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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소리가 잠든 꽃물☆]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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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잠든 꽃물◎]
노혜봉 시집 / 한국대표서정시100인선 042 / 시선사(2019.11.25)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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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金子의 슬픔을 알아주네
金子 홀로
모든 기쁨에서 동떨어져
푸른 하늘 저 편을 바라보네
아! 나를 사랑하고 나를 아는 이
저 멀리 있는데
눈은 어지럽고 내 마음 불타네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金子의 괴로움을 알아주네
金子는수선화다노란색만좋아한다金子는 호로비츠가 연주하는 슈만의꿈쌍쌍의호수를 건너는 백조다金子는피아노의시인쇼팽드볼작브람스브루후의협주곡2악장이다金子는쇼펜하우어가가장아끼는제자다金子는젊은베르테르의슬픔의주인공그러나권총자살을미루어버린용감한처녀金子는젊은이의양지를찾아나선단두대의몬티金子의자존심은겨울바닷가에파묻힌열아홉개의소라껍데기金子는쟝모레아스나는흐느낌과눈물에젖은사랑을생각한다노란싸인지에적힌세종문화회관뒷골목판잣집서울특별시종로구세종로154번지지금은없어진누런깡보리밥두공기설익은깎두기한보시기가金子다金子는 복어알로양심을채운욕심쟁이복어한마리다金子는사랑의묘약을만들줄모르는지킬박사와하이드씨金子는손돌바람리야카좌판에까맣게타서누워있는강원도찰옥수수金子는희망이다교육자다참된삶의소유자다金子는고은국민학교운동장에퍼붓는7월의장대비다
金子는 홀제동 화장터에서 21년 3개월 5일 7시간 11분 33초로 길고 긴 생애를 마감했다
솨아!솨아!솨아! 잎, 잎, 잎……
자두나무 잎사귀가 빨갛게 흔들린다
金子입술에 말라붙은 피
金子의 긴 속눈썹
金子의 푸르딩딩한 살점
태풍 쥬디호가 상륙했다는 오늘 밤
金子는 주디호를 타고 되돌아올까
비창 제1악장
성고상(聖苦像)을 안은 채 어둠을 베고 돌아누운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나는 요철이 심한 나무빨래판 위에 위생도마를 올려놓는다. 쇠 수세미에 뉴스파크, 유한락스를 묻힌다. 도마 한가운데 벌건 고춧물이 배인 곳 썩 썩 닦아준다. 내 삶의 매운 더께를 더는 지켜볼 수 없다고 수없이 난 칼자국 살비듬이 떨어져 나간 도마의 몸을 들여다본다. 누렇게 먼지가 달라붙어 제 살이 피어나고, 시간은 검버섯으로 거뭇거뭇 얼룩까지 보여주는 가슴 저 너머 등을 돌린 곳, 모서리마다 구석구석 긁힌 내 칼자국들 너무 선명해 헝클어진 머리 쓸어 넘기며 물을 좍좍 부어준다.
태어나라, 네 없음으로부터 태어난 곳 없음으로 되돌아가라. 고무장갑 끼지 않은 손이 아리다. 쓰리다. 쇠줄에 버혀 생채기 난 곳 뚝뚝 떨어지는 피를 물로 씻어주며, 나는 눈물 땀범벅이 되어 흘러내리는 네 이마 목 겨드랑이 오금을 샅샅이 물로 씻어준다. 비로소 처녀티 앳된 미소 드러낼 때까지
길
무엇이었을까, 어느 날 저녁 발을 씻다 내가 무심히 들여다본 힘줄은
개울 건너 내가 밟았던 하얀 목화밭 그 모래둔덕을 지나 수숫대들이 서걱이며 알갱이들이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 답. 바람은 모시 적삼 풀 먹인 도련 끝으로 새어 들어오고 할아버지가 고의바지 단을 걷어 올리면 땀이 뚝뚝 떨어질 듯 진흙물이 배어 있었다. 땀구멍이 막혀 발바닥은 뜨거운 햇볕 아래서 찰흙 판보다 더 딱딱하게 갈라져버린 땅.
