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805. 묵상글 (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 희년의 정신. 등 )
----------------------------------------------------
230805.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희년의 정신
어제의 탈출기는 매년 지내야 할 축제들에 관해 얘기하고,
오늘의 탈출기는 오십 년마다 지내는 희년에 관해 얘기합니다.
그런데 어제 독서를 읽으면서 살포시 웃음이 났습니다.
제물을 바칠 때 흔들어 바치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제사를 지내는 방식 가운데 하나일 뿐일 수도 있지만
특별히 생색을 내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연인들이 사랑을 고백하거나 전할 때 굳이 이벤트를 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엄마의 사랑은 굳이 생색을 내지 않습니다.
엄마의 사랑은 특별하지 않고 일상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밥을 해주는데 특별히 한번 밥 해주는 것처럼 밥상을 흔들지 않습니다.
매일 빨래해주는데 특별히 한번 해주는 것처럼 빨래를 흔들어대지 않습니다.
그런데 연인의 사랑은 특별히 하는 사랑이기에 흔들어대야겠지요.
멀리서도 눈에 띄어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깃발을 흔드는 것처럼.
그러니까 흔들어 바치는 제사는 어머니의 사랑처럼 매일 바치는 제물이 아니라
며칠 안 되는 축일만이라도 연인의 이벤트처럼 특별히 바치는 사랑의 몸짓입니다.
다음으로 오늘의 탈출기는 희년을 지내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데
오십 년마다 지내는 것이니 연중 축일들보다 훨씬 더 특별한 축제입니다.
왜냐면 이 희년에 모든 것이 해방되어 원상 회복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제와 수탈에서 해방되듯이
모든 것 그러니까 인간뿐 아니라 피조물과 땅까지 해방되어
본래의 창조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것은 안식일을 넘어 안식년의 의미입니다.
생애에 한번은 안식년을 갖거나 갖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안식년의 목적은 앞서 봤듯이 모든 것의 원상회복입니다.
원상회복이란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던 그 원상태로 되돌리는 것이고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뤄져야 하고요.
흔히 JPIC(Justice and Peace, Integration of Creation)라고 하는 것의 실현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말로 하면 ‘정의와 평화와 창조 질서 보존’이라고 하고,
줄여서 ‘정평창보’라고도 하지요.
북한산 안식년이라면 북한산이 원상회복되도록 인간이 발길을 끊는 것이고,
인간의 안식년이라면 인간이 원상회복되도록 한해를 오롯이 쉬는 것이지만,
달리 말하면 인간과 자연의 파괴를 초래했던 그동안의 불의를 멈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희년의 정신인데,
그런데 쉬라는 하느님의 명령,
쉬게 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우리는 얼마나 잘 따릅니까?
나의 인간성 회복을 위한 안식년도 제대로 가지지 못하고,
너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안식년을 제대로 주지 않으며,
자연 상태의 회복을 위해 안식년을 주지 않는 우리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
230805.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태 14,4)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가 아합 임금과 이제벨 여왕을 꾸짖었던 것처럼,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로데를 억누르려고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의 행실을 바로잡으려고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부도덕한 이들은 덕을 달가워하지 않고, 거룩함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사실, 더러운 이들은 정결함을 보면 참지 못하고, 방종한 이들은 자비를 보면 참지를 못합니다. 인정 없는 자들은 사랑과 진실을 참지 못하고, 불의한 이들은 정의를 참지 못합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곤경에 빠집니다.
오늘 <복음>은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악의에 찬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있습니다. 반대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폭군이지만 나약한 헤로데가 있고, 반대편에는 참수당하지만 힘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가 있으며, 그의 혀는 잔치에서 맹세하나 결국 타인의 죽음을 부르고 불의를 가져오지만, 반대편에는 혀가 곧은 요한이 있으며, 그의 혀는 감옥에 갇히지만 자기 죽음을 허용하고 의로움을 이룹니다.
