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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따라 그림따라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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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따라 그림따라』Ⅰhttps://blog.naver.com/ohyh45/222479378731
1.귀스타브 카유보트-유럽교 위에서, 2.로베르 들로네-에펠탑(샹드마르스, 붉은 탑), 3.마네-깃발이 나부끼는 모스니에가,
4.레서 우리-브란덴부르크문이 보이는 운터덴린덴, 5.존 오코너-루드게이트 저녁, 6.베르트 모리조-로리앙의 항구,
7.클로드 모네-화가의 정원, 베퇴유, 8.마리안네 베레프킨-가을의 목가, 9.막시밀리앙 뤼스-아침, 실내,
10.뉴웰 컨버스 와이엇-다크 하버의 어부들, 11.조지 벨로스-푸른 아침, 12.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성당이 있는 겨울풍경,
13.대 피터르 브뤼헐-눈 속의 사냥꾼, 14.앙리 제르벡스-프레 카탈랑의 야회, 15.프레더릭 에드윈 처치-빙하,
16.고흐-노란 집, 17.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보볼리 정원에서 본 피렌체 정경, 18.찰스 프레더릭 얼리치-약속의 땅,
19.니콜라 푸생-아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20.모리스 프렌더가스트-메이데이, 센트럴파크,
『발길따라 그림따라』 Ⅱ https://blog.naver.com/ohyh45/222480451692
21.페더 크뢰이어-장미, 22.찰스 데무스-추상적 건물, 랭커스터, 23.크리스토퍼 네빈슨-타우데, 24.고갱-타히티의 여인들,
25.에드가 드가-압생트, 26.조르주 쇠라-아니에르에서 멱감기, 27.루이 베루-홍수의 즐거움, 28.외젠 부댕-트루빌 해변,
29.카미유 피사로-테아트르 프랑세 광장, 30.에른스트 키르히너-베를린 거리 풍경 , 31.로저 프라이-망통, 코트 다쥐르 전경,
32.오딜롱 르동-키클롭스, 33.지마 페트로프봇킨-붉은 말의 목욕, 34.알프레드 시슬레-레이디스 코브 해변의 스토 록, 저녁,
35.존 에버렛 밀레이-휴식의 계곡, 36.포드 매덕스 브라운-영국에서의 마지막 날, 37.에드바르 뭉크-별이 빛나는 밤,
39.존 싱글턴 코플리-왓슨과 상어, 40.오거스터스 에그-길동무,
『발길따라 그림따라』 Ⅲ https://blog.naver.com/ohyh45/222481588454
41.윌리엄 워터하우스-데카메론 이야기, 42.몬드리안-베스트카펠르의 등대, 43.고흐-감자 먹는 사람들,
44.베르나르 부테 드 몽벨-느무르의 기숙학생들, 45.앙리 루소-사자의 식사, 46.슈테판 로흐너-장미 덩굴의 성모,
47.들라크루아-미솔롱기 폐허 위의 그리스, 48.빌헬름 하머스호이-스트란드가드의 실내, 마루에 비치는 햇빛,
49.메인더르트 호베마-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 길, 50.프란츠 루트비히 카텔-과일장수와 나폴리만, 51.마스든 하틀리-등대,
52.고흐-폭풍우 이는 날, 스헤베닝언 해변, 53.윈즐로 호머-생명줄, 54.존 싱어 사전트-지붕 위의 카르리 소녀,
55.카스파어 볼프-로어 그린덴발트 빙하, 56.로비스 코린트-동물원에 있는 카를 하겐베크, 57.그랜트 우드-아메리칸 고딕,
58.빈센트 반 고흐-붉은 포도밭, 59.이사크 레비탄-황금빛 가을, 60.에드바르 뭉크-절규,
1.귀스타브 카유보트, 『유럽교 위에서』 (1876~1877) - 근대의 풍경
기차라는 교통수단이 생긴 것은 두 세기가 채 못 된다. 유럽의 철도는 1830년대에 건설되기 시작했다. 파리 생라자르역은 1837년에 세워졌다. 역을 지나는 노선이 늘면서 사람과 마차의 통행을 방해하자 1868년에는 역 위를 가로지르는 유럽교가 건설됐다.
▲ 귀스타브 카유보트, ‘유럽교 위에서’, 1876~1877년, 105.7 X130.8㎝, 킴벨 미술관,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
카유보트는 유럽교를 대상으로 소규모 습작을 포함해 대여섯 점의 그림을 그렸다. 나는 이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든다. 대상을 줌인해서 캔버스를 꽉 채운 구성이 대담하고, 단색 조로 다리의 형태감과 금속성을 강조한 모던함이 돋보인다. 화면을 대칭으로 분할하고 있는 교각 사이로 생라자르역이 보인다. 철삿줄같이 뻗어 나간 선로, 역 건물과 플랫폼, 기관차가 내뿜는 흰 연기가 보인다.
