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인물들의 아호
* 유명인들이였던 사람들의 아호나 자 ,당호를 볼때 서로 상충 상극하는 이름으로 않좋은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대 유학자 였던 사람도 작명은 엉망이다
이름을 바궈 성공한 사람들 - 아호
- 아 호 -
유명 인사나 독특한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아호(雅號)를 많이 사용한다. 아호란 말 그대로 아름답고 우아하게 나를 지칭하는 이름으로서 반드시 유명한 사람들은 전유물인 것은 아니다. 일반인들도 자신의 발전과 품위를 위해 얼마든지 아호를 가질 수 있다. 아호 역시 사주나 본명의 부족한 운을 보완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으며, 아호를 사용함으로써 크게 알려지는 경우도 많다. 소설사, 시인, 서예가, 학자들이 작품을 집필하거나 발표할 때 쓰는 이름은 필명(筆名)이라고 한다.
유명인들의 아호를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대중(金大中) - 후광(後廣) 강세황(姜世晃) - 표암(豹菴) 강희맹(姜希孟) - 사숙재(私淑齋) 강희안(姜希顔) - 인재(仁齋) 곽재우(郭再祐) - 망우당(忘憂堂) 관 우(關 羽) - 운장(雲長) 길 재(吉 再) - 야은(冶隱) 김동인(金東仁) - 금동(琴童) 김만중(金萬重) - 서포(書鋪) 김병연(金炳淵) - 난고(難苦) 김수장(金壽長) - 노가재(老歌齋) 김수흥(金壽興) - 퇴우당(退憂堂) 김시습(金詩習) - 매월당(梅月堂) 김안로(金安老) - 희락당(喜樂堂) 김옥균(金玉均) - 고균(古筠), 고우(膏雨) 김자점(金自點) - 낙서(洛書) 김정호(金正浩) - 고산자(古山子) 김정희(金正喜) - 완당(阮堂), 추사(秋思) 김종서(金宗瑞) - 절재(節齋) 김좌진(金佐鎭) - 백야(白冶) 김창업(金昌業) - 노가재(老稼齋) 김홍도(金弘道) - 단원(檀園) 김홍집(金弘集) - 도원(道園) 남효온(南孝溫) - 추강(秋江) 문익점(文益漸) - 삼우당(三憂堂) 박문수(朴文秀) - 기은(耆隱) 박 연(朴 堧) - 난계(蘭溪) 박영효(朴泳孝) - 현현거사(玄玄居士) 박인량(朴仁亮) - 소화(小華) 박인로(朴仁老) - 노계(蘆溪) 박종화(朴鍾和) - 월탄(月灘) 박지원(朴趾源) - 연암(燕巖)
오늘날 보통 사람들은 성(姓) 다음에 이름 하나만을 갖지만 조선시대에는 본명 외에도 서너가지 이름을 갖는 게 상례였다. 우선 아명(兒名)은 어렸을 때 부르는 이름으로서 아무쪼록 무병장수하라고 개똥이, 말똥이 등 천하게 지었다. 이는 높은 유아사망률에 따른 미신 때문이었다. 즉 이름을 너무 예쁘게 지어 귀여움을 받으면 귀신이 데려간다고 여겨 일부러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사대부 집안에서는 악귀를 막는 한자를 아명으로 썼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관례(冠禮)를 올리면 부모에게 받는 이름이 관명(冠名)으로 곧 본명이다. 그러나 이 본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윗사람의 본명을 입에 담는 것은 불경(不敬)으로 인식됐다. 관명이 휘명(諱名)으로 불린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죽은 조상이 시조나 입향조(入鄕祖)일 경우 본명을 곧바로 사용하는 것은 최고의 금기사항이었으니 이것이 곧 기휘(忌諱)이다. 예컨대 조상의 이름에 '밝을 소(昭)'자가 있을 경우 축문 가운데 '감소고우(敢昭告于)'의 '소'자를 같은 뜻을 지닌 '명(明)'자로 바꿔 '감명고우'로 쓰는 식이다.