쇠비름 줄기 벌건 금들이 벋어나간 밭둑 사이 낫으로 콩잎들을 헤치며 푸른 이슬에 발을 적시면 방울뱀 꽃뱀들도 무서워 섬뜻 희부연 물꼬 사이로 숨었다.
할아버지의 엄지발톱은 뱀가죽처럼 까맣게 타서 생살 밑에 숨어 있었다. 밭머리 저편에서는 녹두 꼬투리 까맣게 말라 가끔 녹두알들이 제풀에 놀라 껍질 속에서 툭 툭 달아나는 소리도 들렸다.
내가 할아버지의 맨발을 따라잡으며 들었던 것은 방울 소리 쇠 편자의 쟁쟁거리는 징 소리였다. 할아버지의 발바닥 앞뒤 발가락 사이사이에 박혀 있었던 못.
할아버지는 소처럼 꿈벅꿈벅 철길 너머 간이역 먼 창문을 바라보다 개울물에 발을 씻다 낫 끝으로 쇠못을 파내다 점점 어두워오는 눈 비볐다.
방학을 기다리시며 봄이면 청참외, 사과참외, 개구리 참외 골마다 씨 뿌려 두셨던 노란 꽃그늘 아래 나는 코를 박고 있었다.
죽산(竹山)가는 길은 아직도 비에 젖어 발목이 시렸다
타이스의 명상곡을 들으며
이십여 년 전 학교에서 음운론 시간에 배웠던 로만 야콥슨의 변별적 자질「‘예’, ‘아니오’,」 그 간단한 도표를 보면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참으로 어려웠다.(물고기를 잡을까, 낚시질을 배울까)
책을 읽으려면 ‘예’,‘아니오’, 그 언저리의 음성적(-) 양성적(+)기호에 걸려 넘어져, 한참을 머무르곤 했다」
살아가다가 문득 바라보는 마흔 살의 뜰 한 귀퉁이에는 아무렇게나 박힌 크고 작은 돌들이 수없이 있었다. 내가 스스로에게 갇혀버린 상처들, 당신이 나에게 범한 상처들이 걸림돌로 박혀 있었다.
무심코 뱉은 모난 말 껄끄러운 말 상스러운 말, 속을 감춘 매끄러운 말들을 파내고서 허리를 폈다 잠시 뒤돌아보면 또 붉은 돌멩이 검은 돌멩이들이 박혀 있었다. 꽃삽이나 맨손으로 파내어도 곡괭이로 파내어도 쉽게 가셔지지 않는 자국들
“예”하며 내가 부스러뜨린 하얀 모래들. “예”하며 곱게 다져놓은 붉은 진흙들. “아니오, 아니오”하며 한자리에 떡 버티고 서 있는 작은 바윗덩이를 지키며
이 세상 꽃밭에서 가장 아름답게 피워낸 꽃말은?(예, 아니오)
이 세상 꽃밭에서 가장 어렵사리 피워낸 꽃말은?(예, 아니오)
오늘 나는 이십여 년 동안 박혀 있던 미움의 뿌리를 가만히 들어냅니다
오늘 또 나는 울음 돌 하나를 가만히 묻어둡니다
언젠가 저 바위덩이도 마침내 한 개 모래알로 부서져 수굿하게 살아갈 테지요
입춘(立春)
밥그릇이나 씻어라
(깡깜한 밤중)
설핏
뜨내기 같은 싸락눈이 들락거렸다
솜다리꽃의 눈곱을 떼더니
귓부리에 볼때기에 알알하게
혓바늘로 내내
얼음꽃술을 우벼파넣고 있었다
설청(雪晴)빛 손바닥만한 하늘이
부유스름하게 보였다
(손놀리지 말고)
정갈하게 밥그릇이나 닦아라
오목조목 제 밥그릇들을 챙기며
애기나리 자주달개비 하늘말나리꽃들도
먼길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노을 노을빛향
고즈넉한
햇살 겨운 골목을 멀리 두고 돌았다
무오라기 같은 가녀린 목숨
주눅 들어 엎지른 공술 한 잔의
(빛바랜 땟국물을 지우리)
빈 술잔에 꽃 심지 꽃 심지 밝혀들고