그림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두 사람은 멈춰 서서 역을 내려다보고, 한 사람은 다리를 지나치고 있다. 뒷모습이 보이는 주인공과 화면 왼쪽 몸의 반만 보이는 행인은 옷차림이 판에 박은 듯하다. 깃을 세운 검은색 코트를 입고 톱해트를 썼다. 1860년대 이후 중산층 남성의 복장은 오늘날의 비즈니스 슈트와 비슷한 짙은 색 상하의, 흰 셔츠, 톱해트로 통일됐다.
파리에서 손꼽히는 멋쟁이였던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단체로 초상난 거 같다”고 한탄했지만, 허리가 잘록한 프록코트라든가 화려한 색의 조끼는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에게 실크해트라는 명칭으로 익숙한 톱해트는 부유한 중산층의 상징이었다.
중산층 하층과 노동자계층은 볼러라고 하는 둥근 모자를 착용했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몸의 일부만 보이는 사람이 노동자 계층이다. 연한 파란색 겉옷을 입고 볼러를 썼다. 다리라는 산업 건축물을 배경으로 당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묘사한 데서 ‘근대성’이라는 인상주의의 핵심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유럽교란 명칭은 없어졌다. 다리를 지나 연장된 거리는 비엔가로 불린다. 트러스 구조의 철제 난간도 사라졌다. 야트막한 콘크리트 담장 위에 평범한 격자형 난간이 설치돼 있을 뿐이다.
Gustave Cailebotte,The Europe Bridge,1876,oil on canvas, 32.9 x 45.5 cm,
Gustave Cailebotte,Paris Street, Rainy Day, 1877, oil on canvas, 212.2 X 276.2 cm, 시카고미술관, 일리노이,미국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1.귀스타브 카유보트, 『유럽교 위에서』 (1876~1877) - 근대의 풍경 / 서울신문 , 2019. 7. 18.
◆[구스타프 카유보트의 작품세계]를 더 보시려면 아래 URL을 클릭하세요
[구스타프 카유보트의 작품세계] Ⅰ http://blog.naver.com/ohyh45/20129621097
[구스타프 카유보트의 작품세계] Ⅱ http://blog.naver.com/ohyh45/20129624495
[구스타프 카유보트의 작품세계] Ⅲ http://blog.naver.com/ohyh45/220491075110
[구스타프 카유보트의 작품세계] Ⅳ http://blog.naver.com/ohyh45/220491105838
2-1.로베르 들로네, 『에펠탑』 또는 『샹드마르스, 붉은 탑』 (1910~1914) - 시간의 탄생
▲ 로베르 들로네, ‘에펠탑’ 또는 ‘샹드마르스, 붉은 탑’, 1910~1914년, oil on canvas, 160.7x128.6㎝,
아트 인스티튜트 오브 시카고,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19세기 말까지 사람들은 단일한 시간에 따라 살지 않았다. 농촌 사람들은 해의 위치를 보고 대강의 때를 가늠했고, 마을 종탑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시간의 유일한 기준이었다.
한국에서도 타종으로 시간을 알렸다. 특히 조선 시대 기상청인 서운관의 관리는 물시계를 보고 일정한 간격으로 종을 쳐야 했다.
단일한 시간이 필요하게 된 것은 철도의 등장 때문이었다. 지역마다 제각각 다른 시간은 철도의 효율성을 저하시켰고, 철도회사의 이익을 갉아먹었다. 이 때문에 정부보다도 철도회사가 표준시 수립에 앞장섰다. 영국은 1855년, 미국은 1883년에 표준시를 채택했다. 프랑스 철도는 자존심을 내세워 1890년대까지 그리니치 시간보다 9분 21초가 빠른 파리 시간을 사용했다.
전 세계적으로 시간을 단일화해야겠다는 생각은 1880년대에 대두했다. 무선전신이 발명되면서 지구 곳곳에서 발생하는 일을 그 즉시 인식하게 됐고, 지구적 시간을 확정하는 일이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1912년 프랑스 파리에서 국제시간회의가 개최됐다. 참석한 사람들은 정확한 시간을 정의하고, 그것을 세계로 전송하는 방식을 논의했다.
1913년 7월 1일 오전 10시 에펠탑이 전 세계를 향해 최초의 시보를 발신했다. 에펠탑은 파리 천문대의 시간을 받아 전 세계에 있는 8군데 기지국으로 전송했다. 인류는 좋든 싫든 단일한 시간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마르셀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 같은 작가가 왜 그렇게 시간의 흐름이라는 문제에 집착했는지 이해가 간다.
