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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산파
출 1: 15-22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큰 일을 위해서 사용되어진 대부분의 사람들의 한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그들은 거의다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보면 그에게 특별나다는 구석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나이 80이 넘도록 자녀하나 생산하지 못하는 불임부부였지 않습니까? 고대에 아들이 없다는 것은 신의 저주처럼 여겼던 그런 시대에 이들이 이렇게 살았다는 것은 굉장한 스트레스였을 겁니다. 야곱, 하나님의 축복을 잔머리 굴려서 착취해볼려고 별 궁리를 다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제가 볼 때는 계획적이었던 것 같은데, 형이 늘 배고파 헐레벌떡 오니깐 그 타이밍 맞추어서 따끈따끈한 팥쭉 끌여놓고는 그걸로 장자명분을 사지않습니까? 너무 기분좋아서 보너스로 떡까지 같이 줬다고 성경에 나옵니다.
삼촌집에서 사기쳐서 동물들 싹쓰리해오고 말입니다. 요셉, 알다시피 엄마가 네명이나 되는 역기능가정에서 자랐던 인물이었습니다. 11번째 아들로 태어났고 아버지가 편애를 했기 때문에 오히려 형들의 미움을 받고, 게다가 고자질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 아니었습니까? 다윗 생각해봅시다. 사무엘이 기름부을 때에 식사자리에 초대조차 되지 못한 인물이었고 막둥이었습니다. 그냥 양이나 따라다니는 아버지 이새의 눈에 들지 않고 형들 눈에도 차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전쟁터에 도시락 들고 가니깐 하는 소리가 전쟁구경왔다고 평가받을 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사사시대에 귀하게 쓰임받은 사사들도 보십시요. 외손잡이를 쓰고 소모는 막대기로 사람을 죽이고 기드온 같은 경우는 포도주틀에서 타작하는 겁많은 사람이었고 연약한 여자를 사사로 쓰기도 하고 말입니다.
보세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평범할 정도가 아니라 소심하고 성품이 못되먹고 문제가 많은 자들까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만 보더라도 뭐 특이하게 걸출한 제목이라고 생각될 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평범한 그대로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들을 부르신 이유가 뭔가를 가만히 생각해보게됩니다. 그것이 뭐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어떠함에 의해서 자신의 어떠함이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에 하나님자신은 종속되지 않으시고 인간의 처지나 환경에 의해서 제한되지 않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들어 자신의 영광을 취하실 때에 항상 약자들을 들어서 사용하십니다. 뭔가 있고 재주가 있는 사람들도 있고 사회적 신분이 높은 자들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요 원칙이 있습니다. 강하고 힘있는 자들을 사용하실 때도 그냥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자고백을 하게 만들어서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극히 평범한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내가 평범하지 않고 범상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줄은 모르겠습니다만은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범상함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을 깨뜨리셔서 사용하십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데.. 여기에 인간의 가능성이나 인간의 재주가 능력으로 역사되어질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단지 믿는 것 뿐입니다. 믿음 마저도 하나님께서 그냥 주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자랑할 것이 없고 사람의 강함이 절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불러일으킬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십부라와 부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도 지극히 평범, 아니 평범보다도 굉장히 천한 느낌마저 드는 그런 사람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리를 별로 이 두 사람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산파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평범하기 때문에 그다지 위대한 업적을 남긴듯한 인상도 별로 주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별로 기억해주지를 않습니다. 모세는 기억하고 다윗은 기억해도 이 두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교사라는 자리가 이들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별로 폼도 나지 않고 일을 제일 많이 하면서 빛도 나지 않고 뭐가 거리워진 듯한 느낌을 많이 받게 되는 겁니다. 뭐 청년부나 전도회나 회장같은 거하고 이러면 좀 잘 드러나고 성가대를 하면 얼굴도 드러나고 얼마나 멋찝니까? 예배실에 줄을 지어서 폼나게 들어가면 빵빠레같은 찬양도 나오고... 좋잖아요. 가운도 있고.. 교사들은 가운도 없습니다. 예배당 들어갈 때에 팡파레같은 것도 없어요. 들어가자 말자. 왁작지걸한 아이들 붙들고 앉아라 조용해라 들어라 노래불러라 박수쳐라.. 뭐 이렇지 않습니까? 말은 얼마나 많이 해야됩니까? 성가대나 이런거는 함게 똑같이 부르니깐 시끄럽지 않은데.. 이건 수십개 반이 전부다 다른 나팔을 불기 때문에 시끄러워서 내 목소리를 키우지 않으면 안되지요. 주중에는 전화라도 한통해야되지요. 에너지 소비가 정말 많이 되는 일입니다.
폼나지 않는 산파하고 비슷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산파들을 통해서 위로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은 이 두 산파의 이름까지 기록하면서 모든 믿음의 후대들이 이들을 기억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십부라와 부아 뜻이 뭔줄 아십니까?
십브라는 맑음이라는 뜻이고 부아는 번쩍번쩍하다는 어근에서 나온 의미로 찬란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교사는 표시나지 않게 번쩍번쩍이는 자들이고 표나지 않고 맑은 자들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두 산파, 별로 있어보이지 않는 이 두사람을 통해서 교사들로서 가져야할 몇가지 영적교훈들을 누리고자합니다. 특별히 이들이 생명을 낳는 일을 하는 자드이라는 점에서 교사들이 가져야할 생명의 사역에 깊은 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저항정신입니다.
