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 五臺山上院寺重創勸善文(국보 제292호)
세조 10년 (1464)세조의 왕사인 혜각존자 신미 등이 학열.학조 등과 함께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상원사를 새롭게 단장하면서 지은 글로 이사실을 전해들은 세조가 쌀 .무명 .배와 철 등을 보내면서 쓴 글과 함께
월정사에 소장되어 전한다 각각 한문 원문과 번역으로 되어 있는데 신미 등이 쓴글에 신미 학열 .학조 .등의 수경(지금은 서명)이 있으며 세조가 보낸 글에는 세조와 세자빈 왕세자의 수결과 도장이 찍혀 있다
한글로 번역된것은 가장 오래된 필사본으로 유명하며 세조와 상원사 및 신미와의 관계를 살펴볼수있는 자료이며 당시의 국문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가장 오래된 한글서적 이면서도 보존 상태가 완벽하여
1966년11월 28일 보물 제140호에서 국보 제 292호로 등급이 조정되었다
신라 신문왕의 왕자인 보천 寶川과 효명 孝明형제가 오대산 五臺山에 들어와 날마다 차를 달여 진신 眞身문수보살에게 공양을 하였다 그러다가 신문왕 이 죽자 효명이 서라멀로 돌아가 왕위에 올랐고 왕위에 오른 효명 즉 효소왕 孝昭王이 재위 4년만인 696년에 지금의 상원사 터에 진여원 眞如院을 창건하여 문수보살상을 봉안하고 20년후에는 동종을 주조하였고 보천은 열반에 들면서 오대산에 나라를 돕는 신행결사도량을 만들것을 유언해 그 유언에 따라 도량을 짓고 이름을 화엄사 華嚴社라 했고 훗날 나옹대사의 제자 영령암이 오대산을 유람하던중 절이 황폐화 된것을 보고 판서 최백청과 부인의 시주로 중창하였다
조선 태조은 억불정책을 편 대표적인 왕이지만 1401년(태종1년)에는 이절의 중대中臺 사자암을 중건하고 낙성식에 참여허여 성대한 법요식을 베풀기도 했으며세조는 이절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병을고치자 친히 권서문을 작성했고 또 진여원을 확장하여 이름을 상원사라 바꾸고 원찰願刹로 정한후 문수동자상을 봉안했으며
그후몇차례 중창을 하였고 한국전쟁때에는 방한암 스님이 병허로부터 사찰을 지켜냈다
자장율사가 귀국한뒤 보천과 효명 왕자 형제가 일찍부터 세속 밖의 일에 뜻을 두어 함께 오대산에 들어가 두왕자가 산속에 이르메 홀연히 맨땅위에서 연꽃이 피어나서 형 보천이 그곳에 안자를 지어 사니 이를 보천암 寶川庵이라 히였으며 그리고 남쪽에 다시 연꽃이 피어나므로 아우 효명도 거기에 암릉을 짓고 효명암 이라 했고 하루는 두형제가 五峯에올랐더니 동쪽편 만월산萬月山에 1만 관음의 진신이 나타나고 남쪽 기린산麒麟山에는 8대보살을 중심으로 1만 대세지 (大勢至 아미타불의 보처불)가 북쪽 상왕산 象王山에는 석가여래 부처님을 중심으로 5백 여 나한 羅漢이 중앙 지로산 地爐山에는 비로나자불을 중심으로 1만 문수가 나타났다
보천과 효명은 5만여 진신을 낱낱이 침례하였는데 새벽이면 문수보살께서 진여원(眞如院 지금의 상원사)
에 36종의 형상으로 때로는 수백 수천의 형상으로 나타나 두태자는 그때마다 동네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 공양하고 저녁이면 암자로 돌아가 도를 닦았고 한편으로 왕자 형제가 떠나 온 왕실에서는 권력을 둘러싸고 골육상쟁의 추악한 암투가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벌어져 늙은 왕의 자리를 노리는 신문왕의 아우가 왕자 형제가 출가한것을 기회로 마치 자신의 나라가 된것처럼 권력을 잡고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자 신문왕에게 충성하는대신과 그 아우를 즉위시켜 권세를 잡으려는 역적 무리의 대립이 극심해 상황이 이에 이르자 왕에게 충성하는 대신들은 최후의 방법으로 왕자 형제를 왕궁으로 모셔오기로 결정해서 보천왕자를 모셔오기위해 대신 2명과 장수4면 군사 5백이 오대산으로 출발했으나 이런 사실을 미리안 보천왕자는 피해 버리자 충성파들은 차선책으로 효명왕자를 모시기로하고 효명암으로 향해 효명왕자님!보천왕자님께서 보위에 오르기 싫다고 종적을 감추어 버렸습니다 하오니 왕자님께서 나라안의 안위를 생각하시어 궁궐로 돌아가 주옵소서 대신과 장수 그리고 군사들이 모두 꿇어앉아 이렇게 간청하면서 효명왕자가 승락할때 까지 물러나지 않았고 효명은 국가의 장래를 걱정한 나머지 그를 따라가 보위에 올르니 바로 효소왕 이었다
