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민주화 운동](19) 감옥에서 탄생한 민중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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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민주화 운동](19) 감옥에서 탄생한 민중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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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민주화 운동](19) 감옥에서 탄생한 민중신학
고난받는 민중의 恨 관통한 ‘메시아’
경향신문 입력 : 2003-08-24 19:45:39
‘민중’은 1980년대를 관통한 키워드이자 이념이다. 정치적으로는 피지배계층에 속하며 경제적으로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인민’ ‘국민’의 동의어이다. 급진적 개혁을 꿈꾸는 대학생들은 ‘민중민주주의’ 이론을 닦았고 선비의 음풍농월(吟風弄月)과 예술가의 탐미주의를 거부한 문학인들은 ‘민중문학’을, 강력한 현실 개입을 추구한 화가들은 ‘민중미술’을 꽃피웠다.
이 민중의 맹아는 일찍이 교회에서 움튼 것이다. 75년 긴급조치 1, 4호 위반으로 구속된 교수들의 석방을 환영하는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주최 3·1절 예배의 강연에서 안병무는 ‘민족·민중·교회’라는 제목으로 이와 같이 말한다.
“우리 역사에 민족은 있어도 민중은 없었다. 다시 말하면 실재하는 것은 민중이고 민족이란 대외관계에서 형성되는 상대적 개념인데, 언제나 내세운 것은 민족이었고 민족을 형성한 민중은 계속 민족을 위한다는 이름 밑에 시달림을 당한 채 방치되었다. … 근·현대사의 예만 들어도 홍경래사건, 동학혁명, 3·1운동, 4·19는 민중의 얼이 소생한 것이다”
이 강연은 민중이라는 용어가 신학적 작업의 핵심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안병무는 1922년 항일의 요람 간도 용정 출생으로 서울대 사회학과를 거쳐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73년에 ‘한국신학연구소’ 설립과 함께 계간지 ‘신학사상’ 창간을 주도한 신학자이다. 예수와 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그는 ‘교리의 옷을 입은 예수가 아니라 억압의 땅 갈릴리에서 민중의 해방을 모색한 예수’를 찾으려고 했다.
곧이어 서남동이 동일한 맥락에서 발표한 ‘예수, 교회사, 한국 교회’라는 논문은 한국 신학계와 기독교계에 엄청난 풍파를 일으킨다. 그는 예수의 출현을 경제적 빈곤, 사회적·문화적 편견, 사실이 은폐된 어둠 속 무지, 정치적 억압 등으로부터의 인간해방 작업으로 해석했다. 예수의 가르침은 민중의 소리로 새 시대가 도래하는 종말론적·혁명적 선포이며 이 점에서 ‘예수는 바로 민중’이라고 하였다. ‘신의 아들’로부터 ‘사람의 아들’인 민중으로 태어난 예수는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서 사회학, 경제학, 문화예술로 넘나들면서 전투성을 획득한다.
‘민중은 전혀 실질적 내용이 없는 추상의 허구이며, 이는 전쟁을 부르는 열광성과 단 한번의 전투적 결단을 불러일으키는 선동일 뿐’(김형효, 75년 4월호 ‘문학사상’)이라는 비판이 내리꽂히자 서남동은 민중을 책상 앞에서 논의하지 말고 현실을 보고 경험해보고, 사건 속에서 민중의 실체를 보라고 응답한다.
민중신학은 상아탑의 연구실에서 나온 사변이 아니라 긴급조치라는 한국적 정치 현장,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감옥에서 생성된 신학이다. 서남동·안병무·문익환·현영학 등은 서구에서 신학적 훈련을 받은 자유주의자들이다. 이 엘리트 교수들이 민중을 자신들 신학의 중심으로 삼고 성찰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이나 교회가 아니라 해직된 후의 감옥 안에서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구조악에 수난당하는 민중들을 발견하게 된다.
미국 유학 출신의 교수 목사 문익환은 감옥에서 민중의 실체를 목도하면서 목자로부터 양의 자리로 자신을 한없이 낮춘다. 그는 민중의 건강성과 아름다움을 체험한다.
“전주 교도소 10방에 있는/ 정철이는 천사/ 다섯 살에 뇌염으로 뇌 한구석이 무너져/ 하루가 멀다하고 경련을 일으키는/ 정철이는 뱀잡이 명수/ 뱀술을 고아 판 돈으로 의지없는 노인들을 보살피는 걸 천직으로 삼고 살아가는 젊은이 정철이/ 노인들에게 리어카를 사주어 사과랑 배랑 감이랑 받아다 팔아 살아가게 했는데/ 노점 단속반이 리어카를 뒤엎어 끌고 가는 걸 보다못해 달겨들어 주먹을 휘둘렀다가/ 공무집행방해죄로 징역을 살고 있어/ 도합 30년 감방살이하는 전과 18범 오줌 술술 싸는 노인의/ 담요를 도맡아 빨아주는 정철이”(문익환 ‘옥중시집’ 중에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마저 지켜주지 않는, 세상의 가장 어둡고 후미진 거주지이자 빈민 선교활동의 현장인 꼬방동네 판자촌 또한 그 현장이었다. 어느날, 현영학은 똥물이 흐르는 청계천 둑을 따라 빈민선교회 장소인 판잣집으로 가는 길에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구경을 하는 가운데 나이 어린 두명의 창녀가 서로 짓이기는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 옷은 다 찢겨져서 거의 발가벗다시피 하였다. 흉악한 욕설의 내용으로 보아,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단골손님을 자기 방에 모셔다가 접대한 것이 화근이었다. 너무도 더럽고, 치사하고, 잔인하고, 저주스러운 장면이었다. 이 신학자는 민중이 죄인 또는 타락한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사회의 구조악을 발견하고, 이 구조악이 소위 성서에서 말하는 사탄 혹은 악마와 다른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삶을 체험하면서, 이들은 민중들에게 복음과 구원이 무엇이며 어떻게 선교해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한다. 그동안 대학 강의실에서 가르치고 배웠던 것들이 이 민중의 현장에서는 소용이 없으며, 오히려 민중들을 이렇게 만든 사회체제와 이념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계몽과 구제의 대상이던 민중이 실은 구조악에 철저히 수탈당하고 억압당하면서도 죽지 않는 생명의 원천이며 역사의 주체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안병무는 ‘기독교의 탈서구화’를 천명한다. 서구 신학만이 순수보편적 신학이라고 인식하여 한국 현실을 외면하던 기독교인들에게 그는 한국 현실을 직시하고 성찰할 것을 주문한다.
