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 읽는 삼국지](1) 나관중의 ‘삼국연의’ 첫 구절은?
중앙일보
2023.01.16 10:34
허우범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해가 바뀐 지 벌써 보름이나 지났습니다. 2023년 새해에는 난세를 이겨내는 지혜가 담긴 중국 고전 삼국지를 저와 함께 읽어보면 어떨까요?
오늘부터 읽는 삼국지는 소설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삼국연의(三國演義)』입니다. ‘연의’라는 말은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여기저기서 전해져오는 야사와 전설 등 그럴듯한 이야기들을 모아서 만든 것입니다. 요즘 말로 ‘팩션(faction)’입니다.
소설 '삼국연의'의 작가 나관중. [출처=예슝(葉雄) 화백]
우리는 '삼국지'라고 말하면 일반적으로 소설을 뜻하지만 보다 엄밀하게 살펴보면 진(晉)나라 때 진수(陳壽)가 쓴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를 의미합니다.
진수의 『삼국지』는 중국역사의 초기를 다룬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와 함께 ‘전사사(前四史)’라고 합니다. 『삼국연의』도 『수호지(水滸誌)』,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와 함께 중국이 자랑하는 ‘4대 기서(奇書)’입니다. 『삼국지』와 『삼국연의』가 각기 역사와 소설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국연의』(이제부터는 ‘연의’로 약칭하겠습니다.)는 명(明)나라 때 나관중(羅貫中)이 지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은 청(淸)나라 때 모종강(毛宗岡)이 엮은 것입니다.
나관중이 지은 연의는 총 24권 240칙(則)이었습니다. 이것을 모종강이 부친인 모윤(毛綸)과 함께 120회로 대폭 수정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곳에는 그에 어울리는 시를 추가하였습니다. 우리가 읽는 연의는 대부분이 12회분을 한 권으로 편집하여 총 열 권으로 완성되어 있습니다.
자, 그럼 연의를 펼쳐보겠습니다. ‘도원결의’가 시작이라고요? 아닙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사(詞)’라는 노래입니다. 사는 시(詩)의 변형입니다. 시는 운율이 엄격하게 맞아야 하고 정형화되어 있어서 읽기 위주였습니다. 하지만 사는 ‘노래하듯 부르는 시’입니다. 즉, 요즘의 대중가요인 셈입니다. 그래서 자유로운 형식으로 노랫말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노래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춤입니다. ‘사’도 춤을 곁들이며 불렀다고 합니다.
‘시’가 당(唐)나라 때 유행한 문학 장르라면 ‘사’는 송(宋)나라 때 유행한 문학 장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선진국의 문화는 서로가 따라서 배우려고 합니다. 오늘날 전 세계가 K-팝을 따라 부르며 한류 문화에 열광하듯이, 송사(宋詞)도 서로가 따라 배우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우리의 고려시대 선비들도 모임이나 술자리에서 송사를 원어로 한 곡조씩 부르곤 했습니다. 그럼, 우리도 한 번 따라 불러볼까요?
滾滾長江東逝水 gǔngǔn chángjiāng dōngshìshuǐ
장강은 넘실넘실 동쪽으로 흐르는데
浪花淘盡英雄 lànghuā táo jìn yīngxióng
영웅은 물거품처럼 다 사라졌구나.
是非成敗轉頭空 shìfēi chéngbài zhuǎn tóu kōng
시비 성패도 한갓 공허한 것이로다.
靑山依舊在 qīngshān yījiù zài
청산은 옛날 그 자리인데
幾度夕陽紅 jǐdù xīyáng hóng
노을은 몇 번이나 붉음을 반복했던가!
白髮漁樵江渚上 báifà yúqiáo jiāng zhǔ shàng
강가의 어부와 나무꾼은 백발이 되었어라.
慣看秋月春風 guànkàn qiūyuè chūnfēng
가을 달 봄바람은 어느 때나 보는 것
一壺濁酒喜相逢 yīhú zhuójiǔ xǐ xiāngféng
한 병 탁주로 반갑게 마주 앉아
古今多少事 gǔjīn duōshǎo shì
고금의 숱한 일들을
都付笑談中 dōu fù xiàotán zhōng
모두 다 우스개 이야기로 흘려버리세.
연의의 서사(序詞)인 이 노래는 명(明)나라 때 양신(楊愼)이 지은 ‘임강선(臨江仙)’이라는 사의 일부분입니다. 그는 중국의 역사를 10개의 단계로 나누어 노래로 묶은 〈이십일사탄사(二十一史彈詞)〉를 지었습니다. 모종강이 서사로 활용한 노래는 제3단인 ‘진(秦)나라와 한(漢)나라의 노래’ 부분입니다.
