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충원 참배'를 하고서...
재경대구경북시도민회(양재곤 회장) 임원진 및 회원들 80여명이 2024 갑진년 국립현충원 충혼탑 참배로 새해 공식 일정을 시작했다.
현충원에 잠든 순국선열과 이승만, 박정희 등 전직대통령 묘역을 찾아 대경인들의 새해 각오를 다지고 지혜를 얻기 위한 것으로 양재곤 회장 취임이후 년초 참배는 작년에 이어 두번째이다.
오늘 역대 전직대통령 묘소 참배 후 식당으로 이동 문어회에 주꾸미복음 두무김치에 반주를 겸한 점심식사는 우명규 전 서율시장님이 스폰했다. 늘 열정적으로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시고 스폰까지 해주시어 고맙고 감사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독립한 150여개 신생국 가운데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 이루고 선진국으로 성공한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 없다.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건국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로 새파란 '김정은'을 `어버이 수령’으로 모시고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살아갈 것이다.
역사엔 음지와 양지가 공유하듯이 5.16과 유신이라는 과오속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근대화 결과는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강국에 전세계에서 K-Culture라는 문화 국가로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우 뚝 설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 "현충원"의 일화(逸話)
'동작동 국립묘지(國立墓地)' 라는 표현으로 더 익숙한 곳,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국가유공자들이 잠들어 계신 곳이다.
1955년 7월 국군묘지로 조성 되었다가, 1965년 국립묘지로 승격되어 군인이 아닌 유공자들도 안장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등 전직 대통령들과 각계 저명인사들도 묻혀 있다. 현충원은 그런 남다른 의미를 가진 만큼, 국가에 충성심을 다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관악산에서 이어지는 산줄기가 한강과 만나는 곳에있는 현충원, 셀 수 없이 많은 묘지중 '국가유공자'라는 원래 취지와는 전혀 다른 묘지가 하나 있다.
인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 시대부터 있었던 오래된 묘지로 바로 중종의 후궁 창빈 안 씨 묘다. 동작동 현충원에서 최고 명당으로 알려진 묘다.
경내 한가운데쯤, 이승만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 사이에 있는 주차장에 '창빈 안 씨 묘역'이란 안내표지가 있다. 여기서 30m쯤 올라가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무덤 하나가 단아하게 자리 잡고있다. 묘지로 가는 오솔길에 서 있는 신도비는 1550년경에 이 묘가 조성 됐음을 알려준다. 국립현충원 보다 400년이 더 됐다는 얘기다.
창빈 안 씨는 누구일까? 창빈은 조선 14대 임금인 선조의 할머니, 연산군 5년에 안산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인 중종 2년 궁녀로 뽑혔다.
스무 살 때 중종의 총애를 입어 영양군, 덕흥군, 정신 용주 등 2남 1녀를 낳았고, 1549년 50세의 나이에 세상을 따났다.
당시는 정치적으로 혼란하던 시기였다. 중종이 죽고(1544년), 다음 임금 인종이 즉위 1년도 안 된 31세의 나이에 죽자(1545년), 인종의 이복동생 명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그도 34세에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이 죽는다(1567년).
누가 왕이 될지 모르는 어수선한 정국에서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이 창빈 안 씨가 낳은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으로, 조선 14대 선조 임금이다.
창빈 안 씨의 입장에서는 손자가 임금이 된 것이다. 후궁의 손자가 임금이 되기는 조선 건국 이래 처음이었다.
이후 임금은 모두 창빈의 후손이다. 어떻게 보면 이때부터의 조선은 '창빈의 조선'인 셈. 흥미로운 것은 풍수적으로 봤을 때 창빈 안 씨 묘소가 현충원 안에서 가장 좋다는, 이른바 '혈자리'에 해당하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점이다.
창빈묘에 얽힌 풍수적 스토리는 1549년 10월 창빈이 죽자 아들 덕흥군은 경기도 장흥에 시신을 모셨다. 그런데 그곳이 풍수상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1년 만에 이장을 결심한다.
지금도 이장이 쉽지 않지만, 당시엔 이장한다는 것은 새로 장례를 치르는 것과 같았다. 많은 돈과 시간이 들어가는 까닭에 왕가에서도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덕흥군 이초는 저명한 풍수 지관들을 동원해서 명당 자리를 찾았고, 그곳이 지금의 창빈 묘역, 동작릉이다.
이장한 지 3년 만인 1552년 하성군이 태어났고 1567년에 하성군은 조선 14대 선조 임금이 되었다. 하성군이 임금이 되자 창빈 묘역은 그야말로 '임금이 난 명당 터'가 됐다.
'할머니 묘의 발복으로 임금이 됐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조선 8도로 퍼졌다. 그렇지 않아도 선비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풍수설에 기름을 끼얹었다.
조선의 선비들이 낮에는 유교, 밤에는 풍수를 공부하고 토론했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던 것 같다.
사회 분위기가 그러하니 화가들의 눈에 이런 스토리가 그냥 지나쳤을 리 없다.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이 18세기 중엽에 그린 '동작진(銅雀津)'은 바로 지금의 현충원 일대가 배경이다.
좌우의 산이 마을을 감싸고, 그 앞으로 한강이 흐른다. 멀리 보이는 관악산이 든든하다. 명당의 조건을 두루 갖춘 곳으로, 당시 선비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터임을 보여준다.
풍수 기운의 흐름이, 조산(관악산) -> 주산(서덜산) -> 현무정(장군봉) -> 내룡(구가유공자 묘역) -> 혈(창빈 묘) -> 명당(일반사병 묘역) -> 수구(현충원 정문) -> 객수(한강)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풍수에서는 '산은 인물을 키우고, 물은 재물을 창출한다(山主人 水主財)'고 얘기한다. 풍수의 핵심 화두 중 하나다. 그런 측면에서도 창빈 묘역은 좋은 山(人物)과 생기 넘치는 물(財物)을 다 품어 안고 있는 명당인 셈이다.
풍수적 관점에서 역대 대통령들과 국가 유공자 들이 혈 자리에 있는 창빈 안 씨를 호위하고 있는형국이다. 왕을 낳고, 왕(大統領)들이 쉬는 곳. 바로 현충원이고 동작릉이다.
국립현충원과 창빈 안 씨 동작릉은, 관악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한강을 만나는 지점에 아늑하게 펼쳐져 있다.
대구경북인들 뿐만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다짐이 지혜의 꽃으로 활짝피는 청룡의 갑진년이 되기를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