또 헤로데가 받은 것은 요한의 머리지만 두려움이 되고, 세례자 요한이 받은 것은 쟁반이지만 왕관이 됩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따르지만,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릅니다. 악인의 혀는 거짓을 꾸미며 속임수를 쓰지만 의인의 혀는 진실을 말하고, 악인의 혀는 불의를 증언하는 반면, 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증언합니다. 악인의 혀는 자신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침해하지만, 의인의 혀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줍니다. 결국, 폭군의 혀는 의인의 피를 부르고. 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외칩니다. 감옥에 묶어 두어도 외치고, 죽어서 쟁반 위에서도 살아 외칩니다.
어찌 보면,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요한의 목숨은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마치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예수님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헤로디아의 조정을 받은 소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기를” 요청하듯, 마침내는 사제들과 유대 원로들의 조정을 받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올려 지듯, 예수님의 온몸이 십자가 위에 올려 질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 요한의 죽음은 “야훼의 종”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사실,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고,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표현한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팽배한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혀가 의로움으로 울게 하소서!
진리를 밝히는 성령의 불혀가 되게 하소서!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이 한 몸을 태워 세상의 어둠을 태우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태 14,4)
주님!
제 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혀가 헛된 맹세와 거짓의 덫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거짓을 꾸미지 않고, 진실을 말하게 하소서.
불평과 비난이 아니라, 진리와 의로움을 증언하게 하소서.
오늘, 제 혀를 말씀에 묶어 두고,
온 몸이 혀가 되어 삶으로 외치게 하고서.
온 몸으로 외치는 십자가의 말씀을 살게 하소서. 아멘.
----------------------------------------------------
230805.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헛된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한다
한 사기꾼이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전화를 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잘못을 알고 있으니 이 계좌로 돈을 송금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공개하겠습니다.”그랬더니 거액의 돈을 보낸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답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차례 같은 방법으로 못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을 보낸 사람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숨긴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잘못을 범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마음이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마음, 양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일잔치에 흥을 있게 한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헛된 약속을 하였고, 소녀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올 것”을 청했습니다. 헤로데는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왕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유지하려고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 평생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은 분입니다. 자기보다 더 훌륭한 분이 오시는 데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마르1,7).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주님을 앞세웠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왕인 헤로데에게도 해야 할 말을 했습니다. 사실,“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막시 밀리안 콜베). 그러므로 참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대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1베드2,19).
자기를 포장하는 허세를 부려 위신, 체면을 지키려 한다면 결국은 그것뿐 아니라 마음의 자유를 잃게 되고 근심,걱정,불안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30805.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신문을 만드는 제게 밭은 당연히 신문의 지면입니다. 저는 지면에 묻혀 있는 보물을 찾느라 일주일이 훌쩍 지나갑니다. 정창용 신부님의 ‘아이티’ 이야기는 가난 속에서 예쁘게 피는 꽃과 같습니다. 윤채영 선생님의 심리 여행은 은은함이 드러나는 연꽃 같습니다. 원영배 부제님의 평화칼럼에서는 인문학에서 피어나는 신학을 볼 수 있습니다. 리길재 기자님의 ‘공소’ 이야기에서는 국화꽃 향기가 납니다. 김광현 교수님의 ‘성당건축 이야기’에서는 바람에 넘어지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김용은 수녀님의 ‘오늘도 안녕하세요?’에서는 자아를 잃어버리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영성의 샘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보물이 묻혀 있는 ‘가톨릭평화신문’을 더 많은 분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보물을 찾으려는 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된 보물이 묻혀있는 평화신문이 있음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최근에 제가 신문에서 발견한 보물은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입니다. 박형찬 교수님은 가톨릭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문화와 예술에 큰 족적을 남겼던 분들 중에는 가톨릭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동안 소개된 예술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지용(프란치스코), 장발(루도비코), 피천득(프란치스코), 윤석중(요한), 장우성(요셉), 김기창(베드로), 마해송(프란치스코), 윤용하(요셉), 김세중(프란치스코), 박완서(정혜 엘리사벳), 찬상병(시몬), 최인호(베드로), 정채봉(프란치스코), 윤정희(데레사)” 이분들은 한국 문화 예술계의 별이었습니다. 가톨릭 예술가로서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이었습니다. 세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라고 합니다. 네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천에 있는 세잎 클로버는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쩌다 발견하는 네잎 클로버를 보고 기뻐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그 행복을 행운을 통해서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행운은 마치 사막의 신기루와 같습니다. 찾기도 어렵지만 찾았다고 해도 남들에게 빼앗기곤 합니다. 가톨릭 예술가들은 '예술‘을 통해서 행복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 행복이 밭에 묻혀 있는 보물입니다.
