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성 용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창가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명심산과 무심천이 옆에 있고 멀리 우암산이 보인다. 아무런 생각 없이 한참을 앉아 있노라면 오전임에도 살며시 졸음이 찾아온다. 해결해야 할 과제도 없고 다투거나 경쟁해야 할 상대도 없다. 구속받거나 눈치 받지도 않아도 되는 생활, 출근을 안 한지가 2년이 넘었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는다. 음악 듣고 산책하고 등산하고, 평안한 삶 그 자체다. 얼마나 원하고 고대하던 은퇴 후의 삶이 아니던가? 고등학교 3학년 여름 교복을 입은 채로 청주시청에 출근했다. 가정형편상 국방부의 장학금을 받은 죄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달에 육군하사관학교에 입대했다. 군 생활 중 갑작스런 아버지의 별세는 나의 젊은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여섯 살 막내 동생을 포함한 다섯 명의 가족을 강원도 부대 인근으로 이사 시킬 수밖에 없을 만큼 절박했다. 결혼을 하면서 생긴 또 다른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중압감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2005년 두 달간 입원치료를 한 이후에는 아침에 일어나기도 출근하기도 정말 싫었다. 나에게 주어지는 업무의 해결도 버거웠고 무작정 떼쓰고 요구하는 민원인을 상대하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술을 멀리해야 했으므로 노래방으로 이어지는 회식자리도 부담스러웠고, 끼리끼리 어울려 저녁과 술을 자주 먹는 조직문화에 적응을 하기가 어려웠다. 나라를 위해서 주민을 위해서 일하고 봉사한다는 자부심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오로지 가장으로 육남매의 장남으로서의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철밥통의 끈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퇴직 이후 재취업은 물론 신경 쓰는 일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을 배운다든지 도전을 한다든지 하는 나 자신에게 조차 구속받고 통제받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시쳇말로 골치 아픈 일은 아예 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무조건 쉬고 맘껏 놀고 싶었다.
다행히 아들 딸 모두 홀로서기를 하였고 아내도 재취업 보다는 건강한 것이 돈 버는 일이라며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자연히 퇴직 후에 아내와 함께 수영과 등산을 하고 주말농장을 돌보며 소일하는 것이 은퇴 후의 삶을 살고 있는 생활의 전부였는데….
우연한 기회에 청주시에서 운영하는 1인1책 쓰기 프로그램을 알게 됐다. 책을 낼 수만 있으면 참 보람 있는 일이 될 성 싶었다. 그러나 ‘글을 써 본지가 언제인가. 학창시절 일기 쓰고 연애편지 몇 번 써 본 게 전부인데, 과연 내가 해 낼 수 있을까. 글을 쓰면서 또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아니 당신이 글을 못 쓴다고, 책을 못 낸다고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있느냐? 하다가 정 못하겠으면 그만두면 되지 뭘 망설이냐’며 핀잔 겸 조언을 해 주었다. 용기를 내어 1인1책 쓰기 선생님과 통화를 했고 부담 없이 참여하면 된다는 선생님의 편안한 안내에 의해 강좌에 처음으로 참석을 했다. 강의실에 들어서면서부터 강한 충격을 받았다. 참여하신 수강생 분들의 연세가 상상외로 많아 보여 서였다. 강의가 끝나고 간단한 자기소개가 있었는데 가장 연세가 많으신 분이 83세였고, 대부분이 60대 후반 70대였다. 내가 그중 제일 어렸다. 연세도 연세지만 하는 일, 하고 싶은 꿈을 말씀하시는데, 모두들 좀 더 나은 내일, 자아성취를 위하여 공부하고 도전하고 노력하시는 모습에 나는 또 한 번 혼란에 빠졌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이제 갓 은퇴한 내가 아무것도 안하고 오롯이 쉬고 놀 생각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반성을 했다.
오늘도 늦은 아침을 먹고 할 일 없이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젖는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지금처럼 아무 일도 않고 꿈도 없이, 이대로 안주하고 살 것인가? 새로운 삶을 위하여 무엇이든 시작할 것인가? 앞으로 10년 아니 20년 후에 난 어떤 모습일까? 어떻게 살아야지 후회를 덜 할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아침이다.
소크라테스가 사형 집행을 앞두고 음악 한 소절을 연습하고 있었다. 이를 본 제자가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묻자 "그래도 죽기 전에 음악 한 소절은 배우지 않겠는가?" 답했다는 글이 머리를 스친다. 지금부터라도 죽기 전에 음악 한 소절을 배운다는 마음으로 은퇴 후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2019년 6월)
첫댓글 선생님 은퇴후 노후 작가 라는 험준한 길 교수님을 이정표로 정상점을 찍으세요 가슴에서 응어리를 풀다보면
빈가슴이 되지않을까요 다음 생은. 후회없는 삶 예약해 두신것 같아요 화이팅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