'삼국연의' 모정강본 서사 부분. [출처=허우범 작가]
내용을 음미하면 연의를 다 읽은 듯한 느낌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부귀영화도 의미 없는 일이고 오직 노자(老子)적 삶인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는, 다분히 해탈의 경지에 있습니다. 또한, 이 노래는 연의의 첫 회에 나오는 ‘천하의 대세는 나누어진 지 오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 지 오래면 반드시 나누어진다. (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라는 순환론적 역사관을 응축시켜 놓았습니다.
양신은 왜 이런 가사를 지었을까요? 양신은 명나라 중기에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한림원 수찬(修撰)이 된 촉망받던 학자였습니다. 그런데 세종(世宗)이 자신의 생부(生父)를 황제로 추존하려고 하자,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이를 반대하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세종은 양신에게 형벌을 가하고 운남 지역으로 유배시켰습니다. 양신은 그곳에서 35년간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유배 중에도 100여 종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는 70세가 넘어 촉(蜀)땅으로 옮겨집니다. 하지만 여전히 죄인이었습니다. 촉망받던 신하에서 한순간에 죄인이 되어 변방으로 내몰린 양신. 그가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던 것은 노장사상에의 심취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참담한 시기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서예가 무산 윤인구의 ‘삼국연의 서사’ 휘호 [출처=허우범 작가]
그렇다면 모종강은 왜 양신의 이 노래를 넣었을까요? 모종강도 젊어서부터 글을 잘 짓기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런데 벼슬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시력까지 잃은 것으로 봐서 건강이 안 좋았던 것 같습니다. 세상을 볼 수 없다면 삶 자체가 암흑인 것입니다. 자연히 인생도 무의미해집니다. 그리하여 모종강자신도 절절하게 공감한 양신의 이 가사를 대하소설의 응축본으로 맨 처음에 배치한 것이라면 너무 엉뚱한 생각일까요?
이제 항구를 출발했으니 본격적으로 연의의 바다로 나가겠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튼실한 채비를 하여 매주 월·수 마다 월척을 낚기 바랍니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술술 읽는 삼국지](2) 폭정에 성난 민심, 세 영웅이 만나 뜻을 모으다
중앙일보
2023.01.18 06:00
삼국연의의 첫 회에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도원결의(桃園結義)’ 장면이 나옵니다. 연의의 주인공인 유비, 관우, 장비가 서로 의기투합하여 의형제를 맺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생판 처음 보는 이들을 일심동체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황건적(黃巾賊)’이었습니다. 황건적의 주체는 힘없는 백성입니다. 착하고 온순한 백성이 도적이 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황건적의 수장, 장각 [출처=예슝(葉雄) 화백]
후한 말기는 외척과 환관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농사는 매년 반복되는 자연재해로 먹고살기조차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관리들의 폭정은 날마다 백성의 숨통을 조였습니다. 세상이 이렇다보니 별 해괴망측한 일들도 벌어졌습니다. 옥좌에 푸른 뱀이 나타나고 암탉이 수탉으로 변했습니다. 역사서인 『후한서』에 기록된 내용을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낙양성의 상서문(上西門) 바깥에 사는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 가슴은 하나고 머리와 어깨는 둘이었다. 해괴한 일로 여겨서 아이를 버렸다. 이후로 사람들은 나라의 정치가 권력자들의 손아귀에 놀아나자, “위아래 구별이 없는 머리가 둘 달린 그 꼴”이라고 하였다.
해괴한 일이 이와 같았기에 소설에서도 괴이한 일들을 맘껏 표현한 것입니다.
황건적을 이끈 지도자는 장각과 그 형제들입니다. 장각은 과거급제는 못했지만 상당한 수재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남화노선(南華老仙)’이라는 도인을 만나 『태평요술(太平要術)』이라는 천서(天書) 세 권을 얻어 밤낮으로 독파하고 그 뜻을 터득합니다. 그리고는 피폐한 백성들을 모아 치유해주었습니다. 이 같은 장각의 선행은 바람보다 빠르게 번져나가 그를 스승으로 따르는 무리가 넘쳐났습니다. 이에 장각은 ‘태평도(太平道)’를 만들고 스스로를 태평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극히 얻기 어려운 것이 민심인데 지금 그 민심이 나를 따르고 있다. 이런 기세를 타고 천하를 얻지 못한다면 진정 애석한 일이 아니겠느냐?”