8절에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질문 던지겠습니까? 애굽의 바로가 요셉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절대로 아니라고 봅니다. 이 표현은 과거의 사실과 요셉을 몰랐다는 말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요셉을 무시했다는 의미입니다. 새 왕이라고 할 때에 ‘새’라는 말은 히브리어 하다쉬인데, ‘다른’의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왕이 새워졌다는 것이고 ‘일어나서’는 반대하여 일어났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결국 이 왕은 마치 앞의 왕조를 깨뜨리는 다른 왕조가 일어났다는 말과 같습니다. 학자들은 요셉 때는 힉소스왕조였는데, 뒤를 이은 애굽18왕조가 등장했고 이 왕이 그 중에서도 투트모세1세로 봅니다. 이 왕조가 뭘 반대해서 일어났겠습니까? 새 왕이 일어나서 바로 히브리 민족을 핍박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히브리 민족을 반대했겠습니까? 단순이 그런 문제가 아니구요. 히브리 민족과 함께 상생하면서 살아가는 애굽의 왕조를 반대하는 겁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요셉의 정신을 거부한 겁니다. 그리고 요셉을 거부한 것은 하나님을 거부한 것과 같습니다.
결국 뭡니까? 새로운 왕조를 뒤집은 투트모스1세는 뒤집혀진 생각을 가졌다는 겁니다. 그는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히브리 민족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기분 나빳습니다. 요셉의 정신이 싫었고 하나님의 방식이 싫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이렇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의 번성을 싫어합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길러내야하는 겁니다.
마귀가 하는 일이 딱 한가지를 말하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피고 살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를 죄로 몰어넣고 더러운 문화에 문들게 하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녀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합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을 세상의 힘으로 죽일려고 합니다.
보세요. 16절에 아들을 낳으면 죽여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이 번성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류창조 이후의 사명인데, 생육과 번성을 막아버립니다.
이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저항정신입니다. 이 세대의 흐름을 반대하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십부라와 부아는 이런 저항정신이 있었습니다. 신과같은 바로가 명했는데, 이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 아닙니까? 바로를 상대로 저항한다고 되는 일이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보세요. 지금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약점이 뭡니까? 세상에 들어갔을 때에 저항할 능력이 부재되어 있다는 겁니다. 원래 개신교 프로테스탄트는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입니다. 중세1000년 동안에 말씀과 동떨어졌던 기독교에 성경을 펼쳐들고 다시 돌아가자고 저항했지 않습니까?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일려고 안들인데, 이런 시대적 정신을 거부하고 저항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사사시대의 마지막 시대를 살았던 사람인데, 그 시대가 사사마저 타락한 시대 아닙니까? 마지막 사사에 해당하는 엘리 보세요. 성전에서 제사를 더럽히는 아들들을 말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방식을 취하는 아들을 보고도 제사장이면서 사사였던 그가 거부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습니다. 살만 뒤룩뒤룩쪄서 영적비만에 빠졌고 기도하는 한나를 술먹었고 평가하는 영적안질에 걸려서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는 분별력이 막혀버린 사람이었습니다. 한나가 왜 아이를 달라고 했습니까? 단순이 자식없는 설움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시대의 흐름을 아파하고 시대의 질병을 저항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나에게 아이를 주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하면서 나실인의 서원,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을 서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무엘을 얻었을 때에 그를 어떻게 합니까? 젖떼기를 기다렸다고 하나님의 성전에 보내버립니다. 하나님께 드립니다. 사무엘의 이름이 하나님게 구했다는 뜻 아닙니까? 그 시대가 하나님 찾지 않는 것에 저항하는 이름입니다.
우리는 이런 저항정신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저항하면서 우리들에게 맡겨지 학생들을 정말 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런 저항정신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17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고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저항정신이 발생한 것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왕이고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보잘것 없는 사람입니다. 이 둘이 싸우면 누가 더 강합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산파가 더 강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한 사람이 있으면 한 나라와 싸워서 이길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11:33절에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라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한 사람이 있으면 나라도 이깁니다. 바로도 이기고 왕도 이깁니다. 하나님 두려워하는 것이 이런 겁니다. 세상의 논리와 힘을 NO라고 부정하는 것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거부권을 행사하고 당당히 거절하고 당연히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 안에 시대의 뒤집어진 가치 앞에서 저항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다른 거 하나도 없어도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만 있으면 내 자신을 유지시켜줄 데이터가 바닥나더라도 세상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뜻을 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들이 뜻을 정했다는 말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애굽왕의 말을 거역한 것은 그냥 마음에 감동이 되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뜻을 정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뜻을 정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뜻없이 살아가고 역전된 가치, 뒤집어진 세상속에서 뒤집어진 채로 살아가는 이유가 뭔줄 아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왜 힘없이 살아가는 줄 아십니까? 뜻을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부딪힐 때에 미리 준비해야할 것이 뜻을 결정하는 겁니다. 지금 당장에 뜻을 결정해야합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들이 바벨론 땅에 포로로 갔을 때에 제일 먼저 했던 것이 뭡니까? 뜻을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정하는 자에게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주시는 줄 아십니까? 다니엘 1:9절에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고 합니다. 은혜와 긍휼입니다. 이건 오늘 산파들이 뜻을 정했을 때에도 똑같이 주신 축복입니다. 20절에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뜻을 정하면 은혜를 주십니다. 이것과 함께 성경은 한가지 더 기록합니다. 1장 21절을 보십시요.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고 합니다. 여기에 경외하다는 말과 앞에 살핀 두려워하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같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함으로 뜻을 정했을 때에 어떤 축복을 받았습니까? 왕성함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뜻을 정했을 때에 어떤 복이 임합니까? 히브리 소년들이 바벨론 땅 한복판에서 왕성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왕성하다는 말의 원래의 의미가 뭐냐하면 확립하다, 기반을 잡다, 이런 단어입니다.
왕성함이 뭡니까? 무작정 번창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성함이란 불편한 세상속에 들어가서 그들 속에서 자리를 틀어 잡는 것입니다.
둘째, 사명정신입니다.