찬연히 엮어 가는 하눌타리 자락
시름에 겨운
고즈넉한 고향 길을 멀리 두고 돌았다
꽃 진 뒤 설핏 꽃 핀 자리
끝물, 헛되고 헛되어라
손톱 끝에 묻어나는 하눌타리 자락
해거름 오롯이 자줏빛 지문 찍힌
먼 먼 마을
내 단짝 그림자가 기대고 섰는
능금나누 둘레 한 그루의 찬연한
꽃살문 향기 그 너머
-내소사 대웅전 꽃살문을 보며
감감 무소식 깊은 밤 누가
꽃바람을 잠 재워 여기에 새겨 두었나
긴 긴 시간을 누가
꽃구름 타고와 저기에 무늬주름을 아로새겼나
빗모란연꽃살문으로 곱다랗게 새겨 줄까나
솟을연꽃살문으로 어여삐 드러내 줄까나
향그런 나뭇결을 찾아서 꽃물 냄새를 찾아서
판자를 고르고 바람의 갈피 갈피를 들여다본다
꽃꼭지나 꽃턱은 태어난 숨은 자리에 버려 두어라
꽃밥과 몽울만 고스란히 피어나 나오라
칼날로 바람을 감아 나뭇결엔 바람의 미소를 앉혀놓고
송곳으로 햇살을 내리박아 암술 수술을 모아놓고
가끔은 손때 묻은 입술에 빗방울 손님도 간절히 모셔두고
포근한 눈발이 들락날락 먼 동네 집안 소식도 전했으리
싸구려 장인(匠人)노릇은 끝장을 내리라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입에 풀칠이나 해야 한다고 때때로 야반도주도 하였으리)
다시 살아갈 길의 치수를 재고 모질게 홈을 파고 맞추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들쭉날쭉한 꽃밥을 다듬어 한껏 밝은 마음을 열어 보이리
속틀을 짜고 꽃잎과 잎을 끼우고 창호를 들여다보는데
꽃잎 언저리 천릿길 잎잎 언저리 만릿길 감감한 허공
노을 길 천도복숭아빛 다시 보니 가야 할 산은 까마아득한데
모란, 연, 패랭이꽃 꽃살문마다 즈믄 개의 눈짓으로 반겨주는데
꽃잎마다 잎사귀마다 즈믄 개의 손짓으로 따스히 품어주는데
바탕 거울
애초에 물을 잘 못 들인 옷감은
물이 잘 빠진다
맑은 물에 헹구어도 헹구어도
엷은 색이 자꾸 빠진다
꼭 비틀어 짬질을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짰어도
아차! 깜빡 잊고 옆에
흰 수건이나 속옷을 놓았다 하면
영락없이 제 살붙인 줄 알고
아낌없이 색을 내어 준다
어찌 하랴 본디 무색이 無色이 되기란
이리 어려울 줄이야
희부연 저 한 치도 보이지 않는
안개 같은 젖빛
젖빛 속으로 젖빛 속으로
바닥이 나달나달하게 닦는 옷 거울
저 무색(無色)의 가벼운 허우적거림으로
색색 골무
외할머니 생목 자투리로 풀칠한 겹겹이
배접을 붙이는
어둠침침한 눈물 훔치던 반달손톱 매디가
아릿아릿한
빳빳하게 말린 골무 심이 마지막 잎새
자존심이랴
수놓은 골무 얼굴에
햇살주름 흰 이마로 쓸어 넘기고
꽃살판 색색이 넘나드는 안팎 시름은
어제련듯
오늘도 허공을 바느질 하는
구름머리에 꽃관을 씌워 주느니
피터르 반 데르 빌리허의 그림을 보며
섭섭해 하지마라 쓸쓸해 하지마라
껍질만 남아 있다
금술 장식이 풀린 낡은 커튼 뒤
구석진 방 먼지만 쌓여 있는
아무렇게나 버려진 헛된 연극의 도구들
몇 십 개의 가면은 어디다 벗어 두었나
휑하니 뚫린 해골 그 구멍을 들여다보던