雅號는 자신의 또 하나의 얼굴 -‘姓名學으로 본 아호풀이’
로타리에서는 회원 사이의 호칭을 雅號로서 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다. 西歐의 로타리안들이 서로 친근하게 愛稱이나 닉네임으로 부르는 데서 유래한 듯하다. 號는 그 사람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상징적 별칭이다. 따라서 호를 통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가늠케 한다. 그래서 호를 하나 얻기까지 나름대로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일단 고상해야 하고 자신을 단적으로 잘 표현해야 하고 뜻과 더불어 발음도 좋아야 하고……, 하지만 의외로 아주 우연한 기회에 생각지도 않게 얻어지는 경우도 있다. 호를 얻기까지의 내력을 살펴보면 고개가 숙여질 정도로 심오한 것이 있는가 하면 박장대소할 것도 있다. 다음에서는 국내 유명인들의 아호에 얽힌 갖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전 현직 및 정치인들의 호에 얽힌 재미있는 作號(작호) 유래와 그 내력을 소개한다. 유명인사의 雅號 옛날 사람들은 이름을 존엄한 것이라 여겨 행세한 사람은 한두 개의 호를 가졌는데 전파문화에 젖어 있는 요즘 사람들은 연예인들의 예명은 줄줄 외워도 집안 어른들의 호가 무엇인지,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모르는 수가 많다. 삼국시대 이후 옛 선인들은 호를 보편적으로 써왔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도 한때 호는 이름보다 더 알려지기를 원했고 유행처럼 성행하기까지 했다. 白凡(백범), 月南(월남), 雩南(우남), 海公(해공), 외솔, 省谷(성곡), 未堂(미당) 등 유명인사들의 호는 어쩌면 이름 석자보다 더 친숙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요즘은 멋과 운치가 넘쳤던 호가 차츰차츰 잊혀져 가고 있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은 아직도 호를 갖고 간혹 사용하기도 하지만 현대인들은 거의 호를 사용하지 않으며 호를 갖고 있어도 이를 부르기 쑥스러워 한다.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을 보면 아호는 인격이 고매한 문인이나 학자 또는 예술가들이 본명 외에 쓰는 아명 또는 별호라고 했다. 그러나 요즘은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인격이 있고 없음보다는 호를 지녀야만 권위가 있고 대가가 되며 어른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아호를 마치 무슨 감투마냥 지니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호는 그 사람의 품격에 따라 멋과 운치를 더하기도 하고 덜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호는 미숙한 젊은이보다는 원숙한 노년에 어울린다. 자연히 연로한 사람들이 호를 쓰기를 즐겨한다. 우리의 동양화단에서는 이상범보다는 靑田(청전), 김은호, 노수현, 허백련보다는 以堂(이당), 心仙(심선), 毅齊(의제)가 더 알려져 있고 서예가 손재형, 김충현, 김응현은 素筌(소전), 一中(일중) 그리고 如初(여초)라고 해야 금새 알아들을 정도다. 노정치인이나 예술하는 사람은 자신의 본명보다 오히려 아호 쓰기를 좋아했고 남들이 호를 불러주면 은근히 기뻐했다. 유명인사들이 갖고 있는 호는 대부분 다른 사람이 지어 주었거나 자신이 스스로 만든 것으로 작호의 내력을 보면 갖가지 일화가 담겨져 있다. 