십부라와 부아가 하는 일이 뭡니까? 아이받는 일입니다. 이들은 아 받는 일 외에는 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사명으로 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밥벌이로 아이를 받았다고 하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생존만을 위해서 살아가면 뭐든지 합니다. 이게 세상의 뒤집어진 가치입니다. 생존, 잘 먹고 즐기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세상의 뒤집어진 가치입니다.
이런 뒤집어진 가치와 맞서서 싸울 수 있는 무기가 뭡니까? 사명입니다. 사명이 무기입니다. 사명은 생존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을 위해 사는 자들이 아이들을 죽일 수 있습니까? 못하는 겁니다. 사명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은 아무리 시시해보이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거기에 혼을 불어넣습니다. 시시한 일 같아도 사명으로 하기 시작하면, 그 일에 최선을 다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시시한 일로 세상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보세요. 바로가 죽여라고 했지만 두 산파는 사명으로 아이들을 받았습니다. 약한 두 산파가 애굽의 정신, 뒤집어지고 파괴되어진 이 정신을 사명정신으로 다스립니다.
여러분 한 가지만이라도 자신의 하는일에 최선을 다 해보십시요. 그리고 그 일을 사명으로 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강해집니다. 무시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터치할 수 없는 능력이 길러지는 법입니다.
출애굽의 역사의 시작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이 두여자의 아이 받는 일 때문에 일어난 겁니다. 이들이 아이들을 살리지 않았으면 출애굽 역사의 모세도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모세는 그래서 이 두여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명이 있으면 출애굽은 시작되어집니다. 세상의 죄악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명을 사명을 다해서 지키고 보호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손에 의해서 받아진 생명들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킬 줄 믿습니다.
셋째, 희생정신입니다.
이 두여자는 생명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 누굽니까? 죽음을 이긴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이긴 자들 아닙니까?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두 산파가 왕의 명을 어겼습니다. 이유는 한가지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행하는데 목숨을 건 베팅을 한 겁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돌아보십니다. 이런 자를 살려주십니다. 무릇 죽으려 하는 자는 살것이고 살려고 하는 자는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면 이런 희생, 생명을 걸고 이런 일을 했을까요? 생명에 대한 애착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명을 거는 모든 사람들은 생명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의 대한 애착이 없으면 어떻게 산파를 하고 어떻게 아이를 받겠습니까? 이들은 적어도 히브리민족 중의 최고의 산파입니다.
여러분 어떤 교사가 최고의 교사입니까? 생명에 대한 애착이 있는 자입니다. 이 생명애착의 정신이 있으면 희생정신도 나오고 투자도 나오고 아이들에게 최고의 것을 먹이기 위해서 시간도 투자하고 물질도 투자하고 방법론도 연구하고 희생적으로 움직이게 되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런자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자들을 돌아봐야할 것같습니다.
여러분 우리안에 이런 생명에 대한 강력한 애착심이 회복되어지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보세요. 하나님이 희생하는 이들을 어떻게 돌아보시는 가 보세요. 19절에 산파들이 바로가 왜 남자를 살렸냐고 물을 때에,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고 합니다. 무슨 이야깁니까? 혼자서 아이들 다 낳아버리더라는 겁니다. 말그대로 하자면 순풍순풍 놓았다는 뜻입니다. 자기들이 가기도 전에 말입니다. 아를 한 둘 놓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100% 다 스스로 다 놓겠습니까? 말이 안되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리고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라고합니다. 히브리 여인은 강하고 애굽여자는 약해빠졌다는 아주 기분 나쁜 이야기입니다. 안그래도 히브리 민족이 너무 번창하고 강해서 없애버릴려고 하는데, 성질 돋구는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런데 뒤에 바로가 어떻다 저떻다 이야기가 없습니다. 히브리 여인은 별로 말이 안되는 거짓말을 했고, 확률상 데이터가 거의 없는 이야기를 함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거기에 속아 넘어갑니다. 여러분 웃기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바로가 바봅니까? 답은 20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이게 답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바로가 분위기 파악못하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명에 목숨을 걸면, 유치해보이고 시시해보이는 어떤 일이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일이라 여기며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그것을 사용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세상을 바보로 만들어 버립니다. 말도 안되는 거짓말 앞에도 눈이 가리워지고 생각이 어두워 져서 하나님의 사람을 해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적산파들입니다. 별로 표시나지 않는 일을 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 스스로 거대한 일을 별로 할 수 없을 만큼 미약한 자들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히브리 산파의 정신은 애굽의 정신을 이기고 출애굽의 역사의 기초를 놓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같이 약한자들도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의 도구로 사용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기르고 양육하는 아이들이 모세가 되고 사무엘이되고 다윗이 되어서 세상의 흐름을 주도하는 세력들이 될 줄 믿습니다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출 1: 15-22
출애굽기 1장 20-21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
를 베푸시니라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며, 산파는 하나님
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 지라"는 말씀
이 있습니다. 신약의 본문 요 1: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
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오늘 이 말씀을 중심해서 "은혜를 베푸시
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21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고 하셨는
데 이 말씀의 원어의 의미를 보면, 야타브( )라는 단어를 사용했는
데 그 뜻은, 좋다, 훌륭하다, 아름답다, 즐겁다, 라는 뜻이며 이것이
히필형으로 쓰일 때는 잘하다, 훌륭하게 하다, 호의를 베풀다, 기쁘게
하다, 조절하다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에 산파들이 이 은혜를 받았는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사람의 말 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스
라엘 사람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강대해지므로 애굽의 왕 바로는 고
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바로는 정책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인 히브리
민족이 아이를 낳을 때 산파들을 시켜서 남자가 태어나면 무조건 죽
이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명령을 받은 히브리 산파인 십브라와 브아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아이를 모두 살려 주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여간 힘든 것
이 아닙니다. 왕의 명령을 어긴다는 것은 목숨을 내건 행동이었습니
다.
