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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일 [연중 제9주간 화요일]
베드로 2서 3,12-15ㄱ.17-18
마르코 12,13-17
부족한 것이 많을수록 사기당할 확률도 높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것으로 올가미를 씌우려고 시도합니다.
로마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습니다. 세상도 우리를 미혹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이용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사기당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제가 보좌 신부 때 사기를 당해 물건을 엄청나게 산 일이 있습니다.
추석 즈음에 한 백화점에서 영화를 보고 성당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냉동탑차가 도로에서 제 차 옆으로 오더니 잠깐만 세워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길가에 세웠더니 자신들도 그 백화점에 납품하는 사람들인데
물건이 남아서 싸게 팔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내어놓은 물건은 제주 옥돔이었습니다.
얼음 위에 재워진 옥돔은 정말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있었습니다.
원래 백화점에서는 35만 원에 판매되는 것인데 4만 원에 사라고 했습니다.
자신들도 고향에 내려가고 싶지만 바빠서 내려갈 수 없어서 그렇게 남은 것들을 팔아
소주라도 한잔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저도 어차피 고향에 내려가면 여러 가정에 선물을 해야 해서 10박스를 샀습니다.
수녀원에도 주었는데 수녀님들이 옥돔은 아닌 것 같다고 했습니다.
집에 가져갔더니 온통 얼음으로만 채워져 있고 위에 3마리 정도만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몇 마리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20마리 정도 있다고 했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다 큰 어른이, 그것도 사제가 사기 치는 그런 사람들에게 당해버렸다는 것이
창피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때 저는 돈이 넉넉하지 못한 보좌 때였기 때문에 사기를 더 당하기 쉬웠던 것 같습니다.
일단 그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애정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돈에 대한 욕구가 더 크니까 그만큼 싸게 판다는 것에 대해 더 혹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같으면 그렇게 싸게 사기 위해 사기의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리 100원짜리라도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면 굳이 싸다고 돈을 쓰지 않습니다.
돈이 더 넉넉해졌는데도 사기당할 위험이 그만큼 줄어든 것입니다.
무엇이 넉넉할 때 덜 미혹됩니다.
친구가 많을 때 애정에 덜 미혹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기꾼들은 그 사람의 욕구를 자극합니다.
만약 전화금융사기를 치는 사람이라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자녀가 다쳤다고 해서
당황하게 만듭니다.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야 당황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민감한 것이 많은 이들은 많은 사기를 당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애정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사람을 믿고 보증을 서주거나 돈을 빌려줄 것입니다.
그 사람은 본인은 순수하고 착한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고 말하겠지만 실제로는 인간 애정에 대한 애착 때문에 사기를 쉽게 당하는 것뿐입니다.
재물이든 사람에 대한 애정이든 자신이 민감한 부분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기의 위험에 노출됩니다.
그리고 민감해지지 않는 방법은 넉넉하게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라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만약 세금을 내라고 하면 유다인들에게 매국노처럼 취급받을 것이고 그렇다고 내지 말라고 하면 반란세력으로 잡혀갈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황제의 것이란 세상의 욕구입니다.
세상의 욕구는 세상에 돌려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나의 모든 바람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데서 나옵니다.
사람은 무언가를 욕망하거나 바라기 위한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세상 것을 욕망할수록 하느님 것을 덜 욕망하게 됩니다.
반대로 하느님 것을 욕망할수록 세상 것에는 무감각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에너지를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에 사용하기 때문에 세상 것에는 무관심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쪽 편을 들어주셔서가 아니라 하느님 편을 들으셔서 그들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으셨습니다.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두면 부족한 것이 없어집니다.
하느님은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와 있을 때 아이들이 세상 어떠한 유혹에도 미혹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보는 것을 귀찮아해서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맡기면 아이는 어머니의 관심을 못 받는 대신 스마트폰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그런 아이에게 어떤 사람이 길을 지나가다가 스마트폰을 보여주면 그 아이는 엄마를 버리고 그 스마트폰을 내미는 모르는 사람을 따라갑니다.
엄마의 사랑이 부족해지면 자녀들은 그렇게 세상 것을 좋아하고 세상 것에 미혹되어
사기당하고 이용당하며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엄마의 사랑만을 믿는 아이라면 자신을 엄마의 사랑으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무엇에도
반응하지 않고 겁을 먹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로부터 미혹되는 일이 없는데 그것들이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자신을 떨어뜨리는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라면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기당하지도 않고 이용당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의 미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키우는 길뿐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2일 [연중 제9주간 화요일]
베드로 2서 3,12-15ㄱ.17-18
마르코 12,13-17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말씀 언젠가 복음서를 쭉 읽어가면서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들만 한번 추려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씀들을 유형별로 구분해보았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말씀들을 하셨더군요.
수많은 비유들, 제자들의 특별 교육용 일화들,
정신 못 차리던 제자들 혼내시던 말씀들,
잘 알아듣지 못하던 군중들을 위한 재미난 이야기들, 하느님 아버지와 나누셨던 대화들,
율법학자들과의 논쟁들, 그 많은 위로의 말씀들, 희망의 말씀들... ^^*
예수님의 말씀을 유형별로 정리하다가 느낀 바입니다.