상원사 주차장 옆 사찰 입구에 관대 冠帶걸이가 있는데 이는 상원사에 참배차 행차하던 세조가 목욕할때 의관을 걸었다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갓걸이 라고도 하며 세조가 영험하기로 소문난 상원사에서 몸에난 종기를 낫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리고자 신하들을 물리치고 홀로 계곡물에 몸을 담갔고 그때 마침 지나가는 동자승이 있어 등을 씻어 달라고 부탁을 하여 동자승은 아무말없이 선선히 등을 밀어주고는 오던길로 되돌아 가려고 나서자 세조가 동자승에게 말하기를 아무에게도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말아라 그러자 동자승이
대왕께서 문수보살이 몸을씻어주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세조가 깜짝 놀라 주위를 살피니 동자승은 간곳없고 어느새 몸의 종기가 깨끗이 나아 있었다
세조가 감격하여 화공을 불러 그때만난 동자승의 모습을 설명해주며 그림을 그리고 또 나무로 조각하게 하여
그때만든 목각상은 지금도 상원사 청량선원에 모셔져 있으나 문수동자의 진영은 남아 있지 않고 1894년 발견된 문수동자 복장腹臟에서는 세조의딸 의숙공주가 문수동자상을 봉안한 발ㄹ원문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나왔으며 세조가 친견한 문수보살을 그릴때의 일이었는데 문수보살을 그리려고 많은 화공을 불렀으나 모두들 세조의 설명대로 그리지를 못했고 그때 누더기를 걸친 노스님은 자신이 그려보겠다고해 세조가 문수보살의 모습을 설명하려하자 노스님은 자신이 알아서 그리겠노라 하며 혼자 그렸고 노스님이 그려보인 문수동자승의 모습이 너무도 닮아 있어 세조는 너무 놀랍고 기쁜마음에 물었는데 스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그러자 노스님은 영산회상에서 왔습니다 하고는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상원사 문수동자상을 모신 법당을 청량선원 淸凉禪院 이라 한것은 오대산을 일명 청량산이라 한데서 유래된것이며 이곳은 현재 법당으로 사용되고잇으며 선원 건물은 1947년에 금강산 마하연사가 건물을 본떠 중창한것이며 청량선원 법당 뜰에는 고양이 석상 2기가 있으며 이 고양이 석상과 세조가 관련된 설화도 있는데
상원사에서 피부병을 고친 세조가 이듬해 다시 상원사를 참배하려고 법당으로 들어 가려는데 고양이 두마리가 나타나 세조의 옷소매를 물고 법당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하여 이상한 예감이들어 세조는 법당 안팍을 샅샅이 뒤지게 한끝에 불상을 모신 탁자밑에서 세조를 죽이려는 자객을 찾아내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세조는 은혜에 보답하고자 고양이를 잘기르라는뜻에서 주지스님에게 많은 밭을 하사하였으며 그때부터 상원사를 중심으로 사방 팔십리 땅이 모두 상원사 소유가 되었다고 하며 또 고양이 한쌍도 돌로 조각 하여 세움으로서 고마음을 기렸다