진지한 눈동자는 이제 어디로 숨었나
너의 연기를 기억해 줄 한 다발의 꽃도
속삭이는 소리 웃음소리
환호하는 박수소리도
상장도, 낡은 사진도 없는 이 무대 뒤
누구냐? 널 부르는 낮은 목소리
데드마스크가 바짝
마른 올리브 잎사귀의 관을 쓴 채
묵묵히 신발을 벗고 맨발로 따라가는
죽음이라는
이 무대 뒤
꼬까옷 설빔
그 옛날 꼬마였을 때 설빔은 새해 새 몸 주셨다고 귀한 옷을 갈아입는 차림, 새날 새롭게 살라 옷을 입히는 날, 색동저고리 털배자에 금박 물린 다홍치마 차려입고, 세뱃돈 챙길 두루주머니는 손에 쥐고, 마냥 설레어서 설날이었는데
설날 미사를 보면서, 색색가지 유리창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담뿍 받으며 모처럼 하느님 말씀의 옷을 받아 입는다, 누구나 하느님의 복덩이란다. 하느님의 혹인 줄 알았는데 내가 복덩이란다, 아무리 보아도 모자란 이 물건을 진정 아껴 주신다니! 남 달리 받은 내 모자람이 복덩이다, 지금까지 행복을 꾸리며 건강하게 살았으니 당연하다는 그 생각을 바꾸라고 신부님이 새삼 깨우침을 주신다
내 감정에 노을 빛 설렘의 옷을 입혀본다 하느님께 내가 지닌 알량한 믿음 그 본전도 다 들켰는데, 오늘이란 몸에 바오르가 보낸 편지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라’, 첫 마음으로 그 말씀의 옷을 곱다라니 받아 모셨다, 설레어서 설날인 새날! 색색가지 햇살의 옷을 두리두리 온몸에 둘러 감았다, 하느님의 뜰에서 하늘을 보니 봄빛처럼 환희의 구름이 두리두리한 사랑
십장생(十長生) 수복(壽福) 요
솜틀집에서 틀어 온 목화 솜 반대기를 펼쳤다 백설솜, 흰 속싸개는 소창 시접이 보이게 뒤집어 놓았다 해마다 줄어드는 어머니의 키, 솜반대기를 가로 세로 속싸개에 맞추어, 한 손으로는 솜을 누른 채 뭉텅뭉텅 손 빗질로 시간을 떼어냈다
뼛속에 황소바람 들지 마라 솜 반대기에 구름 반대기를 겹쳐 붙이고 편편하게 숨결을 펼쳐 놓았다, 누우면 등이 배긴다는 어머니의 말씀, 등이 닿는 한 복판엔 솜을 두툼하게 부풀렸다 솜과 요의 가녘, 늙으신 어머니의 성글게 보이는 하루를 보며, 숭덩숭덩 꿰맨 다음, 속싸개를 둥글게 말고는 창구멍에 어렵사리 넣어 뒤집었다
소나무 불로초 사슴 학 거북이 무늬와 수복 글자가 바탕에 어우러진 요 띠를 촘촘히 꿰맸다, 날마다 좋은 날, 남은 생, 고운 꿈꾸시라
갓 시친 요 호청, 길 따라, 구름목화꽃 고랑을 넘나들며 푸른 다래를 깨물어 먹으면 유백색(乳白色)즙 나오던, 달콤한 엄마의 젖 냄새가 코끝을 스칠라 초가을 해거름, 잘 여문 씨앗을 간직한, 목화 솜 골라 따시던 손길, 햇살이 거북이 등무늬처럼 어른거리는, 꿈결 같은 꽃길이 되시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
플루트의 작은 음창(音窓)을 지그시 눌렀다
숨결을 나누어 깊게 고르다보면
연둣빛 나비바람 맴도는 입술
손톱 끝에서 분홍 빛 꽃잎들이
조붓이 창문을 열어 줄 때면
하프의 배음(背音)을 타고 마냥 어울렸다