오래 전의 이야기를 한 토막 회상해 보자. “滄浪(창랑), 아무리 살펴봐도 우리 당의 대들보는 海公(해공)과 維石(유석)이야. 대통령 후보는 둘 중에서 골라야 할 것 같네. 常山(상산)과 海葦(해위) 그리고 말수가 적은 雲石(운석)의 뜻은 어때…… 낭산(朗山), 藝齊(예제), 玉溪(옥계), 海岩(해암)도 다른 의견들이 없겠지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三然(삼연) 곽상훈 씨가 자유당 정권과 맞서서 싸워야 할 야당의 중진들 앞에서 털어놓은 말로써 60년대 말 한참 인기를 끌었던 라디오 드라마 ‘정계야화’중의 한 대목이다. 창랑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 해공은 신익희 전 국회의장, 유석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가 신병 치료하러 미국에 건너가 가료 중에 숨진 조병옥 박사, 상산은 김도연 선생, 해위는 윤보선 전대통령, 운석은 장면 전총리, 낭산은 김준연 박사, 예제는 윤제술 씨, 옥계는 유진산 전신민당 당수, 해암은 박순천 여사 등 기라성 같은 당대의 쟁쟁했던 야당 정책가들을 가리키는 아호들이다. 이제는 다 고인이 되었지만 이들이 한참 정치일선에서 활약하던 시절만 해도 엇비슷한 나이의 상대방을 부를 때는 언제나 이름 대신 쉽고 부르기 편한 호를 거리낌 없이 자연스레 썼다. 雅號는 자신의 또 다른 얼굴 아호는 원래 스승이 지어주었다. 스승은 글방에서 공부하는 제자들의 호를 지어주고 성년임을 나타내는 호칭으로 아호를 불렀다. 최근에는 옛날과 달라서 친구들끼리 술자리에서 “네 호는 이거다” 하면서 서로 지어 주거나 자기 스스로 부르기 좋은 것으로 골라 짓기도 하고 선배들이 지어 주는 것을 받기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호를 가장 즐겨 썼던 사람들은 문인들이었다. 서예가나 화가들은 낙관을 찍기 위해 주로 썼고 작가들은 필명을 쓰기도 했지만 호를 자기 이름 대신해서 자주 이용했다. 잘 드러내지는 않지만 나이든 대학 교수들은 정년 퇴임자리에서 후학들이 기념논문집을 발간하거나 증정할 때는 호를 논문집에서 밝히기도 한다. 아호는 특수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나 일부 국한된 계층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남녀 노소 모두가 가질 수 있고 빈부나 직업의 귀천도 따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호는 한 사람이 하나씩만 지니라는 법도 없다. 여러 개 가져도 아무도 탓할 사람은 없다. 마음에 들면 얼마든지 호를 지어 가질 수 있다. 우리의 역사 인물 중 김시습 같은 이는 매월당, 동봉, 청한자 등 여섯 개를 지녔고, 글씨로 이름을 날렸던 秋史 김정희는 호가 1백 개를 넘어 百號堂이라고도 불렸다. 호를 지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격 이 높아지고 호가 없다고 해서 그 사람의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호는 보통 두 자가 많으나 세 자도 있고, 그 이상이 되는 것도 있다. 호에는 주로 바위[岩], 달[月], 냇가[江], 구름[雲], 뫼[山], 해[日], 개천[川], 돌[石], 골짜기[溪], 바람[風], 눈[雪], 비[雨], 정자[亭], 집[堂] 등 자연을 나타내는 것들이 많았으며 자신을 낮춤의 뜻으로 비유한 적음[小], 백성[民], 아래[下] 등도 있고 소[牛], 말[馬] 등 동물과 풀[草] 등을 가리키는 것들도 자주 사용했다. 