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38]졸음-음주운전은 "절대로 안될 말"
기면증嗜眠症(낮 시간 대 졸음 등 상당히 심각한 증세가 많음)까지는 아니어도 사람들과 얘기하는 도중에도 잠깐잠깐 졸기도 하고, 차를 타고 갈 때에도 깜빡 조는 버릇이 제법 심하다. ‘토막잠’의 명수는 김대중 전대통령이었다고 한다. 하루에도 수십 군데 유세를 다니다보면 승용차 안에서 잠깐씩 눈을 붙이는 게 아예 습관이 되었다던가.
그런데, 어제 정말 ‘큰일날 뻔’한 일이 일어났다. 오후 3시쯤, 귀가하던 중 이웃마을을 지나는 군도郡道에서 정말 순식간에 깜빡 졸다 군도 옆 또랑으로 차가 스르르르 미끄러진 것이다. 수습할 새도 없이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5m여를 미끄러지다 딱 멈춘 게 그집앞 다리 수통 앞이었다. 운전자석 문이 열리지 않아 옆문으로 빠져나와 보니, 앞 범퍼는 찌그러진 깡통이 되었다. 타이어도 모두 펑크가 났다. 손을 쓸 어떤 방법도 없다. 그저 긴급서비스를 신청할 밖에. 달려온 서비스차는 견인이 안된다며 차를 통째로 들어올리는 특수장비차량이 필요하다고 한다. 오매-. 사고도 큰 사고가 난 것이다. 사고가 나면 가장 중요한 것이 몸일진대, 신기하게도 몸은 멀쩡했다. 암시랑토 않은 것이다. 아아-, 차는 폐차수준이라는데, 몸은 멀쩡하니, 이거야말로 천만다행千萬多幸, 천우신조天佑神助가 아니고 무엇이랴.
불현듯, 내 입에서 ‘할머니’ 소리가 절로 나왔다. 틀림없이 마이산 천지탑에 50년 동안 불공을 드린 공력이 효력을 발휘한 것이리라. 달려온 인근 주민 서너 명도 기적같은 경우라고 입을 모았다. 아내에게 일착으로 ‘깜빡 졸음운전’으로 발생한 나쁜 뉴스를 알렸다. 대뜸 “몸은?”이라고 묻는 게 고마웠다. 아무렴, 그 마당에 왜 졸았냐며 지청구를 줘서야 쓸 일인가. 전주와 완주, 결혼식 두 곳에 인사치레를 하고 얼른 집에가 낮잠을 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집을 100m도 아니고 1km를 앞두고, 그것 하나 집중을 못하고, 이제껏 차량 사고 중 가장 큰 사고를 내고 만 것이다. 사고현장을 ‘복기復棋’해 보니, 미끄러진 곳의 앞뒤가 첩첩산중, 직전 3m거리에는 큰 전봇대가 있는데 거기에 부닥쳤다면 죽거나 크게 다쳤을 듯. 또한 2m 거리의ㅍ수로시설이 있는 곳에서 미끄러졌다면 차는 완전 박살이 났을 것이고, 역시 죽거나 크게 다쳤을 듯. 또한 직후 5m 지점에서 군도를 벗어났다면 제네시스와 충돌은 불문가지이고, 자차보험도 들지 않았으니 ‘오 마이 갓’이 아니고 무엇이랴!
일단 사태를 수습하자(임실 카센터에서 견인하여 견적서를 보낸단다. 최소 150만-200만원일 거라는데, 폐차보다는 수리하는 게 낫겠다), 내일과 모레 일정이 생각났다. 아시겠지만, 농촌에서는 특히 ‘발발이(자가용)’ 없으면 꼼짝도 못하지 않던가. 내일 오전 10시에는 오수역으로 고등학교 은사를 마중하겠다 했는데. 이 어른은 참 재밌는, 내가 학교생활 18년동안 유일하게 존경하는 선생님으로 3학년때 담임이었다. 35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89세. 아직은 정정하시다. 전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수제자의 집(나의 집)’을 방문하려는 까닭은 “자네 춘부장이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한번 뵙고 인사를 드려야 도리다”는 것. 어허-, 이럴 수가? 이런 영광이? 그래서 두 분을 모시고 점심을 대접하려 했는데, 당장 차가 ‘유고상태’이니, 죄송스럽다는 말씀을 드릴 수 밖에. 선생님과 아버지가 만나 악수를 하며 얘기를 나누는 것이 어디 흔한 일이랴. 사진으로도 남기려했다. 참으로 ‘멋진 글감’ 하나가 탄생하려는 순간이었는데, 졸지에 무산된 게 아쉬웠다. 고교3년(75년) 내내 종례시간에 선생님의 제안으로 유행가 <나그네설움>을, 그것도 교실에서 단체로 목청껏 불렀으니. <오늘도 걷는다마는/정처없는 이 발길/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다/선창가 고동 소리 옛 임이 그리워도/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선생님은 하필이면 왜 이 노래를 부르게 했을까? 칼럼을 보시면 알겠지만, 이렇게 멋진 선생님 이야기를 나는 알지 못한다. 흐흐.
또 하나는 월요일 10시 일정이다. 정읍 영원면에서 열리는 백정기의사 순국 89주기 추모식에 정읍형님과 고창 도반, 3인이 만나 점심을 먹기로 한 것이다. 백의사 5촌조카 백남이 시인이 최근 <윤봉기-이봉창-백정기의사 추모 산문집>을 펴냈는데, 책도 받고 서평도 써 잡지에 실을 계획이었는데, 이것 역시 물 건너간 것이다. 어찌할 수 없는 일. 자가용이 없으면 ‘사람 구실’도 못하기 십상인 세상인 것을.
어제의 결론은 역시 운전을 하다 조금이라도 졸리면 어디에서든 즉시 정차하여 눈을 붙여야 한다는 것. 물론 음주운전은 두 번 말하면 허리 아플 일일 것이고. 어제의 소식을 접한 몇 분이 꼭두새벽에 “어디 쑤시고 아픈 데 없냐?”는 전화를 해왔는데, 이 또한 눈물겹다. 지금 이렇게 자판을 토닥거리며 시덥잖은 생활글을 쓰고 인터넷바둑을 둘 수 있는 것을, 아마도 조상님께 크게 고마워해야 할 일일 싶다. 하하.
첫댓글 천만다행이네!
가족하고 상의해서 생일을 두번 치러야 하지 않을까?ㅎ
그런데 인간사 그게 쉽지 않더라고....ㅎ
왜냐하면 죽음의 슬픔이 -100이라면, 기사회생한 기쁨은 결코 +100이 안되고 날이 갈수록 희석되고 살아있음은 당연한 일상이 되더라고 ㅎ
국민학교 때 그 이치를 깨우친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여름방학 때 시골 마을 앞 동진 수리조합 수로(간선도로級 규모)에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도도하게 흐르는데 동네 동생이 빠져서 하우적 거리며 떠내려가고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주위 친구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마침 길을 지나던 이웃 마을 청년이 목숨 걸고 물 속에 뛰어들어 그 친구를 구했다.
나중에 부모님이 와서 (먼저)아들을 엄청 잡드리며 혼내고ㅎ, 청년한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 후 날이 지나며 그 청년도 아무런 생색없이 일상으로 돌아왔고 이 어머니도 날이 갈수록 아들이 살아있는 것이 일상이 되어갔다.
그때 어린 아들이 죽었으면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가야 하는 아픈 정도(-100)에 반해 지금 아들이 살아있는 기쁨은 +100으로 유지되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
마치 우리가 산소의 고마움을 잊어버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