이승 길 끝까지, 두려운 저 죽음의 강까지
메뉴엣춤의 첫 음을 따라잡았다
눈을 감고 가슴으로 한껏 바람을 맞았다
나는 잠시 아를르의 연인이 되어
바람에게 악보를 넘겨주었다
여기, 돌아올 듯 돌아올 듯 기다려도
플루트의 음률은
제 길을 가버린 듯 고즈넉했다
흐르는 물
종이는 흘러가는 물이다
물인 내 몸과 붓인 네 칼이 닿는
여린 살 부드러운 살
불꽃이 튄다
다시 칼을 벼려라
날카롭게 시간을 더욱 냉철하게
서늘하게 단번에 내리쳐라
새파란 불꽃을 마구 튀겨라
내 칼은 날카로운 펜촉
시간을 일깨우는 금촉이다
발자국을 따라 잡아라
백년 후에도 썩지 않는, 광촉이다
네 살을 금빛으로 물들일 때까지
세상을 환한 꽃물로 빛낼 때까지
몸인 내 살과 부드러운 네 혀끝이
섬뜩 닿는 찰나, 말이 흐르는 시간
종이는 찰나가 잠드는 꽃물이다
노을빛 억새
네 눈빛에 홀려 흔들리지는 않겠다
끝장을 보리라 검붉은 흙 속에 박힌 채
젖 먹던 힘까지 끌어 모았다
버텼다 짠물로 목을 축이며
마음과는 달리 꿈속의 몸과 살
꿈, 그 흐름으로 억새는 흔들린다
팽팽히
허공의 힘살을 가닥가닥 찢는다
바람 붓 붓질로만 필생을 에둘러
장천(長天)에 날려 보내는 자화상
남은 터럭만큼 낙관을 누른다
저, 저 붉은 유인(遊靷)속
사라지는 살, 살 떨림 저
티끌 사이사이 찰나의 몸부림
환희의!!! 휘어지는
늦가을 황홀한 울음이 가뭇없다
시(詩)가 씌어진 접시
나뭇잎 한 장에 네 입술 문질러 색깔을 입혔네
한 나뭇잎엔 내 소리 문질러 숨결을 새겼네
청백자 자그마한 접시에 두 마음을 모아
정 둔 이름 천 년 기리라 나뭇잎에 모셔 심었네
유수하태급(流水何太急)
흐르는 시간은 어찌 저리도 급한가
심궁진일한(深宮盡日閑)
깊은 궁궐의 하루는 지루하기만 한데
칠백 년 전 뱃전에 쏟아 붓던 불기둥 물파랑 소리
그이 손 꽉 잡을 때까지 약조를 지켜야 해요
두 귀 항아리, 다완, 자단목들 깨지던 샛된 소리
해묵은 슬픔 붉은 잎사귀에 고이 심어 두겠네
또 하나 접시에 새겨진 잃어버린 오언(五言)시는
어느 바다 바위섬을 헤매야 만날 수 있을까
다시금, 은은한 마음 붉은 잎에 실어 보내니
정둔 님 남긴 시 찾아 새로이 쉴 섬에 살겠네
*신안 유뮬에서 나온 청백자. 1323년 중국 장시성 경덕진요로 불리던 가마에서 만든 것, 인용한 오언절구는 궁녀가 단풍잎에 써서 냇물에 흘려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짐
도솔가, 하늘 벼리
오늘 두 개의 해가 나타남에 산화가를 부르네
금빛 꽃잎을 뿌리네
몇 십 억 년 전 널 솟아나게 한 꽃
볼수록 두 눈 먼 햇덩이 금빛 꽃
별꽃
너와 나 한 몸이 되어라 두 손 붙도록 모으니
새까맣게 탄 딴딴한 심장
너와 나 몇 겁을 거슬러
돌멩이 웅크려 쥔 손 모아 제 그림자 감싸 안네
광속으로 달려온 저, 저 벼리
해꽃 별꽃 벙글며
내내 날개 짓 황홀한 꽃향들
필생을 꿰뚫는 화살 내 심중에 꽂혔네
천음회향(天音回香)
어느 핸가 가뭄이 심해지자 신라 상원사 첫 동종이
젖꼭지(유두)하나를 떨어뜨려 땅속으로 들어갔더랍니다
그 젖을 머금고 냉이 꽃다지 명아주 사과나무며 돌배나무