무엇보다도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은 단 한마디도 버릴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말씀이 상황 상황에 너무도 적절했고, 기지로 넘치는 말씀이어서 경이롭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특히 사악한 적대자들이 예수님을 떠보려고 할 때, 예수님을 올가미에 집어넣으려고 갖은 계책을 마련해서 다가왔을 때, 그래서 의기양양한 태도로 예수님께 시비를 걸때,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지혜로 흘러넘쳤습니다.
적대자들 앞에서 예수님의 언변은 더욱 빛을 발했고,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단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용감하게도 홀로 맞서셨습니다.
적대자들은 논리 정연한 예수님의 말씀, 순금과도 같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예수님의 말씀, 어쩔 수 없이 승복해야하는 진리 앞에서 언제나 슬금슬금 뒤꽁무니를 뺍니다.
그리고 치를 떨면서 다음 기회를 노리며 물러갑니다.
눈앞에 놓여있던 먹잇감을 놓친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면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워 강경하게 맞서시던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약자들이 상처받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당신 지혜의 말씀으로 궁지에 몰린 약자들을 셀 수도 없이 구해내셨습니다.
박해자, 위선자, 이교도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로우셨지만, 길 잃고 방황하던 양떼들에게 그분의 말씀은 한없이 감미로운 생명수와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는 것처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오랜만에 좋은 건수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이제야 잡아넣을 수 있겠구나, 드디어 소원성취 하는구나, 하면서 희희낙락,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예수님께 올가미를 던집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었습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고발되어 구속될 상황이었습니다.
바쳐야 한다고 대답하면, 그 인간들 분명히 예수님을 유다 민족의 반역자로 몰고 갈 것이고,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하면 로마제국의 반역자로 몰고 갈 것입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하기 힘든 그 상황에서 나온 예수님의 대답은 정말 기가 막힙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예수님의 대답은 난감한 상황을 적당히 넘기기 위한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장황하게 이것 저것 설명하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적정선에서 타협하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단 한마디 강력한 말씀, 살아 움직이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마디 말씀으로 황제의 권위도 존중해주시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는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우위성, 하느님의 우선권에 대한 강조도 놓치지 않습니다.
참으로 지혜로 가득 찬 생명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찌 그리 힘이 있는지요?
어찌 그리 지혜로운지요?
어찌 그리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지요?
어찌 그리 감동적인지요?
그 배경이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오랜 기간 나자렛에서의 깊이 있는 수행생활 탓도 컸을 것입니다.
인내하면서, 침묵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때를 기다리면서 하나하나 진리를 깨쳐나가셨을 것입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온전한 일치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와의 완벽한 일치상태에 계셨는데, 그 때문에 아버지께서 원치 않으시는 길은 단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말씀만을 하셨습니다.
난감하고 절박한 상황 앞에 설 때 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며
아버지의 뜻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단 하루만에도 엉뚱한 말, 허황된 말, 거짓말, 일생에 도움 안 되는 말, 돌아서면 후회할 말, 이웃들에게 상처 주는 말, 그래서 이웃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말들을 셀 수도 없이 내뱉는
우리들의 언어생활 앞에서 예수님의 언어는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실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기쁨을 건네주셨고,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셨고,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비결은 그렇게 어렵지 않군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 전에 늘 여유를 찾으셨습니다.
침묵하셨습니다.
기도하셨습니다.
심사숙고하셨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아버지의 도움, 하느님의 견해를 구하셨습니다.
이 상황에서 아버지시라면 어떻게 대답하셨을까,
이런 경우 아버지께서 과연 어떤 말씀을 원하실까, 늘 고민하셨습니다.
그 결과 단 한마디도 버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6월2일 [연중 제9주 화요일]
복음: 마르 12,13-17 :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이 예수님께 교묘한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는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예수님께 로마 제국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어느 편을 들것이냐는 함정이 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14절) 그들은 그분을 거슬러 교묘하게 음모를 꾸미고 있다.
예수님은 로마의 돈인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15절) 하신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돈 앞면에는 ‘아우구스토의 아들, 신성한 아우구스토 티베리오 황제’, 뒷면에는 ‘최고 성직자의 화폐’라고 적혀있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16-17절) 이 답은 신학적으로 매우 깊은 의미가 있다.
우선 예수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디베리오 황제의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안에서 그의 정치적 권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비록 그 화폐를 달리 생각한다 하여도 그 화폐에는 그의 초상과 그의 문장이 새겨져 있으므로 그의 것이다. 그러므로 황제에게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황제 자신의 것을 바치는 것이므로 그것은 황제에게 바쳐라!”는 뜻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는 말씀은 ‘인간’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으니 하느님께 속하므로 우리 모든 인간의 삶은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초상은 우리 인간에게 새겨져 있으니 우리 인간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고, 그러기에 하느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이며, 우리는 하느님의 금고에서 잃어버린 하느님의 은화이다. 우리 안에 새겨주신 당신의 초상을 찾아 주시려고 사람이 되셨으니,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려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황제도 하느님의 모상을 가진, 즉 하느님의 초상이니 하느님께 속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군중들은 그 깊은 뜻을 알아듣고 그 함정을 없애버리시는 주님의 지혜에 대하여 경탄하였던 것이다.
동전에는 통치자의 흐리멍덩한 육체적 모습이 새겨져 있지만, 구원받은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우리 인간은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하도록 노력하며 하느님께 분명히 돌려 드려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 속하는 것이고 올바로 되돌려 드릴 수 있을 때 될 수 있다. 그러한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참된 예물로 이 제단에 봉헌할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청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