오늘 독서는 ‘희년’을 이야기합니다. 희년의 근본정신은 "남이 나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도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듯이 가난한 이, 굶주린 이, 헐벗은 이, 노예들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합니다. 이것이 희년의 정신이며 이런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는 것입니다. 희년은 정해진 햇수나 날짜가 아닙니다. 희년의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매일 매일이 희년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들에서 보물을 찾으려는 사람은 희년이 왔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행운 속에서 보물을 찾으려는 사람도 희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나눔, 자비, 희생, 사랑’을 보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보물은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재물, 권력, 명예’이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희년을 선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희년을 몰랐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준비하였던 세례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욕망을 지키기 위해서 타인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은 결코 희년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동족끼리 속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
230805.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진흙으로 예쁜 그릇을 만드는 과정을 보신 적 있으실까요? 모양을 잡고 덜어내고, 또 모양을 잡고 또 덜어내고, 그렇게 예쁜 모양의 그릇을 만든 후 잘 구워내야 예쁜 그릇이 된답니다.
구워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처음에 모양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덜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무를 깎아 작품을 만드는 것을 보신 적 있으실까요? 나무를 깎아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꼭 나무 안에 꼭 그 작품이 미리 들어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렇게 필요 없는 부분을 거둬내면 나무 안에 숨을 쉬고 있던 작품이 나타납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길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가 이 세상이 아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알맞도록 우리를 덜어내고 또 깎아내야 합니다. 어쩌면 이런 과정을 걷는 것이 신앙생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누군가를 깎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나를 깎아 내야 합니다.
나의 고정관념을 깎아내야 하고 나의 고집을 깎아내야 합니다. 나의 교만을 덜어내야 하고 나의 나태함을 덜어내야 합니다.
오른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어떤 길이 옳은 길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깎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위해 하느님의 사람을 죽였습니다.
혹시, 우리 안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지요? 내 생각과 내 편향된 주관이 하느님의 길을 막고, 그 길을 걷는 사람을 단죄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다시 한번 묵상하는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코스프레 보다는….
코스프레라는 단어는 어느 날 우리 일상에서 자주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좋아하는 영화나 만화의 캐릭터를 따라 하는 정도였을지 모릅니다.
이런 취미가 나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코스프레는 그저 코스프레라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무엇인가와 같은 척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그냥 ‘척’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코스프레를 넘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착한 척
자비로운 척
인자한 척
그러나 우리 주님 앞에서
우리의 코스프레는 그저 우리가 만든 가면에 불과합니다.
코스프레가 아닌
우리 모습이 주님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
230805.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손가락 지혜라는 말이 있습니다. 손가락으로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라고 말하면서 가리켜 보십시오. 손가락 하나는 그를 분명하게 향하고 있지만, 손가락 세 개는 자기를 향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상대방이 나쁘다고 말하는 순간, 자기는 세 배 나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에 관한 판단과 단죄를 멈추지 못합니다. 늘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판단을 하기에 앞서, 최소한 3번은 자기를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손가락 하나만 상대방을 향하고, 세 개의 손가락은 계속해서 나를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신독(삼길 신愼, 홀로 독獨)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혼자 있을 때 삼가고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스스로 절제하며 옳은 길을 걷는 사람은 함께 있을 때도 좋은 모범을 보입니다. 그러나 혼자 있는 모습에서 겸손하지 않고 함부로 막 한다면 남들 앞에서의 모습이 진짜가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보여주기 위한 삶만을 따르면서 그저 남들만큼만 할 생각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남들처럼만 살라고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유한 ‘나’의 삶을 살라고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비교, 판단, 단죄의 삶이 아닌, 인정, 지지, 칭찬이라는 나의 멋진 삶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손가락 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헤로데 영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로디아의 농간에 농락되어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잘랐지요. 우선 그의 잘못은 헛된 맹세에서 시작했습니다. 자기 생일잔치에 헤로데의 고관들과 갈릴래아의 유명한 인사들이 초대된 자리에서 기분이 너무 좋아 헛된 맹세를 한 것입니다. 어떤 청이든 다 들어주겠다는 맹세였습니다. 이때의 청이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는 것이었지요.