먹감나무는 물론 풀벌레조차 기운을 차렸답니다
종소리 들을 때마다 꿀 젖꼭지에서 떨어진 애잔한 눈물젖 떠오릅니다
생황을 불면 사과꽃에 배꽃에 스며드는 꿀젖 소리
천녀가 비파를 타며 덩굴구름을 오르는 소리
고래 입 당(撞)방망이로 종소리를 울려주세요
풀벌레며 새소리, 담금질 하는 불꽃소리
불티 잦아드는 소리 이슬로 맑게 씻어 주세요
꽃사과는 얼금뱅이 돌배에게 땡감은 여린 풀꽃들에게
비로봉은 호령봉에게
상왕봉은 두로봉 노인봉 골골이
메아리 여문 해맑은 종소리를 속속들이 전해 연꽃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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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첫 마음, 아마득하다
숫눈위에 남은 발자국
고맙다, 쓸쓸하지만……
시여, 편, 편, 태어나 주어서
온몸, 온 마음 불꽃으로
시에 미치지 못했다
오금이 저릿하다 뼈를 깎는
저 연필들, 지우개들에게
사물들, 풍경들, 미안하다
늘 첫 마음, 어두운 詩眼,,
는개 바람 속 안개구름을
헤집다가 헤매이다가,
눈밭 자작나무 숲 은빛나라
배밀이로 저어가리라
저 눈파람이 내 사르 내 피,
먼지잼으로 귀잠 들 때까지.
초겨울, 이 시선집에 못 들어간 詩한테, 진심으로 小明은 미안하다.
2019년 11월
노 혜 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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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봉 詩集 [※소리가 잠든 꽃물※]
[ 시인의 산문 ] -
시의 신, 그 잔 앞에 첫꿀을 바치면서
노 혜 봉
꿀단지, 나에겐 태어난 곳이 다른 꿀단지 몇 개가 있다. 거실 장식장 안에 몇 년이나 묵은 약꿀, 주방에 있는 아카시아꿀, 곳간용 다용도실에 있는 잡꿀, 각각 그 쓰임이나 용기 모양이 다른 꿀단지가 있다. 그리고, 내가 사는 아파트 동 화단 앞 산목련 나무 그늘에 오래 전에 묻어 둔 꽃항아리가 있다.
꿀단지는 꿀먹은 벙어리로 시간을 쟁여 놓고 귀잠에 들어 있다. 청아한 매화 빛 가야금 소리, 아카시아 꽃냄새 달콤한 사진첩, 쌉싸름한 밤꽃 같은 후회, 박박 지워버리고 싶은, 자기 자신에 대한 쓰린 실망감, 온갖 고단함과 외로움, 슬픔과 절망이 뒤섞여 검은 흙색이 된 잡꿀 같은 삶. 그러나 새오운 얼굴로 태어나기를 온전히 기다리고 있는 시간들이 있다.
시간은 오랜 침묵으로 고여 있다가 몇 년, 몇 백 년, 또는 몇 십 억년을 단숨에 건너 뛰어 느닷없이 내 가슴에 푸른 종소리를 울리며 해거울을 비춘다. 발가락바위나 반짇고리로 또는 라프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 음률로 애기똥풀꽃으로 갖가지 무늬를 보여 주면서 그의 목소리를 몇 개의 낱말로 귀 울림으로 속삭인다.
