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워싱턴주 셔헤일리스 [3]
엄마는 밥과 김치에 기껏해야 시금치 굴 소스 볶음이나 고추된장 무침 같은 반찬 하나만 곁들여 최소한의 식사만하고 있었다. "된장은 콩으로 만들었으니까 단백질이야." 영양실조가 걱정된다는 내 말에 엄마가 말했다. 이따금 엄마는 버거킹에서 치즈를 추가한 더블 와퍼 버거를 먹기도 했지만, 아버지을 위해 요리하는 것은 그만두었다. 아버지는 스파게티, 통조림 수프, 채소 찜을 먹거나 노인을 위한 음식 배달 서비스에서 운전을 하며 그날그날 마감 후 남은 음식을 집으로 가져와 근근히 연명하고 있었다.
두 분 다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하고 있는 모습에, 나는 세이프웨이 마트에서 장을 봐 그날 저녁 요리할 돼지고기와 감자 오븐 구이에 필요한 재료를 구입했다. 아직 요리는 배우지 못했지만 엄마가 요리하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봤던 터라, 고기를 양념해서 오븐에 넣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셀러드는 만들기 쉬웠다. 아이스버그 양상추, 토마토, 오이를 잘라서 시판 드레싱을 뿌리는 게 다였다. 부모님과 함께 식탁에 나란히 앉아 내가 요리한 음식을 먹었다
"맛있네." 아버지는 돼지고기를 맛보며 말했다.
"너무 익혀서 미안해요." 내가 말했다.
저녁을 먹으며 아버지와는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지만,엄마는 공허한 눈빛으로 내내 침묵을 지켰다. 엄마 목소리가 듣고 싶었지만, 형광등 윙윙거리는 소리, 그리고 우리 셋이 퍽퍽해진 고기를 씹어 물과 함께 삼키는 소리만 주방을 가득 메웠다.
별다른 말 없이 조용히 식사를 하는 건 어렸을 때도 크게 다르지않았지만, "원 타임, 노 러브"라는 엄마의 흥겨운 후렴구는 온데간데없었다. 말없는 엄마를 보며 나는 이제껏 엄마가 요리를 통해 의사소통을 해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침묵하는 엄마는 마치 유령처럼 보였다. 엄마의 모습을 보고, 드시는 소리를 듣고, 옷에서 화이트 숄더스 향수의 희미한 라일락 향도 맡을 수 있었지만 엄마는 내 손이 닿지 않는 다른 세계로 가버린 듯했다.
"고마워, 우리 딸." 엄마가 소파 자리로 돌아가 앉자 아버지가 말했다. 부모님을 위해 요리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고, 엄마를 위해 만든 위해 만든 수천 번의 식사 중에서도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 후 집에 올 때마다 내가 요리를 도맡았지만,엄마는 음식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엄마의 침묵이 요리에 대한 내 흥미를 떨어뜨리려는 방편이었는지, 아니면 정신이 너무 혼란스러워 음식엔 완전히 무심해 져버렸던 건지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초창기 엄마를 위해 요리를 해보려던 시도는 엄마의 불행에 대한 쓰라린 기억만 남겼고, 상황이 나아지긴 할지도 여전히 미지수였다.
엄마는 뉴저지주에서 셔헤일리스로 돌아온 다음 시도한 두 번째 자살 기도 이후, 1-5 고속로를 타고 북쪽으로 50킬로 정도 떨어진 올림피아에 있는 심리치료사를 만나기 시작했다.엄마가 만났던 심리치료사인 전 박사는 한국에서 이민한 여성이자, 엄마가 15년 만에 외가 식구들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말을 나눠본 한국인 성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