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황해도 - 관서의 큰 고을이었던 해주
인기멤버
hanjy9713
2024.01.04. 01:35조회 0
댓글 0URL 복사
관서의 큰 고을이었던 해주
농사와 고기잡이와 장사를 업으로 삼는다. 굳세게 버티어 굽히지 않고, 의롭지 못한 일에 대하여 의분을 느끼고 탄식하는 풍습이 있다. 사람들의 마음은 비꼬이고, 영리하며, 무덤을 쓰고 제사를 지내는 데 정성을 다한다. 문헌공 최충이 9개의 학당인 구재(九齋)를 설립하여 제자들을 가르친 뒤에 글을 숭상하는 풍습이 크게 떨쳤다.
문성공 이이가 석담에 정사(精舍)를 짓고서 학생들을 가르쳐 학교를 다시 진흥하고 향약을 마련하여 실시하였다. 그러자 풍속이 점차 도타워져 학업을 서로 숭상하고, 관혼상제를 행할 때 반드시 예에 따라 하여 풍속을 바로잡았다. 세상 사람들이 해주에는 3가지가 많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람과 대화와 돌이 많다는 뜻이다.
『여지도서』 「풍속」조에 실린 글이다.
“해주는 감사가 있는 곳으로 수양산 남쪽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해주의 고구려 때 이름은 내미홀군(內未忽郡)이며, 지성(池城) 또는 장지(長池)라고도 불렸다. 남북국시대 때 폭지(瀑池)라 고쳐 불렀으며, 고려 태조가 고을이 남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였다 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하지만 해주라는 지명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궁예가 집권했던 태봉국 때인 905년이었다. 1938년에는 해주부가 되었다가 1945년에 해주시1)가 되었으며, 현재 황해남도의 도청소재지다.
서거정은 동헌(東軒) 『중신기(重新記)』에 “해주는 관서의 큰 고을인데, 원래 고구려의 내미홀이었다. (······) 그 백성이 많고, 전지의 비옥함과 물산의 풍부함이 여러 주 중에서 제일이다. 이곳의 사무는 번거롭고 처리하기가 고되어 어려운 일을 처리하는 재주가 없는 관원이 다스리기는 어려우니, 조정에서 관원을 보낼 때마다 그 인재 구하기를 어렵게 여겼다”라고 기록하였다.
강화도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해주 연백평야 © 유철상
해주시 북쪽에는 수양산ㆍ설류봉ㆍ장대산 등이 솟아 있고, 남쪽에는 남산ㆍ선녀봉 등 낮은 산이 있으며, 동서쪽에는 장방평야와 신광평야가 펼쳐진다. 해주시의 진산은 용수산이며, 서북쪽에 수양산이 있다. 해주의 명산으로 널리 알려진 수양산의 최고봉이 설류봉이다. 옛날 중국의 백이와 숙제가 건너와 이 산에 숨어 산채와 고사리만 먹고 살다가 아사했다고 하는데, 청성묘(淸聖廟)를 세워 이들의 제사를 지내고, 그 충성심과 절개를 기리기 위해 백세청풍비를 세웠다고 한다.
동헌 동쪽 3리쯤에 수양산이 있는데, 산 위에 이제대(夷齊臺)가 있고, 하늘을 찌르는 소나무와 노송나무가 옥으로 만든 창을 세워놓은 것처럼 빼곡하게 늘어서 있다. 또 고사리가 나는데 통통하고 연한 것이 보통의 것과 다르다. 2리쯤에는 광석천이 있는데, 너비가 100보쯤 되고, 밑에 하얀 돌이 삿자리처럼 깔려 있으며, 물이 푸르고 맑아 손으로 움켜 마실 만하다. 농어니 붕어니 하는 아름다운 물고기들이 1100마리 떼를 지어 한가롭게 노니는데, 물가에 서서 내려다보며 손가락을 꼽아 그 수를 헤아릴 수 있으며, 낚시질을 할 수도 있고, 작살을 던져 잡을 수도 있으며, 그물을 던져 잡을 수도 있다.
수양산과 그 아래를 흐르는 광석천을 이야기한 서거정의 글이다. 이곳 수양산에는 고구려 때의 산성인 수양산성이 있으며, 조선 초기의 문신 성임은 그의 시에서 수양산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청산은 청해변에 첩첩하고,
창해는 청산 앞에 아득하네.
산 이름 수양이 기절(奇絶)도 한데,
지도에는 주나라 땅에 들지 않았네.
옛 대(臺)가 기접도 한데,
고을 사람들 역력하게 서로 전하네.
중을 찾아서 야사(野寺)에 갈 것도 없고,
신선을 찾아 바다에 배를 띄울 것도 없네.
고사리 캐던 옛 자취 그 아니 우러러볼 것인가.
높이 백세천세에 뛰어났네.
주려도 주나라 곡식 먹지 않고,
가서 숨는데 형과 아우 같이하였네.
