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청교도 개혁주의”란 무엇인가요?
A. “청교도 개혁주의”는 박형룡 박사께서 제언한 명제이고, 총신대학교와 합동 교단의 신학의 한 모토입니다.
2014년 박형룡 박사 기념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 서기행 목사)에서 박아론 박사의 부친 박형룡 박사에 대한 회고록 『나의 아버지 박형룡』으로 출판하여 감사예배를 수행하였다. 총회 본부 2층 여전도회관에서 드린 출판 감사예배에는 총회의 보수신학 계승에 기여해 온 교단의 신학자들(서철원 박사, 정성구 박사, 김길성 박사, 정일웅 박사)과 총회의 신학적 전통을 사수하고 총회가 지향하는 개혁주의 신학을 유지하는데 반평생을 바쳐온 증경 총회장들(서기행 목사, 김동권 목사, 홍정이 목사, 부총회장 권영식 장로)이 참석하였다.
그 당시 총회장 안명환 목사는 “박형룡 박사는 우리 총회의 신학적 전통을 세워주신 大신학자이시며, 한국교회에 성경적이고 청교도적 개혁신학을 세워주신 신학의 대가”라고 평가하였다.
“청교도적 개혁신학”은 죽산 박형룡 박사(竹山 朴亨龍, 1897-1978)께서 제언한 신학 명제이다. 죽산은 “술이부작(述而不作)”-서술하되 짓지는 않는다-라는 겸양하고 솔직한 학문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옛날 한학(漢學)을 하였기 때문에 논어(論語) 술이(述而)편의 글을 인용하여 제시한 것이다. 죽산이 서술한 신학세계는 루이스 벌코프를 기본으로 하였고, 종말론에서 벌코프의 신학이 아닌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의 종말론으로 구도화하였다. 그래서 한국 장로교는 네덜란드 개혁파의 신학 내용에 역사적 전천년주의로의 신학 구조를 갖게 되었다.
역사적 전천년기는 장로교 선교사들이 갖고 있는 주요 종말론 개념이었다. 그런데 본래 장로교 사역자는 무천년기를 가져야 하는데, 조선에 들어온 장로교 선교사들은 역사적 전쳔년기를 견지하고 있었다(참고, 구레인, John C. Crane, 1888-1964, 이눌서, William Davis Reynolds, 1867-1951). 필자는 그러한 현상이 미국 대각성 운동의 여파이며, 역사적 전천년기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지역을 넘어서 활발하게 복음 전도 활동을 한 것으로 이해한다.
죽산이 수학하였던 구(舊) 프린스턴은 오히려 후천년기론적 견해를 가진 사역자들이 있었다. 죽산이 평양장로회신학교와 총회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할 때에 활용한 교재 내용이 루이스 벌코프의 신학 내용을 많이 참조하였는데, 종말론에서는 선교사들의 견해를 유지한 것이 특징이다. 술이(述而)를 루이스 벌코프와 선교사의 사상으로 구성한 것이고, 자기 작품이 아니라는 것(不作)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도를 종합하면 “청교도적 개혁신학”이 된다.
죽산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에서 장로교 후예들에게서 두 부류가 나타나는데, 청교도를 지향하는 사역자와 개혁신학을 지향하는 사역자이다. 전자는 청교도라는 이름을 강조하면서 진행하고, 후자는 네덜란드의 개혁신학에 매진하였다. 전자의 주된 사역자는 로이드 존스 목사이고, 그로 파생되어 조나단 에드워즈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후자는 헤르만 바빙크와 아브라함 카이퍼가 있다. 총신대학교는 “청교도적 개혁신학”이라는 모토와 함께 “구 프린스턴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전통”을 견지하고 있다. 그런데 두 모토는 신학적으로 교합점이 거의 없다. 구 프린스턴은 스코틀랜드 장로파 계열이기 때문이다.
교합점이 없는 두 모토를 100여년을 유지하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장로주의를 떠나 네덜란드 개혁교회로 전향한 경우가 있고, 장로주의를 갖고 있으면서도 1912년 총회의 전통에서 이탈하려는 장로파 교회들이 있고, 보다 새로운 교회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개혁된 사상의 교회들도 있다. 그러나 다수의 교회는 죽산의 그늘에 있어 청교도주의와 개혁신학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명목은 청교도적 개혁신학이지만, 오순절주의 혹은 신사도주의로 경도된 사례도 상당한 것 같다.
합동 교단은 대한민국 장로교파 중에서 가장 위력 있는 교단이다. 합동 교단은 1907년 독노회와 1912년 첫 총회의 역사성을 견지한 역사적 교단이다. 합동 교단은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보수신학과 개혁신학의 방패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신학 정체성에 대한 거대 합의를 이루어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것 같다. 신학 정체성의 깃발을 높인다면 어떤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신학 정체성을 세우면 교단의 일부의 반발을 인정하고 진행해야 한다. 모두가 인정하는 신학적 합의는 불가능하다.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칼케돈 신경으로 참 교회의 깃발을 올렸을 때에 단성론자들이 집단 이탈하였다. 결국 그 지역에서 이슬람이 득세하였다. 그럼에도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로마 황제 중에서 위대한 황제 중 한 위인이다. 지도자는 피할 수 없는 결단의 시간을 알아야 한다. 그 결단을 수행하는 사역자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그렇지 못한 사역자는 우물쭈물한 인간으로도 기억되지 않을 불명예가 될 것이다. 결단은 언제나 정통에 입각한 결단을 하여야 한다. 거대한 결정에 잔기술을 부리면 화합이 되는 것 같지만 추진 동력을 상실하여 결국 좌초될 것이다. 정통적이고 합법적인 결정을 한다면 비합법적인 세력에 의한 저항을 받겠지만 시대와 역사에 합당한 가치를 갖게 될 것이다.
필자는 믿음의 선진의 사상을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록 신학적 견해에서 차이가 있다할지라도 먼저 선진에 대한 존중으로 신학을 정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옛 지계석을 쉽게 움직이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죽산이 세운 지계석, “청교도적 개혁신학”은 융합되지 않은 두 금속이 결합한 것이다. 개혁신학에는 천년기론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언약도와 잉글랜드 청교도는 함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지만(1646년) 잉글랜드 청교도(독립파와 국교회파)는 거부하였다. 오히려 스코틀랜드 장로파에서는 종말론에 대한 견해가 약한 것 같다. 그래서 종말론에 청교도의 후천년기론적 견해를 수용하였을지도 모른다. 역사적 전천년기론과 후천년기론은 천년의 공통점이 있을 뿐 같은 종말론이 아니다.
필자는 합동 교단의 신학, 총신대학교의 신학 정체성을 죽산이 세운 기치대로 유지하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혁파 신학인 “무천년기론”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인준할 것을 제언한다. 많은 교수와 사역자들은 종말론에서 포용적인 자세를 갖고 있다. 무천년기론과 역사적 전천년기론의 병행에 대해서 부정적이지 않는데, 개혁신학에서 너무나 분명하게 무천년기론이 등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죽산이 한국 장로파에게 부여한 신학 유산이 결코 헛되게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그 신학을 맹종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신학의 내용도 많은 사역자들에게서 회자(膾炙)되면서 자연스럽게 정착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필자는 총신대학교, 합동 교단이 “스코틀랜드 장로파 신학의 근거와 주축”이 되겠다고 표방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신학을 합당하게 계승하며 복음을 전도하는 주의 몸된 지체로서 세워지길 기대한다.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형람서원)
출처 : 리폼드 투데이(http://www.reformedtoday.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