군주가 손님들을 초청해서 화려한 잔치를 벌이는 것은 그들에게 자기 권세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세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예수님의 소문에 죽은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고 하면서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이 나바테아 왕녀를 소박한 것이 빌미가 되어 나바테아 왕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게 되었고, 전쟁 패배로 인해 로마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을 가서 죽게 됩니다.
세상의 눈치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를 살피면서 그 뜻에 맞게 열심히 사는 고유한 ‘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눈치는 순간의 만족만을 주지만, 주님의 뜻을 따르면 영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습니다.
---------------------
청렴을 외치면서 더욱 더러워지는 것은 입으로만 떠들기 때문이다(순자).
---------------------
----------------------------------------------------
230805.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희년(禧年)의 영성
-인간의 해방, 경제적 해방, 생태적 해방-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10)
오늘 제1독서 레위기는 희년에 관한 내용으로 참 풍부한 영감을 줍니다. 인류를 포함한 전 지구 역사에 대한 거시적 영적 안목을 갖게 합니다. 거시적 안목과 정체성 형성에 역사, 도덕, 국어 교육은 얼마나 절대적으로 필요한지요! 오늘날 교육계에서 파생되는 모든 문제들은 이런 기본적 과목의 소홀에 있음을 봅니다. 도대체 역사, 도덕 교육이 너무 부실한 것 같습니다. 제가 70년대 20대 중반의 청년교사로 초등학교 6학년생을 세 번 가르칠 때 도덕, 역사 교육에 온 열정을 쏟았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어제는 ‘지정학의 힘’에 이어, 틈틈이 대략 속독으로 이희호 평전을 독료했습니다. 한반도에 대한 거시적 안목과 더불어 외교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지정학의 힘’은 이미 윤대통령이 취임하기 2년전 2020년 11월에 나온 책이고, 이희호 평전에서 김대중의 외교에 대한 탁견은 2009년 타계하기 전 자서전에 나온 소견입니다.
2009년 한국은 큰 두 별이 사라졌으니 김수환 스페파노 추기경(2009.2.16.)과 김대중 토마스 모어 대통령(2009.8.18.)입니다. 두분 다 거시적 안목을 지닌 모두의 존경을 받았던 민족의 위대한 스승이었습니다. 이희호 여사의 김수환 추기경님에 대한 회고입니다.
“참 훌륭한 삶을 사신 분이었지요. 추기경님은 우리와 함께 오랫동안 민주화 투쟁을 하셨지요. 남편이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진주교도소에 있을 때도 면회하시고, 내란음모사건으로 청주교도소에 있을 때도 찾아가셨어요. 우리가 어려울 때 생활비를 주시고도 하고요.”
이희호 평전에 소개된 김대중의 외교의 중요성에 대한 탁견에 감탄하며 공감했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한반도의 불행한 역사만은 제발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국처럼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외교가 가장 필요한 나라다. 외교가 운명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에게 외교는 명줄이다. 한반도는 4대 강국의 이해가 촘촘히 얽혀있는, 기회이자 위기의 땅이다. 도랑에 든 소가 휘파람을 불며 양쪽의 풀을 뜯어먹을 것인지, 열강의 쇠창살에 갇혀 그들의 먹이로 전락할 것인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렸다.”
역시 이희호 평전에 나오는 감동적인 김대중 대통령의 회고담입니다.
“나는 감히 예수편에 서려고 했다. 진정한 용기는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헌신에서 나온다.”
‘진리에 대한 헌신!’, 까맣게 잊고 지내기 십중팔구이지만 위대한 인간의 특징입니다. 지정학의 힘이 지정학의 덫이 될 수 있습니다. ‘지정학의 힘’에 나오는 거시적 안목의 탁견이 일품입니다.