이것을 달게 여기고 다시 세상에 나가지 않고,
그 자취를 산중에 의탁했네.
산이 있으니 이 내 뼈는 묻을 수 있는 것,
주나라의 곡식이 있은들 내 어찌 목구멍에 넣을 수 있을 것인가.
기어이 한 번 죽음으로 후세 사람들을 깨우치니,
높은 바람 천년 후에도 늠연(凜然)하게 분다네.
아, 외나무로 큰 집을 버티어서
길이 은나라를 오래가게 하지 못한 것이 한이로세.
해주 객사 동쪽에 봉지루(鳳池樓)라는 누각이 있었고, 이 누각을 두고 이승소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한 지역 외로운 성이 바닷가에 가까운데,
봄바람의 먼 나그네 혼자서 누에 올랐네.
산은 서북쪽으로 잇달아 천 겹으로 푸르고,
땅은 동남쪽으로 터져서 만고에 흐르네.
널리 포용하니 하늘이 큰 것을 알겠고,
바다가 아득하니 세상이 떠 있는 줄 깨닫겠네.
백 년 동안 분주하여 무슨 일을 이루겠나.
연파에 낚싯배나 띄워볼까나.
한편 해주의 남쪽 바다 30리쯤에 형제도라는 섬이 있다. 2개의 작은 섬이 있으므로 민가에서 형제도라고 부르는데,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이 섬에서 ‘백이와 숙제가 죽었다.’ 해주 동쪽 30리쯤에 우다굴(亏多窟)이 있는데, 굴의 원경이 2길이 넘는다. 굴 안이 어두워서 불을 가져가야 들어갈 수 있다. 5리쯤 가면 굴이 구부러지고 깊어지면서 물이 나오는데, 그 근원을 모른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우다 장군이 이 굴속으로 들어가서 구월산 꼭대기에 도달하였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그곳까지는 100여 리나 된다. 굴 안에서 불을 피우면 10여 일 만에 구월산 구멍으로 나간다.”
“섬들이 어찌 이리도 많은고. 봉화에 비치고, 밭두둑은 태반이 다북쑥에 묻혔네.” 이색의 글이다. 그는 또한 “높은 산은 층층한 구름 가에 은은한데, 넓은 바다는 출렁거려 앞을 둘렀네”라고도 하였다. 김자지는 “고을은 수풀 언덕을 의지하여 궁벽하고, 땅은 바다 어귀에 결하여 깊었네”라고 노래하였으며, 고득종은 “만고에 백이, 숙제 살던 곳인데, 그 유풍에 감회도 깊구나”라고 하였다.
이곳의 물산은 실미역이라 부르는 사곽, 황각, 쌀새우라고 부르는 백하, 참서대라고 부르는 설어, 장두어(짱뚱어), 즉어(붕어) 그리고 곤쟁이라고 부르는 자하였다. 곤쟁이젓은 줄(볏과의 여러해살이풀)과 함께 소금에 절여서 만든다. 이 지역의 민간에서는 이 젓갈을 ‘감동(感動)’이라고 부르는데 그 연유가 재미있다.
옛날에 중국의 사신이 해주를 지나가는 중에 이 젓갈을 먹다 눈물을 흘리며 차마 먹지를 못하였다. 사신 접대를 담당하는 원접사가 이상히 여겨서 물어보자, 사신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나에게 노모가 한 분 집에 계시는데, 이 젓갈이 너무나 맛있어서 차마 목으로 넘기지 못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원접사가 해주의 관리에게 주문하여 그 젓갈을 한 항아리 선물하자, 사신이 말하기를 “감동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 젓갈을 ‘감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해주 동쪽에 자리한 신원군은 행정구역상 황해남도의 동부에 있는 군으로, 1952년 재령군과 벽성군의 일부를 분리해서 신설하였다. 산지가 많은 신원군에는 동쪽으로 철봉산, 서쪽으로 평풍산, 남쪽으로 수양산, 북쪽으로 장수산 등이 솟아 있고, 재령강이 이 군에서 시작된다. 강의 길이에 비해 유역면적이 넓은 재령강은 신원군의 서부와 신천군의 경계에 있는 평풍산에서 시작하여 온천군과 황해북도 황주군 사이에서 대동강으로 흘러든다. 재령강의 주요 지천은 서흥강, 은파천, 직천, 서강, 척서천 등이다. 장수산 남쪽에는 청단군이 있다. 청단군은 1952년 벽성군의 일부를 떼어서 만든 군으로, 낮은 산과 언덕 그리고 평지로 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관서의 큰 고을이었던 해주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6 : 북한, 2012. 10. 5., 신정일)
hanjy9713님의 게시글 더보기
좋아요0
이 글을 '좋아요'한 멤버 리스트
댓글0
블로그/카페 공유수0
공유
클린봇이 악성 댓글을 감지합니다.설정
댓글
댓글을 입력하세요hanjy9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