마찬가지다.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6).
바울은 자신의 영적 체험을 통하여 배운 것이 있었다. 바울 역시 그 체험을 이야기할 때가 있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무려 세 차례 같은 신비 체험을 반복하여 증언한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자신이 박해하던 예수님을 만나 눈이 멀고, 그 후 예수님의 제자로 거듭난 그 이야기이다. 물론 바울은 자신의 사도 됨을 자랑하려는 그런 무대에서가 아니라, 죄인의 법정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절박한 그때에만 자신이 겪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비를 고백하였다.
바울은 자기의 영적 체험을 끌어대어 자기를 옹호하거나, 우월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보이지 않는 특별함이 아니라 자신의 보이는 연약함을 자랑하고 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5).
2)
바울만큼 유능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오늘 전 세계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자신들의 신앙 유산을 기억하고 기념한다면 그 공의 많은 부분은 사도 바울에게 감사해야 한다. 바울의 영적, 지적, 체험적 능력이 오늘 그리스도교가 온 세상으로 전파되는 일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남들에게 대놓고 자랑한 것은 그런 유능함, 특별함이 아니었다. 바울이 대놓고 자랑한 것은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에게는 남다른 연약함이 있었다. 바울은 그것을 ‘육체에 가시’라고 불렀다. 그것은 아마 신체적 고통일 것이다. 그 고통이 얼마나 바울을 괴롭혔는지, 그는 ‘육체에 가시’를 사탄의 작용으로 비유하고 있다.
바울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바울이 평소 겪는 신체적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남들과 다른 바울 자신의 고난과 연약함이었다. 바울은 평생 ‘육체에 가시’라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끊임없이 간구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8).
그러나 바울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에 바울은 기도 가운데서 하나의 답변을 얻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9a).
바울이 자랑하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나, 남다른 지식이나, 영적 체험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육체에 가시’를 자랑하고, 자신의 무력감을 자랑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였다. 약함을 자랑한다는 것은 지극히 역설적이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는가?
흔히 사람들이 고통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과시한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고통을 겪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할 때 자기의 능력을 가장 깊이 체험한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겪어 보니, 자랑이 무색해졌다. 도대체 자랑이 무슨 의미가 있던가?
바울의 경우, 약함 가운데서 갖가지 자기 자랑은 막히고, 하나님으로만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b).
지난 주간에 캐나다에서 온 오강남 박사와 식사를 함께 하였다. ‘예수는 없다’라는 책으로 유명한 분이다. 그는 비교종교학자이니 남보다 종교적 발언에서 자유로울 것이다.
오강남이 이 책을 쓰면서 처음부터 염두에 둔 제목은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다’였다. 어려서부터 몸에 밴 고향과 같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애정 어린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비교종교학자로서 현실 교회의 모습에 대해 비판적인 성찰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출판사가 역제안을 하였다. 그런 제목으로는 책이 안 팔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 개쯤 리스트를 제시했는데, 그중에 <예수는 없다>고 하였다. 저자는 그래도 제목이 너무 심란하니 앞에 ‘그런’을 붙이자고 했는데,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런 예수는 없다’라고 하면 김 빠진다는 것이다.
어쨋든 내용보다 제목 때문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일본은 없다, 김대중은 없다’ 류와 같이 ‘예수는 없다’는 ‘없다’ 시리즈를 대표한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강한 예수, 힘 있는 예수, 부자 예수, 문자주의 예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교회가 늘 자랑하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더라. 다시 한국교회에 대해 글을 쓴다면 <예수는 있다>라는 책을 내고 싶다고 하였다. 바로 ‘이런’ 예수일 것이다. 내가 김빠지니 ‘이런’은 빼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3)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을 준다. 바울에 따르면 당시 고린도교인들에게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나,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증거를 살펴보면 대단한 영적 체험이나 기적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증거는 무엇인가? 우리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떠받쳐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우리의 죄 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인간의 변덕스러움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참아주시고 믿어주시는 하나님의 기다리심이다. 사도 바울은 담대히 선언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10).
지금 건강한 사람들은 평생 건강할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 성공한 사람은 항상 그 상태로 살 것으로 안다. 지금 부자는 대대로 부자로 살 줄로 생각한다. 지금 젊고 예쁜 사람은 언제나 그렇게 살게 될 것으로 착각한다. 아마 그 반대도 통하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강한 때가 있는가 하면, 약한 때도 있다. 그때를 깨닫는 일은 지혜롭다. 자기 연약함을 아는 그때 하나님을 향하기 때문이다. 사실 누가 약함을 자랑하는가? 누가 내 장애를 자랑하는가?
스스로 돌아온 탕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고 이어령 교수이다. 그는 초대 문화부장관을 지냈다. 88올림픽 개막식을 연 ‘굴렁쇠 소년’ 퍼포먼스는 그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어령은 오만하였다. 1970년대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기라성같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을 만날 때 그는 자신은 무신론자임을 과시했다고 한다. 그의 지적 과신과 사회적 유명세가 그를 신앙에 대해 냉담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암에 걸린 딸의 영향으로 이어령 교수는 마침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가 세례받을 때 여러 언론이 교회로 찾아와 뉴스거리로 삼았다. 그의 회심이 방송을 타고, 떠들썩하였다. 이를 비판적 시각으로 본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들이 물었다. 무슨 세례 받는 것을 그렇게까지 하느냐? 이어령의 말이 재밌다. “아닙니다. 돌아온 탕자를 환영해 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자신의 연약함, 자신의 죄, 자신의 배신을 하나님께 내놓으라고 말한다. 감추지 마라! 아닌척하지 말라! 합리화하지 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덮어주고, 주님의 넉넉한 사랑은 불완전한 우리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며, 이 세상에서 제공할 수 없는 위로와 기쁨을 주신다.
다음 주일은 맥추감사주일이다. 시간의 고비 고비마다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고, 감사드리는 일은 얼마나 소중한가?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다.
지난 1년 반 동안 색동교회 수요기도회 주제 성경인 신명기는 말한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 8:17-18).
이것은 신명기 세계관을 반영한다. 하나님의 언약은 오늘 여기까지 이르도록 하나님의 자녀로서 고백하는 나와 함께 하신다.
무엇보다 내 인생의 고비고비 마다 감사드리는 일은 얼마나 소중한가? 감사하는 일은 성경적 삶의 방식이다. 감사절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늘 감사하라. 무엇보다 ‘감사하는 사람은 못 이긴다’는 말은 정답이다.
하나님은 내 약함을 사용하신다. 주님은 내 어려움을 사용하신다. 내 곤란한 시간에 만나 주신다. 마더 테레사는 자신을 몽당연필로 비유하였다. 그 짧은 몽당연필도 부러질 때가 있다. 그러면 다시 깎아서 쓰신다. 하나님이 주님의 손으로 나를 꼭 쥐고 계신다.
나의 강함으로, 나의 똑똑함으로, 나의 엘리트 의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나의 연약함으로, 나의 죄인 됨으로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내 연약함을 사랑하신다. 그 연약함은 하나님과 만나는 기회이다. 누군들 연약함과 죄와 비겁함이 없는 그런 존재가 있는가? 하나님을 향하라! 주님을 의지하라!
하나님께서 넉넉한 사랑과 은혜로 내 연약함을 만나주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