“강대국들의 일차적 관심은 자국의 현실적 국익이다. 미국, 중국, 일본은 분단되고 대립하는 한반도를 원하기 때문에 한반도의 긴장 완화에 나설 이유가 없다. 가장 시급한 과제가 남북한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는 것이다.
한반도 전체의 역량을 결집해도 주변 강대국들에 비해 부족한데 분단되고 대립되어 남북상호간에 역량을 소모하는 현재 상황은 최악이다. 남북한이 적대적으로 대립하여 약해진 한반도를 누가 원하는가? 강대국들이 원한다.
특정 강대국에 편승해 전적으로 의존하는 건 매우 위험하다. 지리는 변하지 않는다. 강대국들의 욕망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한반도가 지정학적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정학적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남북한 모두에게 지정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희년의 영성을 공부하면서 희년의 거시적 영적 안목에 감동하면서 엉뚱하게도 한반도 현실에 대한 거시적 안목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강론은 희년의 영성입니다. 희년의 정신이, 영성이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 정신은 예언자들을 통해,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통해서도 면면히 계승됨을 봅니다.
인간의 해방, 경제적 해방, 생태적 해방, 전분야를 망라한, 기후재난을 겪으며 위기를 맞고 있는 오늘날 참으로 구원의 영감을 제공하는 희년의 영성입니다. 50년마다 일어나는 희년의 주요목적은 공동체의 사회적 균형과 조화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1.개인적인 해방과 자유의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노예는 해방되어야 했습니다. 인간 모두의 해방이요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2.경제적 해방과 자유의 차원에서 모든 조상의 땅은 원래의 소유자에게 돌려 주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모든 사람은 가족의 땅으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생계가 가족 토지의 소유권에 의존하는 공동체에서 사회적 균형과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3.생태적 해방과 자유의 차원이 참신합니다. 너무 착취되어 고갈되는 자연에 온갖 과다한 쓰레기들로 수난을 겪는 땅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희년에는 씨를 뿌리거나, 난 것을 거두거나, 손질하지 않는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따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밭에서 직접 가져온 것만 먹을 수 있었고 다른 어떤 소산도 먹을 수 없습니다. 희년동안 밭은 휴경으로 땅도 휴식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레위기에서 소개되는 희년의 내용들입니다. 마지막 구절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너희는 동족끼리 속여서는 안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늘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이웃에게 정직하라는 말씀이요 하느님을 경외하며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라는 권고입니다.
참으로 작금의 불평등과 분열의 시대에 공존공생의 지혜를 제시하는 거시적 영적 안목을 주는 희년의 영성입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생태계 모두가 공존공생 더불어 살기위해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영성입니다. 땅도 쉬어야 하고 보호받아야 합니다. 더 이상 중병에 걸린 땅의 착취도 끝내고 살려내야 합니다. 지구의 종말은 인류의 종말입니다.
이런 희년의 영성은 고스란히 예언자 예수님을 통해 전수됩니다. 공생애에 앞서 나자렛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으로 희년을 선포하시는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흡사 출사표出師表처럼 들립니다. 예수님의 하늘 나라의 비전이 고스란히 담긴 희년의 영성입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결론 말씀이 동시에 오늘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루하루 희년의 영성을, 정의와 평화, 해방과 자유, 공존공생의 균형과 조화의 삶을 추구히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이런 정의와 평화의 삶을 추구하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의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통해 악의 실체가 어둠의 세력이 고스란히 폭로되고 있습니다. 헤로데, 헤로디아, 헤로디아의 딸 모두가 괴물이자 악마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이탈했을 때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악의 승리인 듯 하지만, 세례자 요한의 불행한 죽음으로 끝나는 듯 하지만 궁극엔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이 살아났다하며 불안으로 전전긍긍합니다. 마치 바톤 텃치처럼 세례자 요한의 뒤를 잇는 예수님이요 오늘까지 가톨릭교회를 통해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예언자의 전통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통해 살아 났고 오늘 우리를 통해 살아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의미심장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새삼 하느님의 전사로서 영적전의를 새로이 하여 세례자 요한의 몫까지 살 계획을 새로이 했을 예수님입니다. 희년의 영성을 통한 거시적 영적 안목과 현재 한반도 역사에 대한 거시적 현실적 안목이 참으로 절박한 시절입니다. 내부의 극단적 반목과 분열이 얼마나 어리석고 치명적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나라가 아무리 약하고 작아도 내적분열로 망했지 결코 외적의 침임으로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약하지도 작지도 않습니다. 원인은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하니 안에서부터 분열로 무너지면 속수무책 답이 없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거시적 영적 안목을 지니고 우리 모두 희년의 영성을 살게 합니다. 아멘.
