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10-20 때에 에브론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자손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으로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400년 후에 될 일이었습니다(15:13-16).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어디까지나 그 땅을 주장하지 못할 나그네로 처신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 땅 값을 주고 그 묘지를 허락 받고자 하였습니다. 막벨라 굴은 헤브론의 좁은 골짜기 동쪽에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그곳을 회교도들이 파수한다고 하는데 때문에 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은 그들에게 세상에 널려있는 보편 타당한 정신이라도 없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아브라함의 신앙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1. 본문 10-15절은
“⑩ 때에 에브론이 헷족속 중에 앉았더니 그가 헷족속 곧 성문에 들어온 모든 자의 듣는데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⑪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께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께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께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⑫ 아브라함이 이에 그 땅 백성을 대하여 몸을 굽히고
⑬ 그 땅 백성의 듣는 데 에브론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컨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
⑭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⑮ 내 주여 내게 들으소서 땅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나와 당신 사이에 어찌 교계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입니다.
1) 비록 에브론이 그 밭을 아브라함에게 거저 주겠다고 우겨댔습니다.
그렇지만 그 거룩한 사람 아브라함은 끝까지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의 간절한 호소로 그를 설득시켜 나아갑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밭의 값을 받고 팔게 설득합니다. 에브론은 자신을 변명하면서 그 값은 너무 적은 액수라서 아브라함이 그냥 갖도록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세푸스는 그 무덤의 세겔이 아메데의 4 드라크마와 같은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그 세겔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면 부데우스의 계산에서 우리는 그 밭 값이 프랑스화폐로 약 2백 50파운드 정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통상적인 세겔을 이해한다면 그 액면의 절반정도가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뜻을 막을 충분한 이유가 없었다면 보다 큰 선물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상황인 것만은 사실인 듯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한편으로 자기 잇속을 챙기려는 복선을 깔고 그렇게 용의주도한 생각을 했던 그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애굽의 왕과 그랄의 왕들로부터 상당한 선물이 제공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그는 어떠한 경우에서도 모든 ‘것’을 모든 ‘곳’에서 그리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받지 않으려는 철칙을 끝까지 준수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사람에게서 선물을 받아 발 불일 밭때기를 소유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 밭을 자기 것으로 값을 치르고 샀던 것입니다.
2) 이 본문들에서는 막벨라 굴 소유자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후한 뜻을 나타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는 굴 뿐 아니라 밭까지 제공하고자 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 뿐 아니라 그 땅의 족속들에게 보편 타당한 방식으로 늘 선하게 행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측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인에게 보이는 모본이기도 합니다. 또 “에브론”은 자기 동족을 증인으로 삼고 아브라함에게 후한 뜻을 전하려고까지 합니다. 이번에도 아브라함은 정중하고 겸손하게 꼭 같은 방식의 청원을 합니다(12-13). “에브론”은 또 다시 그 땅을 거저 가지라 강권합니다. 이 같은 교감이나 교통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또 이런 정신은 기독교인이 아브라함의 행실에서 배우는 모범정신이어야 합니다.
2. 본문 16-20절은
“⑯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좇아 에브론이 헷족속의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고의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⑰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을 바꾸어 그 속의 굴과 그 사방에 둘린 수목을 다
⑱ 성문에 들어온 헷족속 앞에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정한지라
⑲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⑳ 이와 같이 그 밭과 그 속의 굴을 헷족속이 아브라함 소유 매장지로 정하였더라” 입니다.
1) 제롬은 에브론이 아브라함의 간청을 받아들여 밭값을 받기로 설득된 후에 그의 이름에서 한 글자가 삭제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무슨 뜻으로 그런 해석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무덤을 팔므로 에브론의 덕성이 어그러졌다거나 감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에브론의 이름은 그 사건이 있기 전이나 후에도 똑같은 철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브론이 압력을 받고 자기 밭값을 다 받았다는 사실을 그의 잘못으로 돌려서는 안됩니다. 그는 그 당시에 그것을 거저 주려는 마음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경우에 무슨 죄가 있다면 아브라함이 그 모든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감히 정당한 판매 행위를 정죄 하겠습니까? 그 거래는 쌍방이 종교와 선한 믿음과 평등성이 잘 유지된 거래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것을 정죄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은 무덤을 갖기 위하여 그 밭을 구입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설명에 근거하여 에브론이 그것을 거저 주어야만 했으며 무덤을 구실로 그의 권리가 횡령 당해야 된단 말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전혀 아무것도 아니며 단지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정경주의자(正經主義者 ; Canoists)들은 무덤을 파는 것은 엄청난 신성모독이라고 결정하고 있습니다. 이들도 역시 전자의 분류들처럼 터무니없는 자들이며 무엇에 홀려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롬의 표현을 경솔하게 붙들고 있는 자들입니다. 한편으로 카톨릭 치하에 있는 모든 희생자들은 마음놓고 이런 시시한 짓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동묘지를 보통 묘지로 인정하고 있는 반면에 무덤 값은 지불하지 않으면 그들은 무덤을 파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가 가지는 묘지를 상당한 값에 팔고 있다는 소식을 종종 듣습니다. 이 또한 준 카톨릭 형태입니다.
2) “상고의 통용하는”이라는 말에서 모세는 여기서 돈이 사람들 사이에 상호 교통하는 데에 매개체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돈은 물건을 사고 파는 일에 주로 채용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이 장(章)을 마치면서 그 밭이 아브라함의 소유라는 것이 헷족속의 사람들에 의하여 확실히 증명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그 매매 행위가 모든 사람 앞에 떳떳하게 이행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말입니다. 비록 한 개인이 그 밭을 팔았지만 그곳의 사람들이 입회하여 그 양쪽이 체결한 계약을 인준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3) 이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끝까지 “에브론”에게 댓가를 주고 장지를 받은 사실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약속을 신앙의 내용으로 그대로 간직한 신앙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것을 지켜 나아가는 신앙의 행동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도 자기 신앙이 정결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처사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아브라함과 같은 정결한 신앙으로 처신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오해와 빈축을 사는 것입니다. 기독 신자들은 하늘의 지혜로 사는 자들인바 탐심을 우상과 같이 피하여야 하는 자들입니다 또 교회 직원이든 일반 신자이든 간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정직과 성결을 신앙의 생명처럼 지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부가 가치입니다. 기독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부가 가치가 교회의 부가 가치요, 그가 속해 있는 사회의 부가 가치요, 오늘날에도 기독인들이 나라의 부가 가치요, 나라의 경쟁력이 되어야 합니다.
4) 본문 끝 절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그 일이 관철됩니다.
성경은 이 사실이 아주 중요한 만큼 계속해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큰 교훈을 받습니다. 첫째로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을 그의 생애 끝까지 소유하지 못한 채로 “나그네” 정신을 소유한 자로 살면서 하나님의 약속 성취를 대망 하는 자답게 끝까지 참았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는,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신앙과 그의 이웃을 향하여 드러난 그의 신앙 생활 방식이 여전히 한 모본으로 제시된 점입니다. 이렇게 신앙이란 건실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든 사람을 향해서든 통합적이고 전인적 방식으로 드러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