그렇지만 히브리 산파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음은 진리의 편에 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이와 같은 입장에 처할 때가 많습니
다. 결정적인 시기에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판단 기준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야 합니다. 진리
의 기준에 서야합니다. 인정 사정 체면에 얽매이지 말고 그 말이 진
리인가 아닌가? 그 일이 진리인가 아닌가? 에 대하여 가치기준을 두
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5장 28-29절에 보면, "예수이름을 가르치지도 말고
전하지도 말라는 대 제사장의 말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
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면서 복음을
전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옳습니다. 우리에게 명령하는 이가 비록
왕일지라도 아니 왕보다 더 높은 이일지라도 그의 명령이 그의 요구
가 진리가 아니면 거절할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할렐루야!
둘째로, 살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히브리 산파인 십브라와 브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은 생명을
살리는 일에 가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죽이는 일에는 절대로 가담하기보다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비록 죽이는 일에 가담은 하지 않더라도 방관해
서도 안됩니다. 몇 년 전에 캐나다에 갔을 때에 록키산맥을 넘으면서
가이드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고속도로나 지방도로나 어디서든지 고장난 차가 있는 것을 보고서도
도와주지 않고 그냥 지나가면 그는 살인에 가까운 처벌을 받는다는
이야깁니다. 그 이유는 그를 도와주지 않음으로 그곳에서 얼어죽거나
굶어 죽거나 짐승에 물려 죽으면 그 책임이 방관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와 같이 어려운 순간에 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히브리 산파들이 하나님께 복 받은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
다. 생명을 살렸다는 것입니다. 우리주변에 우리가 살려야할 죽어 가
는 영혼들이 많습니다.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해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
하시고 가장 사랑하시고 그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복을 주십니다.
셋째로, 그들은 이름 값을 했습니다.
산파라는 원문을 보면, 얄라드(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 뜻
은 기본어근은 '새끼를 낳다' 사역동사로는 '낳게 하다' 의학적으로는
'산파의 일을 하게 하다' 이것이 피엘 형으로 쓰일 때는 '조산하다'
'조산을 돕다'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해산을 하던지 아니면 해
산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십브라는 기쁘게 하다, 빛나게 되다, 아름답다는 뜻이고, 브아는 번
쩍번쩍하다’'찬란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정말 이름대로 살았습
니다. 우리 모두가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므로 이와 같은 영광을
누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넷째로,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였음으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경외라는 말은 야레( )라는
말인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는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섬겨야 합
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집을 왕성케 하십니다. 왕성이 라
는 말은 원어로 아싸( )라는 말인데 성취하다, 제공하다, 일으키
다, 공급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왕성해지는 복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신약의 본문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
다. 예수님의 곧 우리의 은혜입니다. 그분을 믿고 섬기는 이는 누구나
은혜를 받습니다.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은혜 주시기를 원하십니
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승
천하시고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
시는 은혜는 영원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세의 일생
출 1: 15-22
이 시간은 모세 자신의 이야기보다도 모세가 태어나는 일에 수고했던 히브리 산파들의 결정적인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우리가 한 인물을 이해하려면 그 시대를 알아야 됩니다. 이순신을 알려면 이순신 장군이 살았던 그 시대를 알아야 됩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시대와 인물과 과업을 함께 준비합니다. 시대를 정하고 인물을 대비하시고 과업을 주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운행해 가십니다. 모세가 태어나는 그 시대는 구속사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의 언약이 성취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애굽에 가서 종살이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백년 후에 그 백성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백년이 되는 시기가 모세가 태어나던 바로 그 시기입니다.
선의의 거짓말
그러므로 모세는 그 시대를 위해서 예비된 사람입니다. 그 시대의 해결사가 바로 모세인데 모세가 태어나는 그 시대에 대단히 어려운 환경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핍박하는 극한점에 달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점점 번성하고 수가 많아져 가니까 바로왕은 극한 처방을 내렸습니다. "이스라엘에 남자아이가 나면 다 강에 던져 죽이라. 여자아이는 살려 주라." 이것이 산파들에게 내린 어명으로 안지키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남자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죽어야 되는 운명에 처해 있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수의 이스라엘 남자아이들이 희생이 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히브리 산파들이 그 위기를 극복하는 용기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것을 두고 "선한 거짓말"(white lie)이라 하는 말을 만들어 냈습니다. 어거스틴이 이 선한 거짓말에 대한 아주 흥미 있는 글을 썼습니다. 히브리 산파들은 분명히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거짓말이 선한 거짓말입니다. 그러면 이 히브리 산파들의 거짓말은 사실은 지금 태어나는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한 거짓말이지만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보면 모세를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모세를 살리기 위해서 히브리 산파들에게 하나님이 그런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모세가 그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모세의 출산을 돕는 산파가 어명을 지킨다면 모세도 죽어야 되지만 왕명을 거역하는 이 히브리 산파들의 용기는 대단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애굽왕이 산파들을 불러서 "너희들이 왜 이스라엘에 남자아이들을 죽이지 않느냐" 라고 국문을 했는데 그 때 산파들이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강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완전한 거짓말입니다. 왕 앞에 가서 했던 이 말은 지어낸 거짓말입니다. 산파들이 했던 거짓말은 학문적으로 선한 거짓말입니다. 이 거짓말은 반드시 두 가지 조건이 따라야 됩니다. 이 두 가지 조건에 부합한다면 선한 거짓말은 하나님이 허용하신다는 원리가 됩니다.
