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쓰시마[對馬島] 01-만제키바시[만관교(万關橋)]-
10월12일(금) 11:10분 잠실종합운동장역 ②번 ③번 사이에서 관광버스로 출발, 밤새도록 달려 다음날 05:00시 부산 광안리해수욕장 콩나물해장국집에서 이른 아침식사를 하였다. 그리고 06:30 부산국제여객선터미널로 이동하여 출국 수속을 하였다. 부산에서 쓰시마를 가려면 5종류의 배가 있는데 평균 1시간30분 걸린다. 우리가 타고 갈 배는 08:40분 출항하는 코비는 히타카츠항까지 1시간10분, 하대마 이즈하라까지는 2시간10분이 소요되는 쾌속선이다. 코비는 비행기 엔진을 달아 쓰시마를 운행하는 배중에서 가장 빠르고 안전한 배라고 한다.
[광안리해수욕장 콩나물 해장국]
[종이꽃]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
[면세구역]
[초고속 여객선 '코비']
[크루즈여객선 '프린세스호']
히타카츠항에서 장윤은 현지가이드를 만났다. 운전기사는 하라다상이라고 한다.
[쓰시마 히타카츠 여객터미널]
일본은 본토 4개의 큰 섬 외에 6,800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인도 중 쓰시마는 4번째로 큰 섬으로 울릉도의 10배 크기이다. 쓰시마를 오는 관광객 중 반은 괜히 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시골도 이런 시골이 없다. 놀거리 즐길거리가 없다. 상점도 5~6시면 문을 닫고, 선술집도 10시면 모두 문을 닫는다. 식당에서는 음식도 개인별로 한상차림으로 받는다. 반찬이 모자라도 그냥 주지 않고 추가로 사서 먹어야 한다. 쓰시마는 89%가 산지이다. 그래서 공기가 맑고 수도는 그대로 마셔도 될 정도로 청정하다. 쓰시마를 오는 관광객 반은 여행 포인트가 힐링이다. 좋은 공기 마시며 자연을 즐긴다는 생각을 하면 된다. 이곳은 화장실도 적고 작다. 지금 비가 살짝 내리는 것 같은데 일기예보에 비소식은 없다. 일본은 한국보다 비가 많이 온다. 평균 강수량이 한국은 1,250mm, 일본은 1,500mm 정도가 된다.
한국 관광객이 쓰시마를 오게 된 것은 20년 전부터다. 부산에서 쓰시마까지 거리는 49.5.km, 일본 본토에서 제일 가까이에 있는 큐슈 후쿠오카까지 거리가 145km로 거의 3배나 된다. 역사 문화적으로도 우리나라와 관련이 많은 섬이다. 농경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쓰시마는 식량의 70%를 우리나라에서 조달하였다. 조공을 바치고 쌀과 콩을 가져왔다. 역사적으로 쓰시마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중계무역 가교 역활을 하였다. 옛날에는 한국에서 후쿠오카로 갔다가 다시 대마도로 들어왔다. 그러다가 1995년 5월 처음으로 부산-대마도 직항노선이 생겼다. 지금 주말이면 3,000명이 쓰시마를 찾고, 작년 한 해동안 30만명의 한국인이 쓰시마를 찾았다. 처음에는 낚시하는 사람이 찾았는데 ‘도시의 어부’도 촬영을 하였다. 그 다음은 등반을 하러 온다. 1박2일 여행지로 쓰시마만한 곳이 없다.
쓰시마는 인구가 32,000명이다. 옛날에는 50,000명이 거주하였다. 초등학교가 15개, 중학교가 10개, 고등학교가 7개가 있다. 쓰시마에 없는 것은 백화점과 대학교가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은 본토로 유학을 간다. 그곳에서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한다. 그리고 은퇴 후에야 고향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노인층이 많다. 쓰시마에 오면 사람이 잘 보이질 않는다. 무얼 먹고 살까? 옛날에는 섬이기 때문에 생선이 많이 잡혔다. 그중에서도 방어와 오징어가 많이 잡혔고 진주 양식도 많이 하여 50%가 어업에 종사하고 30%가 양봉이나 표고버섯 재배를 하고 나머지가 버스기사, 식당, 레스토랑, 여관업에 종사를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쓰시마에는 자위대 기지가 많아 군인 가족이 동반하여 거주한다.
쓰시마 등산은 주로 하대마에 있는 519m의 시라다케(백악)를 등산한다. 스모라는데서 출발하여 정상을 오른 다음 원점 회귀하는 3시간30분 코스다. 시라다케 들머리를 가는 도중 휴게소에 들려 가지고 온 벤또를 먹을 것이다. 그리고 20분을 더 가면 사라다케 등산로 입구에서 내린다. 차 중에서 파악해 보니 등산을 하겠다는 친구는 10명, 30명은 쓰시마 시내관광을 원했다. 시라다케 들머리에서 시내까지는 30분이 소요된다. 먼저 ①하치만구[팔번궁]신사 ②가네이시[금석]성과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 ③반쇼인[만송원]을 둘러볼 것이다. 반쇼인은 절이 있어 입장료를 300엔을 내야 출입을 할 수 있다. 일본 엔화와 한국 원화를 환산하는 간단한 방법은 ¥100 * 10원을 곱하면 된다. 즉 1,000원이다. 이 골목 투어를 걸어서 1시간 내지 1시간 30분한 다음 다시 원위치하여 시라다케 등반 친구들과 합류하여 호텔까지 간다. 1시간 반이 소요된다. 그리고 숙소에서 짐을 풀고 저녁식사를 한 다음 자유시간으로 푹 쉬도록 한다.