장각은 신도수가 늘어나자 야심이 생겼습니다. 남화노선이 천서를 주면서 ‘다른 마음이 싹트면 반드시 앙갚음을 당한다.’고 한 경고의 말도 잊었습니다. 급기야 장각은 동생들과 함께 왕조의 타도를 외치며 신도들에게 총진군을 명령합니다. 이에 전국의 신도들이 분연히 일어섭니다. 이들은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습니다. 가뭄과 홍수에 이은 전염병의 창궐, 각종 조세와 부역에 따른 참상은 이미 죽음이라는 극한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이들 역시 죽을 때 죽더라도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만은 없었던 것입니다.
황건적이 기세를 몰아치며 유비와 장비의 고향인 탁군(涿郡)까지 다가오자, 유주태수가 황건적을 소탕하는 의병을 모집하는 방을 붙입니다. 이 방을 본 두 사람은 토호(土豪)를 죽이고 강호를 떠돌던 관우를 만나 술상을 마주합니다. 이들은 곧바로 의기투합하여 의형제를 맺고 장차 큰일을 도모하기로 합니다.
복숭아꽃이 활짝 핀 봄날, 세 의형제는 3백 명의 장정들과 함께 검은 소와 흰 말을 잡아 재물을 바치고 천지의 신들께 절하고 맹세합니다.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장면 [출처=예슝(葉雄) 화백]
“유비, 관우, 장비는 비록 성은 다르지만 이미 형제가 되기로 맹세하였사오니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어려운 자를 구하고 위급한 이를 도우며, 위로는 국가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만민을 편안히 하겠나이다. 한 날 한 시에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한 날 한 시에 죽기를 원하오니 하늘과 땅의 신께서는 진실로 굽어 살피시어 의리를 배반하고 은혜를 저버리는 자가 있으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죽여주소서!”
만고에 회자되는 ‘도원결의’ 장면입니다. 삽화를 곁들여 보시면 명장면이 더욱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첫 회에 삼형제의 도원결의를 배치한 것은 형제와 군신관계로 엮인 세 영웅의 탄생을 알려줍니다. 또한, 이들 세 영웅의 생사를 초월한 충의와 우애가 소설 전체를 이끌어나갈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연의를 읽기 시작하면 그 재미에 빠져 밤잠을 설칩니다. 매번 흥미진진함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인데 처음의 도원결의 장면이야말로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주인공 삼형제는 거상(巨商)인 소쌍과 장세평에게 도움을 받아 전투준비를 완료합니다. 그리고는 정원지가 이끄는 황건적을 무찌르는 등 황건적 토벌에 여러 번 공을 세웁니다. 기도위(騎都尉)인 조조도 황건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웁니다. 유비는 스승인 노식이 무고하게 잡혀가자 황건적 소탕을 미루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 와중에 노식을 대신한 동탁이 황건적에게 참패하여 달아나는 것을 구해줍니다. 그런데 동탁은 유비가 평민임을 알고는 깔보기만 했습니다. 이에 불같은 성격의 장비가 칼을 뽑아들고 외칩니다.
황건적을 무찌르는 조조 [출처=예슝(葉雄) 화백]
“우리가 몸소 혈전장에 뛰어들어 구해주었건만 도리어 이 놈이 무례하게 군단 말이오? 내 이 놈을 쳐 죽이지 않고는 울화통이 터져 죽을 거요.”
모종강도 장비의 마음을 응원하는 시 한 편을 실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과 돈이 대접받는 세상 人情勢利古猶今
그 누가 평민이 영웅인 것을 알겠는가 誰識白身是英雄
어떻게 장비 같은 시원시원한 사람 만나 安得快人如翼德
세상에 양심 없는 놈들 모두 없애버릴까 盡誅世上負心人
연의 첫 회의 첫 문장은 ‘천하의 대세는 나누어진 지 오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 지 오래면 반드시 나누어진다.(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입니다. 합치고 나눠지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위의 시가 그 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대세의 원천은 백성입니다. 그래서 백성이 곧 하늘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뜻인 백성의 힘을 누가 이용하나요. 권력을 ‘휘두르려는’ 야심만 넘치는 자들입니다. 결국, 착한 백성은 그들의 교활한 정치적 수순에 휘둘리고 굴복당합니다. 무엇이 변했을까요. 권좌의 주인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권력유지에 거슬리면 또다시 역도(逆徒)가 되고, 권력유지에 필요하면 새로운 시대를 여는 만백성이 됩니다. 모든 것은 그들이 만들어내고 그들이 결정합니다. 그들은 누구를 위하여 만들고 결정할까요. ‘하늘같은’ 백성, ‘백성을 위한’ 정치는 서책(書冊)에만 있습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 잠시 꺼내어 써먹는 수단에 불과할 뿐입니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원본 링크 [술술 읽는 삼국지](2) 폭정에 성난 민심, 세 영웅이 만나 뜻을 모으다 | 중앙일보 (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