상원사 동종은 현존現存하는 한국종 가운데 가장크고 오래되고 제일 아름다운 종으로 경주박물관에있는 선덕대왕 신종보다 45년 앞서며 신라 성덕왕 聖德王 24년(725년)에 조성되어 조선 예종(睿宗 원년 1469)에 상원사에 옮겨졌으며 한국종의 고유한 특색을 모두 갘추고 있는 대표적인 범종 梵鐘이며 높이 167cm이며 입지름91cm가 되며 이종은 한국산종의 모범일뿐 아니라 음향이 청량하기 비길데 없으며 산.하대와 구유의 유곽 크고 넓은 동체에는 대칭적으로 둥근 동좌와 주악하는 비천을 각기1쌍씩 새긴것이 특이하며 정상부에 용뉴 이외에 음통이 달려 있는것이 중국 일본 종에 비해 다른 특징이고 이종은 원래 안동근처 어느 사찰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태종이 불교를 박해할때 안동본부 本府의 문루門樓로 옮겨졌다가 세조가 상원사에 봉안할 종을 전국에서 찾던중 이 종이 선정되었으나 세조가 승하한후인 예종 원년 1469년 에야 상원사에 도착하여 봉안되었다
종을 안동에서 상원사로 옮길때 3379 근이나되는 큰 종을 수레에 싣고 죽령을 겨우 넘어섰는데 갑자기 종이 노상에서 움직이지 않아 오르막길도 아닌 내리막길에서 종이 움직이지 않으니 수레를끌던 스님들이 당황하여 어쩔줄 몰라 했는데 그때 지나가던 작은 동자승이 혼자말로 중얼거렸는데 종꼭지가 먼저 가야겠구먼 그말을 들은 스님들이 동자승의 말대로 종 꼭지를 하나떼어서 먼저 안동으로 보내니 그때서야 비로서 움직였다는 전설을 입증하듯 실제로 이종에는 네꼭지붕 하나가 없는데 한국전쟁때의 일화도 있다 국군이 남으로 후퇴하면서 월정사와 상우너사가 적의 소굴이 될것을 염려하여 군사 작전상 월정사를 불태우고 상원사 마저 불태우려했는데 그때 방한암 (1876~1951)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그는 태연하게 법당에 앉아 말했다
당신들이 군인의 본분에 따라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듯이 승려인 나는 절을 지키는것이 본분이오 그래서 나는 이 법당안에 앉아서 끝까지 승려의 본분을 지킬것이니 그냥 불을 지르시오 그러자 불을 지르려던 그 장교는 법당 문짝 하나만을 떼어서 태운뒤 돌아 같다고하며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을때의 일인데 방한암 스님을 존경하던 일본 총독이 찾아와 전쟁의 승패를 묻자 스님은 정의로운자가 이길것 아라고 간단하게 말하고는 자리를 피했다 적장이 찾아와서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을 하니 스님도 직접적인 대답을 피해서 우회적으로 그들을 꾸짖었던 것이며 방한암 스님은 경허.만공.수월과 함께 근세에 선풍을 일으켰고 상원사 뒤 중대 사자암에는 방한암 스님이 지팡이를 꽂으며 이 지팡이가 사는날 내가 다시 살아 돌아 오리라 했다던 지팡이 나무가 있는데 그나무가 단풍나무인데 지금도 가지가 돋고 잎이 무성하게 잘자라고 있다
상원사 중창권선문 세조 10년(1464년) 세조의 왕사인 혜각존자 신미 慧覺尊者信眉 등이 학열 學悅.학조學祖
등과 함께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상원사를 새롭게 단장한다는 말을듣고 세조가 쌀.무명.베와 철 등을 보내면서 그취지를 쓴 글과 왕의 하시품을 받고 신미 등이 쓴 글로 구성된 2책으로 각각 한문 원문과 번역으로 되어있고 훈민정음을 제정한이후에 판각이나 활자로 발행된 한글문헌은 많이 있으나 직접 묵서 墨書한것으로는 이것이 가장 오래된 진적 眞跡이므로 초기의 한글 서체를 연구하는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며 1996년 11월28일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에 의해 보물 제 140호에서 국보 제 292호로 등급이 조정되었으며 세로 45.5cm 이고 가로 29.5cm 로 접혀있는데 펼친 총너비는 810.5c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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