지금 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하늘로 쭉쭉 뻗어 올라간 나무가 굉장히 많다. 쓰시마에는 3가지 종류의 나무가 많다. 삼나무, 편백나무, 대나무다. 일본도 소나무 즉, 니키다소나무가 있었는데 재선충 병으로 모두 잘라내고 삼나무, 편백나무를 집중적으로 심었다. 심은 이유는 쓰시마는 지질이 마사토라 산사태가 많이 났다. 삼나무, 편백나무는 뿌리가 길게 뻗어나가기 때문에 산사태를 막기 위해서였다. 쓰시마 뿐 아니라 일본 전 국토의 70%가 삼나무, 편백나무이라고 보면 된다. 옛날에 삼나무로 배를 많이 만들었다. 밀도가 높아 잘 썪지 않았기 때문이다. 편백나무는 고급재질의 나무로 목욕탕에 주로 쓰인다. 히로키탕이 그것이다. 그 외에 이팝나무가 많아 하얀 꽃이 지천으로 핀다. 동물은 야생고양이, 사슴, 멧돼지가 많다.
쓰시마를 여행하면서 우리나라와 밀접한 역사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쓰시마는 식량난이 심하여 역사적으로 일본 본토보다는 고려나 조선 우리나라에 의존하고 살았다. 쓰시마 사람들은 일본하고 조선이 관계가 좋아야만 편히 살 수 있었다. 이 평화가 깨진 것이 임진왜란이다.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이 거의 없었다. 그러면 평화로운 삶을 살았느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일본은 천황이 있었지만 지역마다 영주가 있었고, 그 아래 무사계급 즉 사무라이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영주들은 한 개의 나라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1,000년 동안 자기네들끼리 서로 싸우고 있었다. 이를 전국시대라고 한다. 이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일본을 통일시킨 사람이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이다. 이 풍신수길이 대륙 진출을 명분으로 불필요한 전쟁을 일으킨 것이 1592. 4. 13. 발발한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은 정확히 말하면 임지왜란 5년, 정유재란 2년 해서 7년 전쟁을 통칭한다. 이 임진왜란은 처음에는 명을 치기 위해서 길을 안내해 달라고 하여 조선에서 이를 거부를 하자 그러면 길을 비켜달라고 하였으나 이 또한 거절 당하자 발발한 전쟁이었고 결론적으로 일본의 실패한 전쟁이고 풍신수길 또한 병으로 죽고 망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풍신수길하면 좋지 않은 인상을 갖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최초로 천하통일을 한 명장으로 생각하고 있다. 풍신수길이 죽고 아들 토요토미 히데요리가 있었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 다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이었다. 덕천가강은 수도를 오사카에서 에도(지금의 토오쿄)로 옮겨 1868년 메이지[명치]유신으로 일본 신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250년간 통치를 하였다. 이시기를 바로 에도시대라 한다. 이 250년 에도시대가 일본에서는 태평성대의 시대로 가장 안정되고, 평화롭고, 경제, 문화 또한 꽃을 피우는 그런 시기였다. 또 이 에도시대에 조선과 수교를 하였다. 250년간 조선통신사가 12차례 일본을 방문하게 되는데 수행원이 300명~500명으로 꾸려졌다. 조선통신사 일행이 한양-부산-쓰시마-시모노세끼-후쿠오까-에도로 가는데 약 6개월~8개월이란 기간이 소요되었다. 이 조선통신사 행렬은 지금으로 보면 대통령 특사 외교사절로 가는 곳마다 환용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숙소에서는 잔치가 벌어졌다. 조선통신사들은 내노라하는 학자들이 포함되어 있어 일본인들이 서로 시라도 한 수 받으려고 줄을 섰던 것이다. 그야말로 선망의 대상이고 한류의 원조였다.
일본은 1868년 우리나라보다 일찍 서양의 신문물을 받아들이므로서 명치유신이 일어났다.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서양문물을 받아 들인 것은 1945년 해방이후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러니 일본이 80년 앞서 발 빠르게 신문물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때 일본은 신식 군대를 조직하고 우체국, 대학교, 소방서 등 신식제도을 갖추게 된다. 이 일본 신정부는 서구 열강이 함선을 보내 개항을 요구하는 등 침략국가의 행위를 하자 일본이 식민지화 되는 것을 염려하여 먼저 침략국가가 되기로 한다. 그래서 먼저 눈을 돌린 곳이 조선이었고, 조선에서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일으켜 두 전쟁 모두 승리를 하게 되었다. 특히 러일전쟁의 승리는 일본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결과 조선은 36년간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겪게 되었고,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일본과 국교 단절로 쓰시마는 차츰 잊혀진 섬이 되었다. 그러다가 1999년 부산-쓰시마 직항로가 개설되어 많은 관광객이 쓰시마를 오게 되었다. 문제는 5편의 배편으로 들어오는 관광객을 수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인숙, 민박까지 하게 되었다. 우리가 오늘 숙박하기로 되어 있는 곳은 료칸(여관)으로 쓰시마에서는 상급으로 볼 수 있는 여관이다.