두 가지 조건
첫째 생명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거짓말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때문에 거짓말을 했느냐 하는 그 가치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거짓말 자체를 능가하는 가치가 바로 생명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의사가 환자에게 선한 거짓말을 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환자를 살리려고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리려는 의도로 거짓말을 하는 것은 하나의 조건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이 거짓말이 타인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유익입니다. 내 욕심을 이루는 거짓말이 아니고 나는 손해를 보더라도 타인을 살리기 위한 선한 거짓말에 요구되는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쉰들러 라는 사람은 유대인을 살리기 위해서 수많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유대인들을 살렸습니다. 독일 나찌시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예수믿는 사람 집에 독일 나찌가 수색을 하러 왔습니다. "이 집에 유대인이 숨어 있지?" 하고 내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 집에는 실제로 유대인 한 사람을 숨겨두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이 이 집에 있지? 빨리 내놓아!" 하고 다그치는데 참으로 곤란하였습니다. 거짓말을 해야 살릴 수 있는데 거짓말을 안하고 어떻게 살리는 법이 없을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대책이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협박을 합니다. 총을 빼들고는 "유대인을 내놓아." 그때 이 사람에게 번뜩 어떤 지혜가 하나 스쳐 갔습니다. 책상을 꽝 치면서 "여기는 유대인이 없소"라고 하였습니다. 하도 강하게 나오니까 알았다면서 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거짓말을 한 가책에서 벗어났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책상을 치면서 "책상 위에는 유대인이 없다"라고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거짓말하는 상황이 생명의 가치를 위해서 거짓말한 사례가 성경에 몇 번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이 산파의 거짓말도 있지만 기생 라합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거짓말은 보편적인 거짓말은 아닙니다.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는 거짓말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제9계명과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런 거짓말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에게 한번 하도록 허용하는 거짓말이지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잘못되게 하는 거짓말은 결코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히브리 산파들의 거짓말은 거짓말이라는 말로 해석을 하면 안됩니다. 히브리 산파들의 이 거짓말은 무슨 의미를 가집니까? 믿음의 용기입니다. 왜 믿음의 용기인지 본문에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17절에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바로 이것입니다. 히브리 여인들이 거짓말을 한 것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믿음, 여호와를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1절에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믿음의 용기가 거짓말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산파들의 이 용기는 오늘 우리에게 참 필요합니다. 믿음에는 용기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 산파들의 이런 믿음은 막연한 믿음이 아닙니다. 사람을 살려야 되겠다는 단순한 휴머니티가 아닙니다. 인본주의가 아닙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했다", "여호와를 경외했다"라고 하는 이 말에는 반드시 언약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그 약속 앞에서 내가 응답한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약속, 하나님의 약속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 약속을 붙잡고 내가 이런 용기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내가 가진 상황, 여건, 환경 등을 가지고 반응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반응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반응을 하지 않고 그저 가볍게 내 입장에서 반응해 버리면 거기에서는 믿음의 용기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용기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산파들이 남자아이를 살리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아이들을 살려 왕성하게 해서 큰 민족을 이루어서 마침내 이 땅을 떠나게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13, 14절에서 "아브라함 자손들이 타국에 가서 객이 되었다가 사백년 만에 큰 민족을 이루어서 그 땅에 모든 보물과 재물을 가지고 다 나올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보고 사백년 후에 이스라엘 민족의 언약을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의 언약을 믿고 있는 자들이 히브리 산파들입니다. 큰 민족을 이루는 일에 이 산파들은 복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을 믿는 용기
모세의 족보를 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레위 자손 중에도 언약궤를 섬기는 고핫 자손이 있습니다. 고핫 자손 계열로 아므람과 요게벳이 낫습니다. 모세 아버지가 아므람이고 어머니가 요게벳인데 레위 족속 가운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을 하여 낳은 아들이 모세입니다. 언약의 아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이 죽일 수 없는 아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반드시 살리시려고 하는 아들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있는 히브리 산파들의 믿음입니다.
용기는 '무엇을 붙잡는가?' 라는 데에 용기의 질이 매여 있습니다. 여러분, 큰소리 치는 사람 중에 막연하게 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엇인가 힘을 의지하고 치게 됩니다. 용기가 있습니다. 성도의 용기는 관계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이 나의 삶 속에서 연관을 맺고 있을 때 용기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용기를 발휘하려고 할 때에 현실은 자꾸 우리 믿음을 속입니다. 여러분, 현실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현실은 우리 믿음을 속인다는 것을 아시고 현실과 타협하기 바랍니다. 믿음에 보탬이 되는 현실은 없습니다. 현실은 언제나 우리의 믿음을 속입니다. 현실을 따라가면 믿음은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현실을 우리가 배제하거나 무시하지 못합니다. 다만 히브리 산파들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그 현실을 대처해야 됩니다. 왕명을 어기면 목숨을 걸어야 되는 그 위험한 상황에서도 히브리 산파들이 그 현실에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어떻습니까?
20절에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하나님이 히브리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답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우리 현실을 믿음으로 감당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투를 위한 은혜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너희가 시험 당할 즈음에 하나님이 피할 길을 주시고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라는 그 은혜의 실체가 대단히 신비로운 것입니다. 히브리 산파들이 받았던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 은혜는 또 다른 전투를 요구하는 은혜입니다. 히브리 산파들이 은혜를 받고 자신들의 안일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의 남자아이들을 살려내는 용기를 발휘해야 하는 사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히브리 산파들의 이 용기가 모세를 살리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라는 한 인물이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세를 살리는 일에 히브리 산파들을 동원했고 그 부모는 특별히 하나님이 레위 자손 중에서 남자와 여자를 뽑아서 결혼을 시켰고, 또 이 어머니가 모세를 살리기 위해서 강에 모세를 띄워 보낼 때에도 갈 상자를 만들어서 그 누이 미리암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고, 그 모세가 강물에 띄워지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살려주실 줄을 믿고 있는 그 부모들의 믿음을 보게 됩니다.
