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현주랑 만나서 작은촛불활동에 참여했다. 조금 지각했는데 와 정말 많은 멤버가 와있었다. 작은촛불사상 최초일지도...
5월 말이라 5.18, 6.10항쟁과 관련된 곳을 조사하고 모니터링했다.
처음에는 성공회성당쪽으로 갔다. 예전에 한번 다른 동아리를 따라 지나간본적이 있었는데 작은촛불멤버들과 함께오니 또 새로웠다. 왠지 건물의 분위기가 우리나라 같으면서도 아닌것 같았다. 성당의 역사에 대해서는 어떤 할아버지 분께서 설명해주셨다.내부에서는 수녀님이 또 설명해주셨다. 이곳은 6.10항쟁의 진원지라고 했다. 내가 조사한 내용에서는
<6월 10일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최로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개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오후 6시를 기해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민중항쟁의 뜻으로 차를 세워서 경적을 울려줄것 또는 흰 손수건을 흔들어 달라고 지침을 내리어 택시운전수들의 경적소리와 시내버스에서 흰 손수건을 흔드는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여고생들은 민중항쟁 참여자에게 마실 물과 도시락을 가져다 주는 등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원을 하여 서울도심에서 민중항쟁이 진행될 수 있었다. 특히 명동성당 농성 당시 성당 옆 계성여고 등에서 도시락과 물 등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농성이 진행될 수 있었다. 당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는 감사성찬례(성공회 미사)때 피아노를 연주할 전례 봉사자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관계자가 경찰의 감시를 피해 교회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날은 민주정의당은 전당대회를 열어 노태우 대표위원을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 날이기도 하다.>
라고 나와있었다. 6월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운동이었다.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 헌법에 대한 대통령 전두환의 호헌 조치와, 경찰의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고, 이에 6월 29일 노태우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고한다.
성공회 성당을 들린후 걷고 걷고 또 걸어 구)미국문화원 현재 서울특별시청 을지로청사에서 선생님 설명을 들었다. 6.10항쟁과 미국문화원이 무슨관계가 있는지 생각하면서 설명을 들었다. 1985년 5월 23일 학생들은 미국문화원을 점거하고 당시 주한미대사 리처드 워커와 면담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에 들어가 '광주 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사과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5.18 민주화운동의 무력진압을 미국이 묵인한데 대해 공개사과하고 한국 군부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학생들이 미문화원을 대상으로 삼은 것은, 미국을 공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전두환 정권을 공격하는 방편에서 충격 및 파급효과, 치외법권지역으로서 점거 공간이 갖는 안정성 등을 우선 고려한 것이라고 한다. 이 사건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공개 거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협조 아닌 협조 덕분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세계의 이목을 끌고 광주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구)미국문화원앞에서 간단히 설명을 듣고 마지막으로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명동성당은 참 멀었다.
명동성당홈페이지에서는 6.10항쟁과 관련하여
1987년 6월의 ‘명동대성당 농성’
1987년 5월 18일 명동대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집전으로 ’5․18 광주항쟁 희생자 추모미사‘가 끝난 후,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박종철군의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이발표되면서, 그리고 그해 4월 상계동 철거민들의 집단 천막생활이 시작되면서, 그리고 6.10 시민항쟁 도중 학생․시민시위대의 ’해방구‘ 역할을 하게 되면서, 명동대성당은 어느덧 ’명동천주교회‘의 자리로부터 한국사회 각계각층의 온갖 부조리를 규탄하고 온갖 권리를 청원하는 ‘아고라’(광장)로 변신하고 말았다. 이후 명동대성당은 ‘과잉 정치화’라는 문제를 가지고 교회 안팎으로부터의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1987년 이후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명동대성당의 ’호민관적 역할‘(tribunary role)의 전형적 사례는 1987년 6․10 시민항쟁 도중 학생․시민시위대의 ‘명동농성(6. 10-15)’이었고, 그 이후 전개되는 시위들은 정부당국과 교회, 그리고 시위주체들 삼자관계에서의 변주곡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6월 명동농성에서는 체제의 정당성이 ‘6․10 항쟁’이란 극단적 위기 국면에 의해 위협받는 정치권력과, 이에 대항하다 우발적으로 명동대성당에 피신하는 과정에서 학생, 노동자, 도시빈민, 일반시민 등 ‘범국민적’으로 구성된 시위대(그리고 이들을 명동대성당 외부에서 지원하는 시민운동세력), 그리고 정의구현사제단과 수녀단, 명동대성당의 평신도들로 구성된 가톨릭교회의 삼자간의 관계로 압축된다. 이 삼자관계 속에서 명동대성당으로 대표되는 가톨릭교회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있던 정치권력으로부터 시위대의 안전귀가와 사후문책의 포기라는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정치적 ‘해결사’의 능력을 보여주게 되었고, 이런 정치적 카리스마(charisma:권능)는 그후 가톨릭교회, 특히 명동대성당의 정치적 카리스마에 대한 과신으로 이어지면서 ‘명동의 신화’를 낳게 되었다.
라고 하고 있다. 명동성당에 대해서는 역사선생님께 들어 알고 있었다. 이렇게 6.10항쟁의 발자취를 따라와보니 책에서만 보던 아프지만 통쾌한 역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첫댓글 자료 더 찾아서 인용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