미술에서도 이 시기에 커다란 변혁이 일어났다. “무엇을 그렸는가?” 하는 지시 대상이 사라지고 선·면·색으로만 이루어진 추상미술이 등장하는 것이다.
추상미술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랑스 화가 로베르 들로네가 그린 ‘에펠탑’ 또는 ‘샹드마르스, 붉은 탑’이라 부르는 그림이다. 입체파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단계를 볼 수 있다.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2.로베르 들로네, 『에펠탑』 또는 『샹드마르스, 붉은 탑』 (1910~1914) - 시간의 탄생 / 서울신문 , 2019. 7. 31.
2-2.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
‘에펠탑 화가’, 로베르 들로네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맞은 1889년의 파리. 때맞춰 개최된 만국박람회에서는 유럽 각국의 선진문물과 아프리카, 아시아등 유럽과는 생소한 지역의 이국적인 문명이 소개되고 있었다.
오늘날엔 서구의 우월성과 세3세계의 후진성을 강조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전시 이데올로기’였다 라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재고되고 있는 만국박람회는 당시 개최국 프랑스가 경쟁국이었던 영국을 압도하는 선진성과 문화적 우월성을 과시하고자 만든 전대미문의 혁신적인 건축물 에펠탑(Eiffel Tower)과 함께 국가적 이미지와 위상을 대외적으로 선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파리의 상징이 된 에펠탑은 완공당시에는 회의적인 반응도 많았으나 근대 과학기술과 건축기술의 상징적 존재였던 이 거대한 철골 구조물에 대중들과 새로운 것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젊은 예술인들은 열광했다.
인상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가의 작품에 기념비처럼 등장하는 에펠탑. 이들 중 에펠탑을 주제로 한 작품을 30점도 넘게 그린 프랑스 화가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 1885.4.12-1941.10.25.)는 단연 ‘에펠탑 마니아’ 였다.
색채의 스펙트럼을 담은 혁신적인 추상화
▲ Robert Delaunay, <나무와 에펠탑>,1910
Robert Delaunay, Der Eiffelturm,1910, oil on canvas, Staatlieche Kunsthalle Akalsruhe,
인간의 욕망은 끝없이 하늘 높이 오른다.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의 존재 여부를 떠나 하늘 높이 건물을 지으려는 노력들은 19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세계 박람회의 출입 관문으로 건축된 '에펠탑'(Eiffel Tower) 은 그 높이가 324m로 81층 건물과 맞먹을 정도여서 당시로는 대단한 건축물이었다.이 기록은 1930년 크라이슬러 빌딩이 완공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 유명세를 떨쳤다.
Robert Delaunay, Tour Eiffel, 1910, oil on canvas, Kunstsammlung Nordrhein-Westfalen
▲ Robert Delaunay, 로베르 들로네, <our Eiffel>,1911
▲Robert Delaunay, <Champs De Mars :The Red Tower>,1911,oil on canvas, 160.7 X128.6 cm,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에펠탑의 공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많은 파리의 예술가들은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하며 탑에 대해 풍자적인 비판과 모욕들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공사가 끝나자 모파상을 비롯한 극소수를 빼고는 그 동안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던 예술가들도 세기의 기념탑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그 중 프랑스 화가 로베르 들로네 역시 에펠탑에 대한 찬사와 함께 탑을 주제로 생생한 율동감과 색채의 조화를 개성적으로 구사한 작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러한 경향들은 당시 유행했던 전통적인 입체파 작품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새로운 화풍인 '오르피즘'(Orphism)을 통해 색채성이 풍부한 추상을 완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들로네는 입체파 화가들이 기타나 물병의 형태를 깨뜨리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에펠탑을 부셔버렸다. 당시 대상을 충실하게 재현하자니 탑이 작아져서 웅장한 맛이 없어지고, 이탈리아식의 원근법을 따르자니 탑이 지나치게 날씬해져서 에펠탑이 가진 양감을 제대로 살릴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들로네는 열 개의 서로 다른 시점과 열다섯 종류의 심도를 설정해서 일부는 위에서 내려다보이게 하는 등 변화를 주었다.
그의 에펠탑 시리즈 작품 중 하나인 은 300m라고 하는 높이가 주는 현기증을 그대로 살려내기 위해 탑을 분해해 제일 높은 첨탑 부분은 복원시키고, 탑의 밑 부분은 잘라낸 후 탑을 약간 기울여 놓았다.
수축되고 확산되는 동적이고 음악적인 리듬감이 가미된 역동적인 그의 화풍은 아내이며 화가였던 소니아 들로네(Sonia Delaunay-Terk)와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의 모임인 청기사파에 큰 영향을 끼쳤다.
