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스러운 태도
장성숙/ 극동상담심리연구원, 현실역동상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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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사목을 하는 어느 신부님이 동료의 권유로 내가 개최하는 현실역동 집단상담에 참석했다. 그는 병원 사목을 위해 공부를 하면서 상담자는 으레 따뜻하고 공감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배웠는지 우리의 진행방식에 당혹스러워했다. 공감적으로 말하려 애쓰지 말고 거울로 비춰주듯 느끼거나 생각한 바를 솔직하게 피드백해주라고 나는 사람들에게 말했고, 그리하여 사람들은 적나라하게 말하는 경향을 보였던 때문이다.
뭔가 석연찮음을 표현했었던 그 신부님이 다음 해에 다시 집단상담에 참여했다. 참석을 권했던 동료가 한 번 더 경험해보는 게 좋다고 말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처음보다는 마음이 열렸던 덕분인지 그는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아픔을 토로했다. 오래전 자기가 보좌 신부일 때 자기를 함부로 대했던 주임 신부님을 용서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런 이야기에 철쭉님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라고 하였고, 일련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경청하고 나서는 그에게 주임 신부였던 분을 찾아가 말하면 그가 사과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제의에 그는 갸우뚱하며 반신반의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그를 대신해 철쭉님에게 만약 그 주임 신부가 화를 내거나 함부로 하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철쭉님은 후배가 찾아와 예의를 갖추며 그런 말을 하는데, 미친 자가 아니라면 사과를 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는 것은 상대가 약해 보이기 때문이라며, 늦게나마 그 보좌 신부가 이제 어른이 되어 또박또박 말을 하는데 어떻게 함부로 굴겠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말에 힘을 받았는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단상담을 마치고 돌아가는 즉시 그는 그 주임 신부를 찾아가서는 예전의 일에 대해 서운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주임 신부는 그 당시 자기가 미쳤던 것 같다며 얼른 사과하였다. 이렇게 해 한순간에 앙금을 풀었던 그 신부님은 돌아오는 길에 내게 전화를 걸어 흥분된 어조로 기쁨을 전하며 다시 집단상담에서 가서 인사드리겠다고 하였다.
그 신부님이 이번 겨울에 또다시 집단상담에 참석했는데 이미 현실역동 집단상담의 가치를 인정해서인지 누구보다 열심히 임했다. 그런데 집단상담에서 어떤 사람이 다소 과장되게 자기를 과시하는 것 같은데, 그 신부님은 액면 그대로 그의 말을 믿으며 찬양하였다. 누군가를 순수하게 믿는 것이 좋은 것이긴 하지만 자칫하다가 휘둘릴 수 있다고 여긴 나는 너무 순진한 것도 흠이 될 수 있다고 그에게 일렀다. 나아가 정에 굶주린 여자들이 많은 만큼 혼자 사는 사제가 너무 따듯하면 위험하다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즉 온유함만이 아니라 단호함도 갖출 필요가 있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나의 지적에 자극을 받았는지 그 신부님은 2주 후에 시작되는 집단상담에 연거푸 참석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온유하게만 응대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이나 의사를 있는 그대로 즉 부정적인 피드백도 서슴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점은 그가 남의 말을 경청하거나 자신의 말을 할 때 아주 공을 들이며 정성껏 하는 거였다. 그래서였는지 다른 사람들도 그가 하는 말에는 저항을 보이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이러한 광경을 바라보던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아주 정성스럽게 듣고 공들여 말하는 모습에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나의 말에 동조하며 이구동성으로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 신부님은 과찬이라며 쑥스러워하면서도 기뻐하였다.
집단상담을 마친 후 나는 그 신부를 떠올리며 나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봤다. 나도 초보 상담자 시절에는 내담자에게 온통 집중하느라 몇 시간 상담하고 나서는 눈까풀이 무거울 정도로 지치곤 했었다. 하지만 내담자에 대한 파악이 점점 기민해지면서 나의 태도는 많이 변했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미 이해한 상태에서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게 지루했던 나는 딴짓을 하곤 했다. 가령 귀를 후빈다든가, 책상 위에 놓여있는 거울을 본다든가, 종이접기를 한다든가 하는 식의 동작을 보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이러한 나의 산만한 태도에 의아해하며 불만을 터트린 사람도 간혹 있었지만, 나는 그러한 항의에 무안해하면서도 그다지 조심하지 않았다. 내심 ‘들을 것을 다 듣는데 뭘 그리 까다롭게 구는가!’ 하고 방심했다.
그런데 이번에 상대가 누구든, 어떤 식으로 말하든 시종일관 공들여 듣는 그 신부님의 태도는 매우 아름다웠다. 그런 때문인지 사람들은 그가 부정적인 피드백을 할지라도 그리 저항하지 않은 데 비해 나의 부정적인 피드백에 대해서는 아파하며 선뜻 수용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담자가 변화하도록 돕는 상담에서 상담자는 공감이나 분석(해석)을 해주고, 그러면 내담자는 정화나 통찰을 이룩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사람을 변화하게끔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요소라기보다 내담자와 상담자 간의 관계 체험이라고 본다. 예전에 미처 경험해보지 못한 든든하고 안정된 관계 체험이야말로 변화나 성장을 이룩하도록 하는 상담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 체험은 어디까지나 결과적인 것으로 그것 자체를 위해 만나기는 어렵다. 그리하여 만남을 유지하기 위해 상담자는 공감과 분석이라는 과업을 수행하고, 그러면 내담자 측에서는 변화의 밑거름이 되는 정화나 통찰을 이룩하는 게 상담이다. 다시 말해, 이런저런 작업을 하는 것 같아도 더 본질적인 것은 관계를 나누는 경험이다.
아무튼 내게 다시금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일깨워준 그 신부님에게 감사한다. 아직 그의 분석력이 나보다 뒤진다고 하더라도 그보다 더 중요한 상담의 본질에 그는 더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비단 상담 장면에서 어느 것이 더 본질이고 가치 있느냐 하는 것만이 아니라, 한 인간인 나 자체로서도 성장하고픈 욕구를 지니고 있다. 더욱이 나는 아름다워지고 싶은 여성이지 않은가. 그리하여 정갈하고 정성스러운 면모를 갖추는 것에 더 욕심을 부리고 싶다.
첫댓글 지혜의 말씀,,
감사합니다..
더욱 성장하고 성숙하기를 기원합니다...
예, 저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는 성장입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것에 끌리곤 합니다.
좋은 봄맞이를 하시기 바랍니다.
정갈하고 정성을 다하여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필요한 덕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