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히데요시 개인의 의욕에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합쳐져 임진왜란이 결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히데요시가 가지고 있던 특별한 입장도 고려될 수 있다. 앞선 미나모토, 아시카가 가문과 이후의 도쿠가와 가문은 모두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 즉 일왕을 대신해 국토를 수호하는 총사령관의 명목으로 막부를 열고 다이묘들을 군령으로 다스렸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미천한 신분이었기에 쇼군이 될 수 없었으며, 궁정의 직책인 간바쿠, 태정대신 등의 직함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실권 차원에서는 대장이나 대신이나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오랜 법도와 관행상 쇼군이 아닌 이상 다이묘들에게 직접적인 명령을 내리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여러 다이묘들이 히데요시의 위세에 밀려 조선으로 건너가 싸우기는 했지만 일일이 작전 지시는 받지 않았으며, 심지어 평양성 전투 후의 총퇴각도 본국의 훈령을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 판단으로 실행했음을 보면 히데요시의 권력 기반은 완벽하지 않았다. 그 자신은 몰라도 그의 후계자들에게는 언제 모반이 일어날지 모르는 형편에서, 히데요시는 조선-명 정벌 같은 거창한 사업을 벌여 가장 불온한 자들을 제거하는 한편 해외 영지를 나눠줌으로써 가신 집단을 늘리고, 도요토미 가문에 역대 막부를 능가하는 권위를 덧붙이려고 했을 수 있다. 그럼 점에서 만약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살아남아 막부를 세웠더라면 과연 조선 출병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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