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사회를 넘는 방법이 필요
『무례한 시대를 품위 있게 건너는 법』에서
‘악셀 하케’는‘
“어떤 이들은 영양 섭취 면에서
극단적인 방법만이 세상을 구할 것이라 믿는다.
정치적 올바름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언어에 엄격한 법칙을 정해 놓고 이를 지키려 한다”고 말한다.
현실에서 자신을 불안정한 존재로 느끼기 때문에
안전하고 확실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운동 중독, 채식주의,
외국인 혐오나 정치인 팬덤 같은
사회 현상을 이해해볼 수 있다.
불안한 시대를 건너기 위해
나만의 안전지대를 찾는 건 중요하다.
그것이 매일 한 개의 사과를 먹는 일이든,
만 보씩 걷는 일이든,
환경보호 단체에 참석하는 것이든 상관없다.
문제는 극단에 있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다.
육식하는 사람을 혐오하거나,
타 종교를 이단이라 배척하고,
운동하지 않는 사람을 게으르다고 비난하는 식 말이다.
사람마다 보호색은 제각각이다.
다름을 틀림으로 오독하는 확신범들이 많을수록
오해는 이해의 강에 이르지 못한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 차이일 뿐이다.
거기서 타자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타자 윤리학’으로 우리들의 도덕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타자 윤리학’을 말하는 레비나스는 이런 말을 했다.
“타자는 나에게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얼굴로 나타내는 현현(epiphany)에 의해
나에게 의무를 지운다.”
이러한 의무에 따라 타자로 향한 정향성으로 말미암아
인간 간의 유대와 연대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주장이다.
그는 “제대로 된 정의는 타자로부터 시작 된다”고 말했다.
오늘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후안무치로 ‘얼굴로 나타나는 현현’을 느끼지 못해 그런지
점점 더 세상이 삭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