인간이 계획하지 아니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침 그 시간에 애굽의 바로의 공주가 하숫가를 거닐면서 산보를 하다가 모세가 담긴 상자를 보게 됩니다. 그 당시에 애굽에는 궁내에 유명한 목욕시설이 있었고 한 낮에 공주가 강에 목욕을 하러 나오는 전례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주가 그 날은 어찌하여 강가에 시녀들을 거느리고 목욕하러 나왔다가 모세가 담긴 상자를 보게 됩니다. 이건 우리편의 이야기이지만 배후에 여호와 하나님이 연출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상자를 가져오라고 해서 열어보니까 한 남자아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이가 우는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연출
여러 가지로 가상할 수가 있습니다. 이 천진난만한 아이는 상자에 뉘어져 강물에 떠 있으면 편안해서 대부분 잘 수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애는 심리적으로 불안해서 울 수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상황이 얼마든지 아이들에게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상자를 열 때에 울었습니다. 저는 그 대목을 보면서 하나님이 그 순간에 울리셨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울리신 것입니다.
모세가 왜 그 순간에 울어야 되느냐 하면 공주의 모성애를 발동시키기 위해서는 울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인의 감성은 아기들의 울음에 민감하다고 합니다. 모세가 우는 그 순간에 이 공주는 아이를 자기 아이로 삼을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버리지 않고 집으로 데리고 오는 순간 미리암이 망을 보고 있다가 나가서 공주에게 즉시에 가장 적절한 말을 했습니다. "공주님! 제가 유모를 한 사람 잘 아는데 소개해 드릴까요?" 당장 유모가 필요한 상황에 이 아이가 나와서 유모를 안다고 하니까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어머니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생모를 붙여 주었습니다. 누구의 솜씨입니까? 하나님의 솜씨입니다.
한 사람을 모세로 만들기 위해서 태어날 때부터 모세 주변에 일했던 이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산파들이나 모세 어머니나 그 모세의 누이나 모세가 바로왕의 궁중에 들어가서 공주의 아들로서 자라도록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믿음의 용기가 결집되어 있습니다. 모세를 살리기 위해서 동원된 그 사람들은 모두가 믿음의 결정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정력이라고 하는 것은 행동과 직결되는 용어를 말합니다.
골 결정력
월드컵 조 추점행사를 부산에서 했는데 저는 아쉽게도 조 추첨하는 장면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 추첨하는 시간에 예배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상대자들을 보니까 우리 한국이 16강에 들기가 대단히 힘들겠다는 평가를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포르투갈이나 폴란드 이런 나라들은 전통적으로 축구를 잘하는 나라이지만 이번에 유럽에서 예선전 할 때도 자기 조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1등을 한 나라들입니다. 우리는 이제 겨우 한번 들어가려고 목을 메는데 미국과 이런 나라들은 16강에 벌써 들어갔던 나라들입니다. 아무리 봐도 우리보다 강팀들입니다. 그래서 힘들겠다고 약간 근심을 하면서도 그래도 '해 봐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일본은 잔치집 분위기라고 합니다. 지금 일본은 느긋해 하고 감독이 막 웃고 있습니다. 투르시에 감독이 웃음이 만발하였습니다. 벨기에, 러시아, 튀니지와 한 조가 되었는데 사실 객관적으로 볼 때 벨기에와 튀니지는 예선전할 때 겨우 턱걸이를 했습니다. 마지막 경기 때에 이들이 떨어지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에서 안될 것 같았는데 다행히도 올라왔던 팀들입니다. 그런 팀들과 한 조가 되었으니 웃을 만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 힘들겠다"라며 약간 근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축구경기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많이 보아서 알지만 월드컵에 나오는 32강 국가대표팀들은 사실상 실력 차이가 크게는 없습니다. 게임 붙여 놓으면 어떤 날은 이쪽이 잘하고 어떤 날은 저쪽이 잘하고 그런 것이지 월등하게 실력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도 축구를 곧잘 합니다. 우리와 붙게 될 다른 팀들과 우리 나라를 비교할 때 저는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봅니다. 다 잘하는데 차이가 어디에 나느냐 하면 하나밖에 없습니다. 한 경기를 할 때에 찬스는 우리 나라 팀에도 많이 옵니다. 찬스가 오지 않아서 지는 것이 아닙니다. 찬스는 반드시 옵니다. 그러나 차이는 그 찬스를 살리는 '골 결정력'의 차이입니다. 저쪽 팀은 기회만 오면 골이 들어갈 확률이 다섯 개 중에 두 개라고 하면 우리는 열 개중에 한 개도 안됩니다. 이것이 가장 큰 차이입니다.
운동장에서 뛸 때 보면 차이가 없습니다. 패스할 때도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 나라 선수도 헤딩을 잘합니다. 우리 나라 선수도 발 재간이 있습니다. 잘 합니다. 그런데 골 결정력에서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한번도 이겨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월드컵에 나가서 지금까지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이기는 것은 물론이고 16강에 반드시 올라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6월 달에 민족적으로 초상이 날 것입니다. 이웃나라 일본은 16강에 올라갔는데 우리는 상대적으로 떨어지면 그것도 안됩니다. 올라가려면 같이 올라가야 하고 그 집은 8강까지 가더라도 우리는 16강까지라도 가야 합니다. 어떻게든 올라가야 되는데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스포츠만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그렇습니다.
