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가 총을 들고 대항할 수 있는 나라, 일반상식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목사가 어떻게?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남을 살려야 하는 직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게 가능합니까? 물론 사람에 따라서 그리고 자기가 지니고 있는 사명감에 대한 인식에 따라 달리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반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사회적 신분의 사람들에 대하여 선입관이나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누구는 이래야 한다, 라는 꼬리표입니다. 예를 들어 경찰은 어떠해야 하고 선생님은 어떠해야 하고 공직자는 어떠해야 하고 등등입니다. 그 가운데 성직자는 특히 엄중합니다. 어쩌면 예외라는 것이 인정되기도 어렵습니다.
사실 잘 아는 대로 미국이라는 나라는 총으로 세워진 국가입니다. 총으로 토착민을 몰아내고 세운 나라입니다. 당연히 저항을 받아야 했고 방어를 해야 하고 초기에는 그런 것들을 맡아 해결해줄 국가적 능력이 부족하고 미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각자도생의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각자 능력껏 자신을 지키며 살아남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누구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유롭게 총기를 소지할 수 있습니다. 당연이 총기 생산과 구매가 쉽게 이루어집니다. 이게 국가 경제를 좌우하게까지 큰 산업이 됩니다. 사람들은 생존본능을 따라 총기를 맘대로 가질 수 있고 그것은 사회의 경제를 이끌어갈 수 있는 산업 동력이 되기도 하니 규제하기 어려워집니다.
중요한 것은 2백 년 이상을 유지해온 이 문화를 새롭게 바꾸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매년 총기사고가 빈발하게 발생해도 어쩌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냥 그 때가 지나면 총기규제 아우성이 금새 잦아들게 마련입니다. 여전히 능력껏 각자도생의 환경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악한 무리가 어느 날 교회로 침입하여 성도들을 무차별 공격한다면 어찌 하겠습니까? 그냥 다 죽게 내버려둡니까? 혹 그런 사고를 예측하고 있다면 목사라도 성도들을 지켜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우째 이런 일이!’ 하면서 우두커니 당하고 함께 죽어야 합니까? 자신이야 사명감으로 그렇다 할지언정 성도들이 왜 당해야 합니까?
참으로 황당하기는 합니다. 강대상 밑에 총기를 숨겨두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현실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어쩌면 눈감아주실는지 모르겠습니다. 보안관 아버지의 외아들 ‘일라이’는 어느 날 갱단의 습격으로 아버지를 잃습니다. 더구나 아직 어린 소년임에도 사기재판으로 20년 형을 받고 옥에 수감됩니다. 그렇게 20년을 지내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마을은 그들의 세상이 되어 지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라이가 형기를 마치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제는 그 때의 소년이 아닙니다. 어쩌면 다 잊고 조용히 고향에서 살고자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환경이 그러하지 못합니다.
조용한 삶은 자기만의 꿈입니다. 죽이려고 달려드는데 어쩌지요? 일단 살고봐야 합니다. 더구나 연관된 이웃사람들까지 곁들여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혼자만의 생존욕구가 아닙니다. 이 마을을 살려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 축제를 벌이고 있는데 그들이 가면을 쓰고 등장합니다. 그리고 무차별 총기를 난사합니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쓰러지고 아우성치며 숨고 야단입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나타나 그들을 향해 대응 사격합니다. 예기치 못한 반격에 그들은 급히 도주합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일라이도 간신히 살아남기는 합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숨겨두었던 총을 꺼냅니다. 그렇게 살려고 온 것은 아니지만 도리 없습니다.
일라이는 장총 권총을 준비하여 그들의 모이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하나씩 제거합니다. 그러나 중과부족, 혼자서 감당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이리저리 숨어다니며 하나씩 처리합니다. 결국 자신도 부상을 당하지요. 그래도 숨어사는 주민들조차 마음으로라도 그들을 저항하고 있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다만 자기만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기에 침묵하며 따라사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함께 할 수 있는 동지를 발견하면 과감히 나설 수 있습니다. 힘을 받은 것이고 힘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과거 보안관 밑에서 교수형 집행을 맡았던 사람이 비록 늙었지만 기꺼이 동역자가 되어줍니다. 물론 일라이에게 큰 도움이 되지요.
남은 우두머리가 총상을 입은 여자 목사님을 붙잡아 교수대로 향합니다. 일라이도 부상을 입었으니 힘을 쓰지 못하고 당하는 것을 보기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형을 집행하려는 순간 총성이 들립니다. 바로 그 노인이 된 교수형 집행관입니다. ‘교수형 집행자는 나 하나면 족하지.’ 여자이지만 그 사회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자기 스스로 보존하는 능력을 지녀야 살아남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라니, 대단합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그런 사회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도 다행이고 감사합니다. 혹 뜻하지 않게 총잡이로 살지 않았을까 모르겠습니다. 정말 험악한 세상이고 살맛없는 세상 아닙니까? 영화 ‘치트 더 행맨’(Cheat the Hangman)을보았습니다. 2019년 작입니다.
첫댓글 좋은날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