Red Eiffel Tour(La tour Rouge),1912, oil on canvas,125 X 90.3 cm, Solomon R. Guggenheim Museum
Robert Delaunay, 에펠탑과 샹 드 마르스 공원, 1922년, 워싱턴 D.C. Hirshhorn Museum and Sculpture Garden
Eiffel Tour, 1922, oil on canvas, 미국 워싱톤 DC, 내셔널 몰 내 Hirshhorn Museum and Sculpture Garden
Robert delaunay, la torre eiffel, 1926, oil on canvas, 169 X 86 cm,
▲Robert Delaunay, <Eiffel Tour>,1926
들로네의 에펠탑은 당시 파리의 역동성과 현대적인 느낌을 가장 잘 보여준다. 분할된 다시점의 표현과 테크놀로지를 찬양하는 기계미학의 관점이 포함된 들로네의 작품은 한때 큐비즘과 미래주의를 절충한 양식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들로네의 그림에는 큐비즘과 미래주의가 가지지 못한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감각적인 색채에 의한 감정적인 효과’였다.
▲ Robert Delaunay, <카디프 팀>,1912-1913
<카디프 팀>은 들로네가 오르피즘이라는 새로운 미술운동의 포문을 연 작품으로 평가 되는 작품이다. ‘오르피즘’이라는 명칭은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가 <카디프 팀>을 보고 만들어낸 용어로, 시적인 색채와 율동적인 형태가 음악을 연상시키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영혼을 울리는 연주로 신을 즐겁게 했다는 전설속의 시인이자 기악인인 오르페우스의 이름에서 연유한 오르피즘. 아폴리네르는 들로네의 작품에서 기존의 예술과는 완전히 다른 요소를 발견한 것이다.
▲ 로베르 들로네, <연속적인 창문>,1912
1911년 들로네는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의 권유로 청기사파에 합류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그의 작품은 점차 추상에 이르게 된다. 그림에서 구상을 점진적으로 제거해 나가며 오직 색채와 빛으로 전달되는 에너지를 표현하고자 한 그는 <연속적인 창문>연작에서 완전한 추상에 다다르게 된다.
빛이야 말로 유일한 리얼리티라고 믿은 들로네는 색채의 상호작용에 대한 실험으로 구체적인 시각인상에 근거를 두지 않은 순수 추상을 완성한 것이다. 들로네가 남긴 “색채의 동시 대비를 통해 색채는 역동성을 찾게 되며 그림에서 색채의 구성이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이는 현실표현의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된다” 라는 말에서 그가 색채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 로베르 들로네, <블레리오에게 바치는 경의>,1914
로베르 들로네는 색채의 동시대비효과를 극으로 발전시킨 추상 작품을 선보인 작가이다. 화학자 슈브뢸의 동시대비효과에 대한 탐구에서 출발한 들로네는 종국에는 과학적인 분석을 초월하여 색채 자체의 신비한 힘을 중시하게 된다.
색과 자연세계 사이의 연관성과는 무관하게 서로 다른 순색을 병치해 칠함으로써 다각적인 입체감과 움직임, 빛과 감흥으로 가득 찬 그림세계를 ‘동시대비’ ‘창’ 등의 연작에서 보여주었다. 이 화풍을 시인 아폴리네르는, 오르페우스가 하프를 연주하면 목석이 춤을 추고 맹수도 얌전해졌다는 그리스의 전설을 연상케 한다 해서 오르피즘이라 명했다.
1914년에 들로네가 그린 ‘블레리오에게 바치는 경의’는 1909년에 36분30초 만에 도버해협을 건너는 비행에 최초로 성공한 블레리오를 기리는 작품이다. 프로펠러가 힘차게 회전하고 있는 듯 원색의 원반들이 가득 찬 화면 속에서 에펠탑과 비행기의 모습도 찾을 수 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처음 발명한 기술자였던 블레리오가 10여년간 직접 고안하고 실험하며 완성시킨 블레리오 11호의 성공은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을 의미하였다. 이 그림 하단에 “최초로 하늘에 동시에 떠오른 태양 원반들을 위대한 비행기 제작자 블레리오에게 바침”이라고 들로네는 적었다.
로베르 들로네, 돼지들과 함께한 회전목마, 1922.
들로네의 작품 <블레리오에게 바치는 경의>는 그가 이 그림을 그리기 5년 전인 1909년에 단발 비행기를 타고 도버해협을 건너는 비행에 최초로 성공한 루이 블레리오를 기리는 작품이다. 들로네는 컬러차트와도 같은 크고 작은 선명한 원반들로 구성된 이 작품 하단에 “최초로 하늘에 동시에 떠오른 태양 원반들을 위대한 비행기 제작자 블레리오에게 바침”이라는 문구를 적었다.