그것은 바로 섬광 같은 찰나! 오랫동안 기다려 온 끝에 나타난 번개 빛, 소리를 몰고 오는 빛이다. 버티고 도망치고 끝까지 참고서야 가까스로 얻게 되는, 정답이 없는, 한 마디 말, 한 줄의 글. 그 희열을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아름다움은 그 어떤 말로도 요약할 수 없다’고 일찍이 폴발레리가 말했듯이.
그러나, 희열은 잠시, 몇 번의 퇴고를 거친 다음에도 마지막 내 앞에 놓인 시는 언제나 언어의 깊이에 그 극점의 언저리에도 미치지 않아 또 다른 시를 쓰리라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속말이 들린다. 다음번엔 아무도 모르게 숨겨 둔 숲속에 벌통을 놓아 제일 좋은 꿀을 따서 시의 신 그 잔 앞에 바쳐야지. 시인은 죽은 돌멩이에서 꽃을 피워내는 사람이 아닌가!
<바보새는 내 진짜 이름>
시 쓰기는 고독한 침묵으로부터 온다. 백지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침묵이다. 백지는 그 안에 말이 빼곡이 수놓여있는 눈밭이다.
저 밤하늘 별에서 오는 눈짓, 깊은 바위틈에서 솟아나오는 눈물. 먼 유년의 뒤란 꽃밭에서 나팔꽃 꽈리가 등불을 켜는 입술이다. 눈을 감으면 하얀 백지의 침묵. 다시 눈을 뜨면 캄캄한 백지에 침묵이 거울로 놓여 있을 뿐.
시를 쓰려면 언제나 말이, 낱말이나 이름이 먼저 번뜻 스친다. 때로는 사물이나 풍경, 보이지 않던 이미지가 희미하게 저를 봐 달라는 듯이 스치면 나는 그 말이나 이미지를 선뜻 거머쥔다. 놓칠세라 아무 쪽지에나 메모를 한다.
말은 번뜩임이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느닷없이 말 벼락을 한꺼번에 맞는 일도 있지만, 그런 일은 일 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시 한 편을 단숨에 끝 행까지 쓰기는 어쩌다 있는 일. 몇 날 며칠 시를 쓰려면 첫 말이 오지 않아 몇 밤, 몇 주, 심지어는 몇 달, 몇 해 떠도는 소리, 속삭임, 냄새가 오기를 기다린다.
내가 시를 쓰는 게 아니라, 말이 목소리가 제 안에서 선뜻 터져 나오는 것을 받아쓰면 시가 된다. 시가, 목소리가 나를 반갑게 찾아오는 것이다. 그때 애초부터 거기 존재하고 있던 목소리를 민낯 그대로 나꿔채며 사로잡아 끄집어내야 한다. 리듬과 말의 숨결에 맞추어서.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아 불안에 끙끙 댈 때면,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한숨을 내쉬면서 시 제목을 뇌어 보기도 한다. 때로는, 그 말, 말 끝에 헝클어진 실 꾸러미 속에서 길을 풀면서 말이 말을 끌며 딸려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말이란 높다란 얼음절벽, 그 얼음절벽 끝에 서 있는 한 마리 새다. 그 바보새가 다름 아닌 바로 나다.「천하제일 늦깎이 완창꾼 박동진」을 주제로 시를 쓰려고 맘먹은 지 이십년도 넘어서야 재작년 10월초, 겨우 졸시를 낳게 되었다. 어느 면에서 보면 박동진도 긴 세월을 바보새와 같이 외길만 걸으면서 살았던 것이다.
‘바보새는 땅에서는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잘 날지 못 한다. 거추장스러운 긴 날개와 물갈퀴(미련스럽게 허둥대며 곤곤히 살고 있는 삶의 무게인가) 때문에 뒤뚱거리며 걷기에 사람들에게 늘 무시나 놀림을 당하기 일쑤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붙여진 이름 바보새. 그러나 폭풍이 거세게 몰아치는 밤. 이윽고 바보새는 죽을 각오를 하면서 절벽에서 날개를 꿈틀거리다 뛰어내린다. 활짝! 비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마침내 3미터도 넘는 양 날개가 하늘을 가리고 바다에 검은 그늘을 드리운다.