신앙의 결정력
신앙생활은 항상 골인시키는 그런 운동경기가 아닙니다. 우리 일생의 신앙생활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의 순간을 하나님이 자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결정적인 이 때에 네가 결단을 하라고 기회를 주십니다. 그 때에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응답을 해야 됩니다. 그것이 내 생애를 좌우합니다. 이것은 모세의 생애를 보던지,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던지, 다윗의 생애를 보던지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는 성공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사람 이야기도 있습니다. 실패한 사람과 성공한 사람의 공통점이 그것입니다. 왜 성공하고 왜 실패합니까? 사울과 다윗을 견주어봐도 이스라엘의 왕과 유다의 믿음의 왕들을 견주어 보아도 똑 같습니다. 베드로와 가롯 유다를 비교해 보아도, 가인과 아벨을 비교해 보아도, 에서와 야곱을 비교해 보아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쪽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응답하는데 성공을 했고, 한쪽은 불신앙으로 거역하는데 성공을 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의 인생의 승패가 난 것입니다. 모세가 이 땅에 태어나기 위해서 히브리 산파들이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순종했던 이 믿음의 결정력을 우리가 배워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 산파의 이 믿음의 응답은 우리가 물려받아야 될 유산입니다. 이런 것들을 살리는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예수를 한 평생 믿고 우리가 간증을 할 때마다 이런 히브리 산파들의 믿음으로 결정력을 가지고 응답했던 대목들을 간증해야 간증다운 간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기본 환경이 전부 대립현상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전부 대립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문명의 충돌」이라는 유명한 글을 쓴 사람의 예언이 지금 맞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과 아프간 전쟁이 문명의 충돌입니다. 이슬람과 문명의 충돌입니다. 그러면 지금 이슬람과 미국이 충돌하는 여기에 우리는 어느 편입니까? 사실은 우리는 아시아 문명권에 속해 있습니다. 문명의 관점에서 볼 때는 미국편을 들 수 없는 현상도 있습니다. 아시아에 이슬람이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슬람의 심지를 건드리면 우리 생존에도 크게 영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지금 문명적으로는 우리가 어느 편이냐고 할 때에 애매합니다.
기본적으로 이 세상은 문명의 대립이 있고 이념의 대립이 있고 정치적인 대립이 있지만 그 중에 영구불변한 대립이 있다면 그것은 선과 악의 대립입니다. 지금 미국이 아프간 전쟁을 하면서 돈을 얼마나 소모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하루에 제일 많이 소모할 때가 일억오천만불입니다. 전투기 한대가 떠서 출격을 하면 오십만불이 소모가 된답니다. 그런데 처음에 매일 백대의 전투기가 출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날은 공격을 좀 적게 하고 어떤 날은 많이 합니다. 이것을 평균으로 따져 보면 하루에 전쟁비용이 우리 나라 돈으로 이백 억씩 전쟁비용이 쓰여지고 있답니다. 선과 악의 대립인데 걸프전에서도 미국이 칠백이십억불을 썼답니다. 그런데 이 아프간 전쟁에선 앞으로 얼마나 더 쓸지 예측을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대립현상입니다. 지금 인천공항에는 비행기가 뜨고 앉을 때에 새가 방해를 준다고 해서 새를 쫓는데 부대가 동원되고 있습니다. 새를 쫓기 위해서 새하고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대립현상입니다. 지금 이 시대가 그렇습니다.
알고 보면 같은 의자에 예배를 드리는 우리끼리도 한쪽이 사탄에게 미혹이 될 때 나와 대립의 관계로 형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면 우리가 대립의 관계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도 반갑지도 않고 감사할 생각도 없고 사랑하지도 않고 그렇습니다. 누굴 만나든 인사를 해도 자연스럽도록 살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맺는 말
대립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마귀가 우리를 삼키려 하고 악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는 이 대립 현상의 환경에서 히브리 산파와 바로의 어명이 대립하고 있는 그 환경 속에서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며 믿음의 결정력을 나타내야 합니다. 산파가 아이들을 살리는 것은 행동이지 말이 아닙니다. 목숨을 건 행동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것이 필요합니다. 말의 고백이 아니라 히브리 산파의 아이를 강물에 던지지 않고 살리는 그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행동이 믿음의 결정력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결정력이 있는 그곳에 모세라는 인물이 키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결정력을 발휘해야만 하나님이 의도하는 어떤 목적을 성취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 산파들의 믿음의 결정력을 우리가 배우기를 바랍니다.
히브리 산파들의 신앙
출 1: 15-22
히브리 민족에게 강제노동을 시켜서 그 인구를 감소시키려고 했던 정책이 실패하게 되자 애굽 왕 바로는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를 불러서,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아이를 낳거든 무조건 죽이라!"는 반인륜적이고 극악무도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아이를 살렸습니다.
히브리 산파들의 신앙, 그 얼마나 위대한 신앙입니까? '십브라'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이고 '부아'는 '찬란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름만큼이나 복된 믿음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그들의 신앙을 좀더 자세히 배우고, 우리도 그런 믿음을 가지고 이 말세를 이겨나가는 참된 신자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히브리 산파들의 신앙은 어떤 신앙이었으며 그러한 신앙으로 산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1. 히브리 산파들의 신앙
1) 인간의 법보다 하나님의 법을 먼저 좇았습니다.