그림의 주제로 정물을 선호한 입체주의와는 다르게 기술과 현대인의 삶을 주로 다룬 들로네가 인간으로서 하늘을 정복한 블레리오 위업을 그만의 독창적인 ‘색의 폭죽’으로 축하한 것이다.
예술과 인생의 소울메이트
들로네의 부인이자 상호의존적인 예술동료였던 소니아 들로네(Sonia Delaunay-Terk, 1885.11.14-1979.12.5)역시 애초부터 아카데믹한 미술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우크라이나태생의 그녀는 1905년 프랑스 미술학교에 입학하지만 전통적인 미술수업에 실망하고 당시 전위예술이었던 신인상파나 야수파 등의 작품을 직접 보기위해 파리 주변의 갤러리에서 학교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1910년 들로네와 결혼한 후 함께 새로운 유파인 오르피즘을 발전시키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남편과 함께 스페인에 건너갔다가 패션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1924년 파리에서 패션 스튜디오를 열고 패션디자이너의 경력을 시작하게 된다.
▲ 소니아 들로네, <일렉트릭 프리즘>,1914년
▲ 소니아 들로네가 디자인한 의상을 입은 모델들
들로네가 오르피즘 스타일의 작품으로 활동하던 1920년대에는 남편의 명성에 가려진 그녀였지만, 이후 회화와 패션 디자인을 아우르는 진보적이고 과감한 시도로 현재는 그녀의 명성이 남편을 넘어서고 있다.
양차대전 속에서 러시아 출신의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독일 군을 피해 끊임없이 피신을 다니며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도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현대적인 감각의 작품을 남겼고, 특히 세련된 기하학적인 패턴의 의상 작업으로 근대적 패션의 중요한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출처] http://blog.daum.net/gonghana/21286
3. 에두아르 마네, 『깃발이 나부끼는 모스니에가』 (1878) - 풍경의 이면
광복절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보수 우익은 광복절을 건국절로 하자는 주장을 펼쳐 이에 반대하는 학계, 진보 진영과 대립했다. 프랑스에서도 국경일을 놓고 보수와 진보가 대립한 일이 있었다.
1789년의 대혁명은 프랑스 국기와 국경일에 아로새겨져 있다. 공화파가 자유, 평등, 박애의 상징으로 치켜들었던 삼색기는 프랑스 국기가 되었고, 바스티유 습격이 일어났던 7월 14일은 국경일이 됐다.
▲ 에두아르 마네, ‘깃발이 나부끼는 모스니에가’, 1878년, oil on canvas, 65.4×80㎝,
게티미술관,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1870년 7월 나폴레옹 3세는 프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의 기대와 달리 보불전쟁은 두 달 만에 프랑스의 참패로 끝났다. 황제는 영국으로 도망쳤고 아무도 이 사태에 책임지지 않았다. 이후 혼란 속에 시행된 1871년 2월 선거에서 농민층의 불안을 이용해 왕당파가 압승을 거두었다.
이 왕당파가 굴욕적인 휴전 협상과 왕정복고를 추진하자 파리의 노동자들은 보수 정부에 반대해 봉기했다. 파리는 해방구가 됐고 코뮌이 선포됐다. 정부는 적국인 프러시아보다 자국의 노동자들을 한층 더 두려워한 탓에 군대를 동원해 ‘파리 코뮌’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보수 우익은 혁명의 기억을 지우려 했다. 삼색기를 왕정의 상징인 백합 문양 기로 교체하려 했고, 7월 14일을 기념하는 것도 금지했다. 1878년 정부는 6월 30일을 ‘평화와 노동의 날’이라는 국경일로 정하고 대대적으로 축하했다.
거리마다 삼색기가 나부꼈고 프랑스는 패전과 코뮌의 상처를 딛고 화합과 번영의 길로 나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인위적인 국경일을 만들고 그럴듯하게 포장한다고 해서 민중이 흘린 피가 쉽게 지워지겠는가.
이 그림은 바로 그해에 그려졌다. 마네는 아틀리에에서 밖을 내다본다. 거리에는 여름 햇살이 가득하고 마차와 행인들이 오간다. 왼편에는 건설공사 현장이 보이고 하단에는 사다리를 멘 인부의 머리가 흘낏 보인다. 우리의 시선은 사다리 위쪽 목발 짚은 남자에게 쏠린다. 보불전쟁의 상이용사일까? 파리 코뮌에서 살아남은 노동자일까? 그의 구부정한 뒷모습이 환호하듯 나부끼는 깃발과 대조된다.