바보새는 날갯짓 한 번을 하지 않고 한 번도 쉬지 않고도, 6일 동안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바람을 타며 날 수 있다고 한다. 두 달을 날게 되면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멀리 가장 높이 날아가는 새, 알바트로스가 된 판소리꾼 박동진. 나도 진짜 이름인 알바트로스 새가 되고 싶지만, 언감생심이다.
‘침묵을 동경하는 입술이며, 침묵으로 한껏 차 오른 입을 열어라’ 시는 날갯짓으로 별하늘에 자기 목소리를 온 몸으로 간절하게 쓰고 싶다는, 온 마음으로 스며들고 싶다는 동경의 하늘바라기 몸부림이다.
시는 침묵이란 낯선 땅을 끝없이 방황하는 모험 여행이다. 시 쓰기는 zkazkaago서 두렵지만, 불안하지만 죽는 날까지 말이라는 얼음절벽, 벼랑 끝에 서서, 날마다 깃털을 헛되이 떨어뜨리면서 푸른 하늘을 힘차게 비상하는 꿈을 꾸면서 찾아가는 순백의 설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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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시 쓰기는 고독한 침묵으로부터 온다. 백지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침묵이다. 백지는 그 안에 말이 빼곡이 수놓여있는 눈밭이다.
저 밤하늘 별에서 오는 눈짓, 깊은 바위틈에서 솟아나오는 눈물. 먼 유년의 뒤란 꽃밭에서 나팔꽃 꽈리가 등불을 켜는 입술이다. 눈을 감으면 하얀 백지의 침묵. 다시 눈을 뜨면 캄캄한 백지에 침묵이 거울로 놓여 있을 뿐.
시를 쓰려면 언제나 말이, 낱말이나 이름이 먼저 번뜻 스친다. 때로는 사물이나 풍경, 보이지 않던 이미지가 희미하게 저를 봐 달라는 듯이 스치면 나는 그 말이나 이미지를 선뜻 거머쥔다. 놓칠세라 아무 쪽지에나 메모를 한다.
― 노혜봉 시인의 「시인의 산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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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혜봉 시인∥
∙ 서울 혜화동 출생, 서울사범 병설 중학교 졸업
∙ 서울 사범학교 본과 고등학교(현재 서울교대전신) 졸업
∙ 서울 성균관대학 국문과 입학, 3년 수학,
∙ 서울효창초등학교 초등교사로 첫 발령, 서울 시내 초등학교에서만 43년간 봉직, 2003년 퇴임,
∙ 1973~2003년까지 모범교사, 국어과 연구교사 금상 연구발표, 기타 10여 차례 교육발전 연공상, 공로상 수상 표창
∙ 1990년 10월 월간『문학 정신』시 부분으로 신인상 등단 (『비창 제 1악장』외 7편 )
∙ 1991년<시의 나라> 동인 결성
∙ 1992년 한용운 위인 동화『알 수 없어요』우수도서 선정
∙ 1993년 첫시집 散花歌, 1993년 <성균관 문학상>.
∙ 1991~1995년까지 <시의 나라> 동인지 제1집~5집까지 발간
∙ 2000년 [쇠기, 저 깊은 골짝],
∙ 2011년 [봄빛 절벽](시인들이 뽑은 시인상) <류주현 향토문학상>,
∙ 2012년 동인 <시터>결성, 동인지 4집까지 발간
∙ 2015년 [좋을호]<경기도 문학상 대상>
∙ 2018년 [見者, 첫눈에 반해서]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 한국 시인협회, 한국 문인협회, 한국 가톨릭 문인회, 한국 여성문학인회, 문학의집 서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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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lfgang Amadeus Mozart(1756-1791)
바이올린 소나타 제21번 마단조 K 304
Violin Sonata No21 E minor K.304 [Allegro]
*출처: 관악산의 추억(http://cafe.daum.net/e8853/MUEz/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