민중신학을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서남동은 자신의 신학을 ‘반신학(反神學)’ 또는 ‘탈신학(脫神學)’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서구의 전통신학이 예수의 사건을 말씀으로 전달하고, 교리화하고, 신학화하는 과정에서 예수의 역사성을 상실하고 현실의 지배질서를 정당화하는 체제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여 신학의 주체인 민중을 소외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전통신학의 모형을 거꾸로 뒤집어 민중의 현실(context)을 신학의 주제(text)로 삼고 민중들의 고통스런 삶을 계시의 매체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에게 신학은 단순히 예수 사건의 회상이거나 증언이 아니며, 현실의 구조악과 모순 속에서 고난받는 민중이 갖는 한(恨)의 속량적 성격과 메시아성을 믿고 그들을 역사의 주체로 내세우는 실천행위였던 것이다.
연세대 교수이던 그는 당연히 해직되었으며 이듬해인 76년 3·1민주구국선언의 서명에 참여함으로써 ‘기독교선교연구원’ 설립 운영과 더불어 본격적인 사회참여의 전위에 선다. 본 회퍼의 ‘세속화 신학’을 비롯한 서구의 여러 진보주의 신학의 조류를 국내에 소개하는 데 몰두하던 끝에 그는 동료교수 서광선 등과 함께 한국의 실천신학인 민중신학을 제3세계 신학 모델로 국제사회에 내놓게 되었다. 민중신학은 남미의 해방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등과 함께 독일 등지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한국의 민중신학 이전에 남미의 해방신학은 서구와 제3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을 해방의 대상으로 인식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죽임의 문화를 넘어서는 새로운 생명문화를 창출하는 주체, 역사와 문화의 주체라는 인식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또한 해방신학이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신학의 해석학을 발전시켰지만 기존 서구 신학의 한계를 돌파하지 못한 반면, 민중신학은 서구 신학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나 민중들이 바로 한국 역사와 문화의 주체라는 인식을 통해 민중들의 삶의 자리에서 새로운 신학 방법론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세계 신학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과 방법론으로 주목받고 있다.
호화찬란한 거대한 성전을 짓기에 여념 없고 자주 독재자를 위한 기도회를 여는가 하면, 삶에 지친 고단한 민중들을 내세의 행복으로 위무했던 초대형 교회가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번창일로를 달려왔던 우리의 교회사에 민중신학이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사회주의의 몰락, 민주주의의 확대와 성장으로 진보적인 실천신학의 에너지는 그 생명을 다했을지 모르나 반세계화의 물결이 거센 오늘날 민중신학의 이념과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장종택(출판인)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종합기획부장) 김재중(" 기자)
강좌개설 ‘불씨’살려…‘민중 종교신학’ 목표
-성공회대 권진관 교수
“민중신학은 역사 현장에서 노동자, 농민, 빈민 등 민중의 사건에 개입하는 ‘사건의 신학’입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지만, 사건은 계속 일어나고 있으며 민중신학이 설 자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1983년 이후 격년으로 민중신학 강좌를 개설해온 성공회대에서 민중신학의 불씨를 되살리고 있는 신학과 교수 권진관은 민중신학의 현재적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성공회대 민중신학 강좌는 한때 수강을 신청하는 사람이 없어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올해 개설된 강좌에는 학내·외에서 25명이 참석해 높은 관심을 보였다고 말했다.
70년대 중반 사상적 틀을 갖춘 뒤 80년대 초반까지 도시빈민운동과 노동운동을 펼치며 만개했던 민중신학은 시대상황의 변화와 함께 관심과 열기가 많이 식은 것이 사실이다. 산업선교활동은 시민사회운동에 그 자리를 내주었고, 민중신학적 이념에 기반해 교회를 운영하는 ‘민중교회’들도 90년대 초반 이후 교파별로 운영되면서 활동의 폭이 좁아졌다.
한신대를 중심으로 꽃피웠던 학문적·사상적 연구도 안병무·서남동 등 1세대가 세상을 떠나고 교단의 보수화 및 성장논리가 압도하면서 학계보다는 재야의 연구소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민중신학의 의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권진관은 강조한다. 지구화 담론에 따라 비정규직 노동자가 폭증하고 실직자, 도시빈민, 외국인 노동자 등 ‘민중의 사건’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민중신학이 한국의 신학으로 출발해 세계적인 신학으로 당당하게 성장했다는 사실 자체도 민중신학의 존재이유 가운데 하나다.
민중신학은 독일 등 서구에서 큰 관심을 받은 바 있으며 여전히 서구에서 ‘minjung theology’로 불린다. 권진관은 한국 민중의 전통과 기독교 전통을 연결함으로써 민중적 종교신학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앞으로 민중신학의 과제라고 말했다.
[출처] [실록 민주화 운동](19) 감옥에서 탄생한 민중신학|작성자 바람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