1879년 선거에서 다수당이 된 공화파는 왕당파의 조치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1880년에 7월 14일을 국경일로 되돌렸고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3. 에두아르 마네, 『깃발이 나부끼는 모스니에가』 (1878) - 풍경의 이면 / 서울신문 , 2019.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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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의 작품세계Ⅰ[인물화①] http://blog.naver.com/ohyh45/20116297400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세계Ⅱ[마네와모네] http://blog.naver.com/ohyh45/20137331828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세계Ⅲ[인물화②] http://blog.naver.com/ohyh45/20137335023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세계Ⅳ[풍경,정물] http://blog.naver.com/ohyh45/20169527653
4.레서 우리, 『브란덴부르크문이 보이는 운터덴린덴』 (1920년대) - 베를린의 우울
▲ 레서 우리, ‘브란덴부르크문이 보이는 운터덴린덴’, 1920년대, oil on canvas, 49.5x35.3㎝, 개인 소장.
Lesser Ury - Unter den Linden,1925, pastel om cardboard,35.5 X 49.7 cm, private collection
베를린에는 황제들이 살던 궁전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궁전은 폭격으로 심하게 손상됐다. 동베를린을 점유한 동독 당국은 부서진 궁전을 아예 철거해 버렸다. 통일 후 정부는 이 궁전을 되살리기로 했고, 현재 거의 완공 단계에 도달했다. 여기서부터 브란덴부르크문까지 이어지는 대로가 운터덴린덴이다. 도로 분리대 대신 피나무가 늘어선 산책로가 조성돼 있어서 사람들은 그늘을 거닐며 숨을 돌릴 수 있다.
대로 끝에 이르면 그리스식 열주가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브란덴부르크문과 만나게 된다. 이 장엄한 건축물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때 세워졌다. 그의 큰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는 46년 동안 프러시아를 다스리며 독일 동북부에 치우친 그저 그런 나라를 유럽 최강국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동성애자였던 탓에 후사가 없었다. 큰아버지로부터 탄탄한 나라를 물려받은 운 좋은 조카는 통치 능력은 변변찮았으나 베를린을 수도의 위상에 걸맞은 도시로 개조한 공적을 남겼다.
습지에 세워진 베를린은 제방과 운하, 목조 다리가 뒤엉켜 있었다. 왕이 벌인 건축 사업의 첫 번째 결실이 브란덴부르크문이었다. 1791년에 완공된 브란덴부르크문은 독일 근현대사의 역사적 현장이 돼 왔다. 베를린을 점령한 나폴레옹 군,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독일 병사들, 기세등등한 나치스, 소비에트 기를 펄럭이는 소련군이 차례로 이 문을 지나갔다. 굳게 닫힌 채 냉전을 상징하던 문은 오늘날 평화와 통일의 상징이 됐다.
이 그림은 1920년대의 운터덴린덴을 보여 준다. 코트 깃을 여미고 우산을 쓴 사람들이 총총 지나간다. 원경에 브란덴부르크문이 보인다. 승리의 여신이 모는 사두마차의 실루엣이 뚜렷하다. 줄지어 지나가는 자동차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임을 말해 준다. 전쟁은 독일의 패전으로 끝났다. 독일은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로 따가운 논총을 받았으며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승리를 장담하며 전쟁을 부추겼던 정치가, 장군, 사회지도자들 중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았다. 정치 상황은 어둡고 인플레는 심각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에게 우울함이 느껴지는 것은 괜한 상상이 아니리라. 게오르크 그로스, 오토 딕스 같은 젊은 화가들은 전후 베를린의 황폐한 모습에 절망하고, 중산층의 이기적인 뻔뻔함에 분노했지만, 노년에 접어든 인상주의 화가는 우수에 잠겨 축축한 거리를 바라볼 뿐이다.
Leipziger StraBe,1889, oil on canvas,
im cafe Bauer, 1895, oil on canvas,
Daman, einer Droschke Entsteigend, 1920, oil on canvas,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4.레서 우리, 『브란덴부르크문이 보이는 운터덴린덴』 (1920년대) - 베를린의 우울 / 서울신문 , 2019. 8. 28.
5.존 오코너, 『루드게이트, 저녁』 (1887) - 화재의 기억
얼마 전 브라질 국립박물관에서 일어난 화재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류학, 고고학 유물 2000만여점이 사라졌다. 십 년 전 숭례문이 불쏘시개처럼 타오르는 광경을 보아야 했던 기억이 겹치면서 안타까움이 더했다.
▲ 존 오코너, ‘루드게이트, 저녁’, 1887년, oil on canvas, 150 X105.5㎝, 개인 소장.
런던은 ‘유구한’ 화재의 역사를 지닌 도시다. 세인트폴성당은 961년에 불타 없어졌고 새로 지었으나 1087년 또 불이 났다. 세 번째 석조 건물은 오래 버텼으나 1666년 ‘런던 대화재’ 때 크게 손상돼 또다시 재건축했다. 그야말로 불사조 같은 존재다.