----------------------------------------------------
230805.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런 것이다>
의가
불의에
죽지 않으니
의롭게
죽임 당한 이가
불의하게
죽인 이에게만은
되살아나는 것이다
의를
불의는
죽일 수 없으니
의롭게
죽임 당한 이를
불의하게
죽인 이만은
되살리는 것이다
----------------------------------------------------
230805.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마태 14,1-2)
앨리야가 다시 왔다고 믿은 이들
유대인들은 부활에 관한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 가운데는 틀린 것도 있었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죽은 이들이 부활한다는 것도 천사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런 것에 관한 말씀은 비유로 해석해야 하며 사실적으로 받이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활에 관한 유대인들의 견해 가운데 옳은 것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한 바리사이들의 견해인데, 그들은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제 헤로데와 유대 백성 일부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영혼에 관한 견해를 살펴봅시다. 그들은 헤로데에게 살해당한 요한이 목 베여 죽은 뒤에 다시 살아났다고 믿었습니다. 다시 살아난 그가 지금은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혜로데는 예수님께서 전에 요한이 지녔던 것과 같은 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한에게 있던 권능이 예수님께로 넘어갔으므로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다시 온다는 믿음이 이런 생각을 키웠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추론했습니다. 엘리야의 영과 권능이 돌아왔는데 그것이 요한이라고.
그래서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마태 11,14)라고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영은 요한에게 들어갈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헤로데는, 요한은 기적을 행한 적이 없는데도 요한이 세례와 가르침에서 보여 준 힘이 예수에게서는 기적과 같은 효과를 일으킨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야가 예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거나 예수님을 옛 예언자들 가운데 하나가 다시 살아난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추론했던 것입니다.
-오리게네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50가지 예수 모습 / 안셀름 그륀
49. 번번이 눈에서 사라지는 예수
영적 상담을 하다 보면 예수님과 개인적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사람들은 그동안 예수님을 소홀히 했다고 털어놓거나 언제부터인가 예수님과 소원해졌다고 넋두리한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친구로 지내려고 한다. 하지만 예수님을 친구로 삼는 데도 문제가 있다. 예수님을 독차지하고 예수님의 한 가지 모습만을 보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의 바람일 뿐 예수님의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님은 부활한 분으로서 우리와 함께 사신다. 우리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같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습을 보이자마자 시야에서 멀어진다. 그리고 우리만 혼자 남는다. 항상 우리 곁에 계시면서 삶과 사랑의 신비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모습에 우리 욕구가 반영되어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227)
----------------------------------
✝️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제5주간 영적 성찰 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요한 1서 전체
금주간 생태 행동
<생태 성찰 주간>
생태 실천 성찰
개인 혹은 공동체 차원에서 먼저 하루를 정해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당신은 하루에 어떤 덕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약한 덕 혹은 더 발전시키기를 원하는 덕을 계속해서 발전시켜가라. 용기, 자비, 사랑, 고귀함, 절제, 온유, 용서, 인내, 정직, 단순, 겸손, 순결, 진실 등의 덕을 하나씩 하나씩 발전시켜 가라. 한달에 하나씩 여러분이 원하는 덕을 선택하고 발전시켜가도록 노력하라.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들은 그러한 덕행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모든 덕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만일 여러분이 한 가지 덕 예를 들어 겸손을 선택하여 그 덕을 살아가려 한다면 다른 모든 덕도 같이 따라 발전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덕의 원천은 같기 때문이고 하느님의 다른 얼굴들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겸손을 선택한다면 자연적으로 여러분은 인내가 길러지고 용서가 생기고, 사랑이 생기게 될 것이다. 여러분들이 매일 같이 세상을 살리는 이와 같은 덕을 쌓아간다면 여러분 안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죄의 요소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