한글학자 최연배 선생은 외솔로 유명했고, 이효상 전 국회의장의 한솔, 한글학회 한갑수 씨의 눈메, 작가 박승훈 씨의 외별, 시조작가 이병기 씨의 가람, 초대 문교부 장관인 안호상 씨의 한뫼, 국어학자 김윤경 씨의 한결 등은 순수한 우리말에 한글로 표기된 대표적인 호로 꼽을 수 있다 白凡선생 아호에도 민족사랑 많은 인사들의 호를 분석해 보면 자신이 태어난 곳, 바꿔 말해 향리를 기리는 뜻에서 고향 산천의 지명을 택해 사용한 호가 많았음을 엿볼 수 있다. 전북 고창군 인촌땅에서 태어난 김성수 전부통령과 휴전선 북쪽에 걸쳐 있는 강원도 통천군 아산고을에서 출생한 정주영 씨, 충남 금산군 진산면 옥계리 출신의 유진산 씨, 초대 농림장관을 지내고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경기도 강화군 죽산땅 출신의 조봉암 씨 등은 각기 태어나고 자랐던 마을 이름을 그대로 따서 仁村(인촌), 峨山(아산), 玉溪(옥계), 竹山(죽산)을 호로 삼았다. 김대중 대통령도 출생한 곳의 지명을 땄다. 전남 신안군 하의도 섬마을의 후광리를 따서 後廣(후광)이라 했다. 태어난 고장의 산이름을 빌려 호로 삼은 인사도 있다. 충북 청원군 동산면에 있는 팔봉산 밑에서 첫울음을 터뜨린 소설가 김기진은 뒷산 이름을 그대로 옮겨와 八峰(팔봉)이라 했고, ‘내 고향 남쪽바다’의 시조시인 이은상의 호 鷺山(노산)은 그의 고향인 마산에 놀러왔던 이광수, 박종화, 양주동 등 문인들이 이은상의 생가 뒷켠에 서기가 넘치고 수려하게 솟구쳐 있는 鷺飛山(노비산)을 보고 가운데 글자만을 빼버리고 노산이라고 불러준 것이 그대로 호가 돼 버렸다. 사학자이며 국어학자였던 이희승은 자신의 자그마한 체구를 작고 볼품없이 마구 차이는 조약돌에 비유해 一石(일석)이라고 했는데 그는 일석이라는 호로 인하여 아인슈타인, 다시 말해 독일어로 ‘한개의 돌’이라는 새 별명까지 덤으로 얻었다. 청포도의 시인 이활은 감방에 수감되어 있을 때 수인번호 264를 그대로 호로 정해 李陸史(이육사)라고 했다. 법무부장관을 지냈던 홍진기 씨는 그의 호를 詩經(시경)에서 따왔다. 주나라는 오래된 나라이지만 하늘의 명은 지금까지도 새롭다는 글귀에서 맨 마지막의 新民(신민)을 維民(유민)으로 바꿔 호로 정했다. 호는 이처럼 사람마다 지은 동기나 그 심오한 뜻을 나름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호는 또 사람 따라 선대와 후대로 나눠 탄생연도를 달리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거나 인생무상과 겸손의 뜻이 짙게 배어 있는 것들도 자주 만나게 된다. 이병철 씨의 호인 湖巖(호암)은 호수와 큰바위라는 뜻으로 55년 말께 친구인 午溪(오계) 전용순 씨의 권유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지난 86년 대학교수직을 박차고 나와 孝이야기, 論語이야기 등의 TV 강의로 인기를 얻고 있는 김용옥 씨의 호 ‘도올’은 초나라의 역사에 나오는 이름으로 뽕나무라는 내용을 안고 있다. 성격까지 담고 있는 雅號 쌍용그룹을 창업했던 정계거물 김성곤 씨는 인생을 늘 반성하는 자세로 살아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며 省谷(성곡)이라 했다. 자유당 때 재무부장관을 지낸 송인상 씨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흠모하는 뜻으로 자신의 출생지인 강원도 회양에서 淮(회)자를 따고 이승만의 아호 雩南(우남)에서 南(남)자를 택해 淮南(회남)이라고 했다. 언론인이며 수필가였던 김진섭은 언제나 졸졸 흐르는 계곡의 맑은 물소리를 들으며 살겠다는 심정으로 들을 廳(청), 개울川(천)을 합쳐 廳川이라 했다. 평생 나무와 벗하고 지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호를 나무들의 친구라는 樹友(수우)로 해버린 임학자 임창식 교수의 호는 운치와 멋을 뛰어 넘어 차라리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운치와 멋 넘치는 예술가들 문인들의 호는 아무래도 멋이 흐른다. 