런던의 인구는 17세기에 파리와 비슷해졌고, 17세기 말에는 파리를 앞질러 유럽 최대가 됐다. 인구가 늘면서 비좁은 길에는 목조가옥이 다닥다닥 들어섰다. 집 안에서 불을 때서 난방과 요리를 했기 때문에 화재가 빈번했고, 사소한 실수가 큰불로 이어지곤 했다. 헨리 8세가 앤 볼린과 결혼식을 올렸던 화이트홀 궁전은 1698년 화재로 전소됐다. 한 하녀가 주인의 옷을 화로에 너무 바싹 갖다 대고 말리다 일어난 불이었다.
화재가 잦다 보니 1666년 9월 2일 아침 푸딩레인에 있는 제빵소에 불이 났을 때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잠이 깬 런던시장은 “흠, 누가 오줌으로 끄겠지” 하고는 도로 침대로 들어갔다. 불행히도 때마침 부는 강풍을 타고 불은 확산해 나흘 동안 지속하면서 도시의 60퍼센트를 집어삼켰다.
찰스 2세는 이 기회에 런던을 암스테르담, 파리에 버금가는 도시로 만들어 보려고 했다. 비용 조달 문제, 토지 분쟁 등으로 목표를 이루진 못했으나 런던의 면모가 한결 나아진 것은 사실이다. 세인트폴성당은 가장 공들인 건물이었다. 천문학자이자 건축가였던 크리스토퍼 렌이 설계를 맡아 1710년 위용을 드러냈다.
‘루드게이트, 저녁’은 1887년 아카데미 전시회에서 격찬을 받은 작품이다. 이미 후기 인상주의가 출현한 마당에 이런 아카데미 화풍은 고루해 보인다. 하지만 19세기 말 런던 거리의 모습을 정확하게 재현했다는 장점은 있다. 세인트폴성당 앞을 가로지르는 루드게이트 철교 위로 기차가 지나간다. 이 노선은 없어진 지 오래이고 철교도 철거됐다. 루드게이트힐이라는 지명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From Pentonville Road Looking West, Evening, 1884, Museum of London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5.존 오코너, 『루드게이트, 저녁』 (1887) - 화재의 기억 / 서울신문 , 2019. 9. 12.
6.베르트 모리조, 『로리앙의 항구』 (1869) -가지 않은 길
1841년생인 베르트 모리조는 두 살 위인 언니 에드마와 십대 때부터 그림을 배웠다.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미술관에 가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했고, 선배 화가들을 찾아다녔다. 자매의 재능과 열정이 범상치 않자 이들을 가르치던 조제프 귀샤르는 모리조 부인에게 경고했다.
“따님들이 아마추어로는 만족하지 않고 진짜 화가가 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이런 상류층 집안에서는 혁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재앙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베르트 모리조, ‘로리앙의 항구(The Harbor at Lorient)’, 1869년, oil on canvas, 43.5 X 73 ㎝,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미국 워싱턴.
여성에게 직업이 허용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양갓집 딸들이 미술을 배우는 이유는 오로지 교양 있는 신붓감이 되기 위해서였다. 어머니의 근심은 아랑곳없이 자매는 농가를 빌려 살롱에 출품할 그림을 준비했다. 1864년 살롱에 두 자매의 그림이 걸렸다.
서른이 가까워 오자 에드마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상류층 집안의 해군 장교와 결혼했다. 언니가 결혼하자 베르트는 우울증에 빠졌다. 그림을 계속해야 할지, 포기하고 결혼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다 남편의 근무지 로리앙에 신혼살림을 차린 언니를 보러 갔다. 오백 킬로미터 넘는 마차 여행의 피곤에도 불구하고 모리조는 붓을 들어 그림을 그렸다.
원경에는 만을 에워싼 집들, 항구에 정박한 배들이 보이고, 오른쪽 방파제에는 에드마가 앉아 있다. 잔잔한 바다에는 구름과 배, 건너편 언덕이 비쳐 있고, 에드마의 드레스와 양산은 빛을 받아 환하다. 가운데를 비운 구도도 대담하지만, 모리조가 순간의 느낌과 빛을 포착하는 인상주의 주제를 실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파리에 돌아온 모리조는 이 그림을 마네에게 보여 주었다. 마네는 이 그림이 ‘그리다 만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썩 마음에 들어서 자기한테 주면 안 되겠냐고 부탁했다. 숭배하는 마네로부터 인정을 받은 모리조는 뛸 듯이 기뻐했고 자신감이 넘치게 됐다.