쓰시마에서는 처음에 이렇게 많은 한국 관광객이 몰려올지 몰랐다고 한다. 주로 동창회, 부부계 등 단체 관광객이 1박2일 또는 2박3일 일정으로 오는데 먹을 것은 일주일분을 싸가지고 온다. 1~2일 동안에 다 먹을 수 없으니 음식물를 다 버리고 간다. 쓰시마에는 소각장이 한군데 밖에 없다. 그래서 이 모든 쓰레기를 후쿠오카까지 가져가 소각하는 일이 벌어졌다.
내일 아침 모닝콜은 06:00시, 06:30분 경 일출을 볼 수 있고, 07:00부터 식사가 가능하다, 07:40 마우다 해수욕장으로 출발한다. 그 다음 슈시에서 단풍길 트래킹을 하고자 하였는데 내일 이곳에서 사이클대회가 열려 도로를 통제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한국전망대외에 이국전망대라는 한 곳을 더 구경한 다음 면세점에 들려 선물을 살 사람은 선물을 사시는데 쇼핑시간은 30~40분을 주겠다고 한다. 이후 점심을 먹고 13:00시경 배를 타면 부산에 14:10분 도착하게 된다.
쓰시마 여행 중 가장 먼저 들린 곳은 만제키바시[만관교(萬關橋)] 다리이다. 쓰시마는 본래 하나의 섬이었는데 군사적인 이유로 아소만과 미우라만을 연결하는 300m 정도의 인공 운하 만제키세토(万関瀬戸)를 3년여 공사 끝에 1900년 완공시켰다. 그리고 상대마와 하대마를 연결하는 만제키바시[만관교(万関橋)]를 건설하였다. 지금의 다리는 1996년 건설한 세 번째 다리로 길이 210m, 높이 25.5m이다. 운하를 굴삭한 구간은 다리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 시멘트로 처리한 부분이다.
[만제키바시]
[만제키세토 운하]
만제키세토를 건설한 이유는 만주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 간에 벌인 러일전쟁(1904. 2.~1905. 9.) 때문이었다. 당시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대장이 이끈 일본 해군은 로제스트 벤스키 중장이 이끈 러시아 발틱함대를 쓰시마 해협에서 괴멸시키므로서 러일전쟁의 승부를 사실상 가린 유명한 해전이 있었다. 이 만제키바시가 일본의 입장에서는 승리의 다리라고 하는데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비운의 다리라고 할 수 있다. 생각없는 사람이 보면 번지 점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풍광은 좋다.
일본 해군의 승리는 일본 외교의 승리라고도 할 수 있다. 러시아 발틱함대가, 발트해 군항에서 극동을 향해 출항한 것은 전년도인 1904년 10월 15일이었다. 38척의 함대가 극동의 블라디보스톡까지 가려면 직항로인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것(1개월 반 소요)인데 영일동맹으로 일본의 동맹국이던 영국이 수에즈운하는 물론 영국의 지배하에 놓인 항구에는 기항조차 하지 못하게 하였다. 따라서 발틱 함대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7개월 소요) 지구를 반 바퀴나 도는 대원정을 할 수 밖에 없었고 피로 누적과 석탄 등 물자의 고갈은 처음부터 무리한 싸움이었다. 결국 러시아는 전함 6척을 포함하여 총 21척이 격침되었고, 약 5,000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며, 로제스트 벤스키 사령관을 포함한 약 6,1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일본은 수뢰정 3척의 손실과 120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을 뿐이다.
일본에서는 쓰시마 해전을 승리로 이끈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을 전쟁의 신, 군신(軍神)으로 여기며 동양의 넬슨이라 칭하고 있으나 정작 도고 본인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이 바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장군이었다고 한다. 러일전쟁 승전 축하연이 있던 날이었다. 아사히 신문기자가 도고에게 "각하의 업적은 영국의 넬슨 제독, 조선의 이순신 제독에 비견할 빛나는 업적이었다."고 하자 도고는 "나는 넬슨 제독에 비견될 수는 있겠으나 이순신 장군에는 비교하지 말라. 이순신 장군은 국가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훨씬 더 나쁜 상황에서 매번 승리를 이끌어 냈다. 나를 전쟁의 신이자, 바다의 신인 이순신 제독에게 비유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라고 말하였다 한다.
하대마쪽 다리 끝 지점에는 주차장, 화장실, 판형의 돌 지붕을 얻은 휴게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우리 일행은 일본식 벤또(도시락)로 점심식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