나무와 달과 자연을 사랑하면서 시의 소재를 그것에서 찾았던 박영종 시인은 그의 호인 木月(목월)을 무척이나 아꼈다. 그래서 아마도 박목월은 누군지 알아들어도 박영종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장기영 한국일보 창업주의 호 百想(백상)을 일러 천병규 씨는 백 가지 얼굴을 가진 인물에 가장 걸맞는 아호라 했다. 백상은 무슨 일이든 성취시키는 사람, 바꿔 말해 불가능이 없는 인물, 문필에 능한 사무가, 화술에 뛰어나고 위트와 임기응변에 능한 사교가, 대부형인 정치인, 수리에 밝은 경제인, 만능 스포츠맨에다가 예술을 좋아했던 다정다감한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범한 발상의 소유자로 뛰면서 생각했던 인걸에 걸맞는 호를 가졌다. 하지만 본인은 백상이라는 호보다는 늘 많은 사람들이 쉽게 불러주던 ‘왕초’라는 제2의 아호를 더욱 좋아했다. 국내 최초의 新羅 김유신의 號 옛 사람들은 이름은 고귀한 것이라고 해서 임금이나 스승, 아버지만이 부를 수 있었고 평교 사이에는 字(자)를 대신해서 불렀고 나이 어린 사람들 간에는 보통명사격인 號를 불렀다. 그래서 어른이 ‘춘부장의 함자가 무엇인고’ 하고 물의면 ‘무슨 자, 무슨 자입니다.’하고 대답하고 감히 직접 대놓고 이름을 부르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의 호는 고려 때부터 본격적으로 썼다. 신라의 명장이었던 김유신의 龍華香徒(용화향도)라는 호가 최초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것은 호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필명으로 더 많이 썼다고 되어 있다. 호의 유형을 살펴보면 자기가 살았거나 태어난 고을 주변의 지역적 특성이나, 지리적 특성, 다시 말해 산이나 강 이름에서 따오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었다. 기록을 보면 우리 선대들이 가장 흔하게 썼던 호는 松庵(송암)이었다. 특히 호 가운데서 제일 많이 인용한 글자는 農(농)으로 학식있고 덕망 높은 선비들 사이에서 인기였다. 성명에는 아명과 관명, 시호라는 것이 있었다. 아명은 乳名(유명) 또는 少名(소명)이라고 했는데 아주 어렸을 때 불렀던 이름으로 예를 들면 율곡의 아명은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꿈에 용을 봤다고 해서 見龍(견룡)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冠名(관명)이란 관례를 치른 후 아이시절에 부르던 이름을 버리고 새로 지은 이름으로 율곡의 관명은 珥(이)였다. 字(자)는 숙헌이고 호는 율곡이다. 시호는 문성공으로 이것은 임금이 그의 생전에 공덕을 칭송해서 죽은 뒤에 추존하는 것으로 흔히 文(문), 貞(정), 恭(공), 靖(정), 良(양), 孝(효), 莊(장), 安(안), 景(경), 章(장) 등 1백여 자로 국한해서 썼다. 옛 사람의 이름, 특히 군왕의 이름 등에 僻字(벽자)을 골라 썼던 것은 아무나 쉽게 부를 수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책을 읽다가도 임금이나 스승, 아버지의 함자와 같은 자가 나오면 음을 바꿔 읽거나 건너 뛰어 버리는 것을 예의로 삼았던 것이다. 歷代 대통령 아호 李 承 晩:雩 南 尹 潽 善:海 葦 朴 正 熙:中 樹 崔 圭 夏:玄 石 全 斗 煥:日 海 盧 泰 愚:庸 堂 金 泳 三:巨 山 金 大 中:後 廣 |
출처: [곡송] 시와 서각의 나라 원문보기 글쓴이: 곡송style
첫댓글 방랑시인 김삿갓 아호가 틀린것 같은데~ 蘭皐 가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