1876년 제2회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렸을 때 한 비평가는 대여섯 명의 정신 나간 작자들 모임이라고 빈정대며 그중에 여자도(!) 하나 끼어 있다고 개탄했다. 그 정신 나간 여자가 바로 모리조였다. 모리조는 열성적으로 인상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여덟 번의 전시회 가운데 몸이 아파 불참한 제4회를 빼고는 매번 참가했으며 마침내 한 명의 당당한 화가로 우뚝 섰다.
발코니에서 on the Balcony, 1872
마네의 그림, 상복을 입은 베르트 모리조 Manet, Berthe Morisot with a Bouquet of Violets, 1872
마네의 그림인 이 작품 속 여인은 베르트 모리조다. 마네는 모리조의 초상화를 모두 11점이나 그렸다. 이지적인 외모에 고집도 있어 보이는 그녀는 인상파의 초기 멤버이자 인상파의 특징을 그녀의 작품 속에 그대로 보여주었던 화가이다.
모리조는 부유한 공무원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법 보좌관으로 권력과 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열정적인 아마추어 화가이자 미술가들의 후원자였다. 모리조가 평생 중상류층 계급의 일원으로 살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아버지의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매들은 당시 관습대로 좋은 결혼을 위해 다양한 교육을 받았다. 어학과 문학, 미술 선생님을 두고 공부를 했는데 미술 선생님이었던 코로의 지도 아래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미술에 발을 내딛는다. (그림 제목을 직역하면 ‘제비꽃 다발을 든 베르트 모리조’인데, 제비꽃은 상중임을 나타낸다. 마네는 1872년에 아버지를 여읜 모리조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제목을 ‘상복을 입은 베르트 모리조’라 했다.
27세가 되던 1868년 겨울, 모리조는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에두아르 마네를 만나게 된다. 이미 마네의 명성과 그가 미술에서 일으킨 혁명을 알고 있었다. 그때 마네는 36세였다.
마네와 모리조의 관계는 좀 특이하다. 마네에게서 여러 가지를 배운 것만 가지고 본다면 스승과 제자일 수도 있겠으나, 모리조가 제안한 독특한 구성과 방법을 작품 속에 받아들였고 그것에 감사를 표한다고 마네가 이야기한 것을 보면 동지 같은 느낌도 든다. 마네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모리조에게 이젤을 선물할 만큼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33세가 되던 1874년, 마네는 나중에 인상파가 된 그 모임에 가입할 것을 모리조에게 권유한다. 그 모임에는 모네, 르누아르, 파사로, 드가 같은 화가들이 구성원이었다. 드가와 그의 동료들은 그녀의 작품을 보고 인상파의 좋은 예가 된다고 선언한다. 동료로 받아들인 것이다. 부드러운 붓 터치와 마무리되지 않은 배경, 그리고 빛이 우러나는 색 등이 그들이 말한 이유였다
모임을 만나던 그해, 모리조는 인상파 전시회에 처음 참여했고 전문 화가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12월 모리조는 마네의 동생 외젠 마네와 결혼한다. 외젠 마네는 작가였는데 결혼을 한 후 그는 철저하게 아내가 가진 화가로서의 인생을 존중해준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이 색과 빛의 효과에 열광할 때 모리조와 마네는 자연스러운 느낌을 갖도록 전통적인 접근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나중에 모리조는 마네에게 팔레트에서 검은색을 버리라고 말한다. 그것은 인상파의 주류를 따르라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계속해서 살롱전에 전시된 인상파 화가는 모리조와 드가뿐이었다.
모리조는 자신의 작품이 판매되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신 동료들, 마네와 모네, 르누아르의 작품들을 구매했다. 이렇게 모인 작품들은 나중에 딸 쥘리에게 물려지게 된다. 54살이 되던 해 아픈 딸을 간호하다가 모리조는 폐렴에 걸렸고 결국 이 병으로 그녀는 세상을 떠난다. 그녀가 묻힌 곳은 마네와 남편 외젠의 옆자리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화가보다는 마네의 친구이자 모델로 더 알려졌고, 1905년 런던에서 열린 인상파 전시회에 그녀 작품 13점이 전시되기 전까지는 국제적으로도 그녀의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모리조는 페미니즘 역사가들로부터는 19세기 잊혀진 여류 화가 중의 한 명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살아서보다는 최근 더 많은 영예를 누리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같은 인상파 화가인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덜 평가를 받았다면 지금에라도 자기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 당연하다.
요람 The Cradle, 1872, 56 x 46cm
아일 오브 와이트 섬의 외젠 마네 Eugene Manet on the Isle of Wight, 1875, 38x46cm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6.베르트 모리조, 『로리앙의 항구』 (1869) -가지 않은 길
/ 서울신문 , 2019. 10.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