인간의 법이 하나님의 법을 거스를 때는 하나님의 법을 먼저 좇아야 합니다. 15, 16절에 보면, 애굽 왕 바로는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에게 새로 태어나는 히브리 남아를 살해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러한 바로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으로 반드시 지켜야만 했습니다. 만일 히브리 산파들이 바로의 명령을 거스른다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17절에서 보듯이 히브리 산파들은 바로의 명령을 어기고 히브리 남아들을 살렸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것은 바로의 명령이 하나님의 법을 거스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히브리 산파들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 위해 생명을 걸고 인간의 법을 거스른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은 인간의 법이 하나님의 법을 거스를 때에는 하나님의 법을 먼저 좇아야 합니다. 물론 성도는 합법적인 권위에 의한 권세자의 정당한 명령에는 마땅히 순복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왔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러한 세상 권세자를 통해 공의와 세상의 질서를 세워 나가시기 때문입니다(롬 13:1-7). 그러나 성도는 비록 합법적인 권위에 의해 세워진 권세자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법을 거스를 때에는 과감하게 인간의 법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근거를 성경의 위대한 믿음의 인물들의 행적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을 죽이려는 아비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윗을 위기에서 구해 주었습니다(삼상 19:5). 또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에게 절하라는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을 거부하며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단 3:7). 다니엘도 그의 기도를 중단하라는 다리오의 명령에 불복하였습니다(단 6:10-13). 이러한 실례들은 우리가 인간의 법보다 하나님의 법을 먼저 좇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합법적인 방법으로 권세를 이룬 권세자의 말에 순복하십시오. 그러나 비록 합법적인 권세자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법을 거스를 때에는 먼저 하나님의 법을 따르십시오. 물론 우리가 인간의 법보다 하나님의 법을 먼저 따를 때에는 고난을 받게 될 수도 있고 심한 경우에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브라와 부아와 같이 설령 생명을 잃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 준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모든 권세자의 위에 계신 분으로 모든 권세의 근원이 되실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인간의 생사화복의 진정한 결정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행 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 애굽 왕 바로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여기 "두려워하여(17)"라는 말(히. 티레나)은 단순한 공포감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한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그랜드> 성도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새로 출생하는 히브리 남아를 살해하도록 지시한 바로왕의 명령은 당시 절대 군주 국가였던 애굽에서는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거스를 시에는 죽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산파들은 바로의 명령을 어기고 히브리인 남아들을 살렸습니다(17). 왜 그랬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인간보다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히브리 산파들은 한 나라의 절대 군주였던 바로보다 만 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로서 만물의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기에 하나님의 뜻을 살피어 바로의 명을 거스르면서까지 새로 태어나는 히브리 남아들을 살렸던 것입니다. 결국 인간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한 히브리 산파들의 신앙적인 행동은 이스라엘을 번성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렸고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20, 21).
이와 같이 만물의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은 인간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벌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교훈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히브리 산파들과 같이 인간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함으로 인간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준해하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2. 히브리 산파들이 그러한 신앙으로 산 결과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는 바로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아이들을 살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족을 위해 죽기를 각오한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명을 거스른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집이 더욱 왕성케 되는 축복까지 받았습니다(20, 21).
오히려 그렇게 잔인한 명령을 내렸던 바로 왕과 애굽인들은 훗날 10번째 재앙으로 모든 애굽의 장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보응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12:29, 30).
히브리 산파들이 세상 권력자에게는 매우 괘씸한 여인들이었지만, 하나님께는 아주 사랑스런 여인들이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셨고, 백성들에게는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케 하셨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경외한 그 산파들의 집을 왕성케 하셨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길을 따른 행동은 반드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소리를 더 크게 듣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특히, 목숨뿐만 아니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보다 세상 권세를 더 무서워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 자신의 안위와 이해 관계를 더욱 중요시하고, 또 우선시합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의 결과는 책망과 징계요, 그래도 깨닫고 회개치 않으면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벧전 5:7절에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마 10:28절에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때로 한순간의 신앙적 결단이 이 세상에서의 복은 물론, 영생의 복을 누리게 해 줍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지존파들이 감옥 속에서 이 아무개 집사님이 보내는 영치금과 끈질긴 전도 편지를 받다가 결국 지혜로운 결단을 내려 뒤늦게 주님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흉악한 죄인들에게 죄 사함과 더불어 영생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교도소 안에서 얼마나 열심히 전도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리하여 많은 죄수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나 같은 살인마도 예수님이 사랑하셔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까지 사랑한 예수님을 믿지 않으시렵니까?"
이 애끓는 호소로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도소의 재소자 ⅔를 전도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사람을 6명이나 죽인 살인마 고재봉입니다.
에스더 왕후도 그랬습니다. 그녀는 멸절의 위기에 처한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에 4:16) 왕 앞에 나아갔을 때 민족도 구원하고 자신도 사는 것은 물론 더욱 존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살뿐만 아니라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죽기를 각오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영원히 살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큰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요한복음3장16절
자선 사업가 할머니가 어느 도시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에 부모가 없는 고아 소년이 신문팔이를 하고 있었는데 눈보라가 치는 거리를 걷다가 무척 굶주려 있었습니다.
그때 지나가는 경찰관을 붙들고 무얼 얻어먹고 몸을 녹일 수 있는 곳을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경찰관은 유명한 예수 믿는 할머니 집을 소개하면서 그 집에 도착하여 초인종을 누르고 '누구냐'고 묻거든 "요한복음 3장 16절"이라고 대답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 소년은 가서 시키는 대로 초인종을 누르고 "요한복음 3장16절"하니까 문이 열립니다. 소년은 생각하기를 '요한복음 3장16절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것은 닫힌 문을 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문이 열리고 할머니는 소년의 얼어붙은 몸을 보고서 따뜻한 난로 가에서 불을 쬐라고 말합니다. 몸을 다 녹인 다음에 고기 국물이 있는 좋은 식사를 제공받으면서 '요한복음 3장16절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것이 춥고 배고픈 것을 해결해 주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할머니는 성경을 들고 나오시더니 요한복음 3장16절을 읽으시고는 소년에게 "이 구절의 뜻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소년은 대답하기를 "잘 모르겠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 닫힌 문을 열어 주고, 추운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 더러운 사람을 깨끗케 하고, 피곤한 사람에게 안식을 주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할머니는 "하나님의 사랑은 이 모든 것을 하신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래서 이 소년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이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 결론(決論)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히브리 산파들의 신앙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1. 인간의 법보다 하나님의 법을 먼저 좇았습니다.
2. 애굽 왕 바로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히브리 산파들이 그러한 신앙으로 산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집이 더욱 왕성케 되는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살뿐만 아니라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죽기를 각오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영원히 살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큰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히브리 산파들과 같은 믿음으로 주를 섬기고 승리하는 복된 신앙인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