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요하게 하라
고린도후서 8:7-15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이다. 가족예배로 드린다. 어린아이부터 어른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면 참 부요하게 느껴진다. 감사의 마음이 절로 나온다. 그런 감사의 마음으로 색동교회가 부요하게 하시는 은총을 누리기를 빈다.
감사절에 주시는 말씀을 생각해 보자. 지혜의 책 잠언은 이렇게 말한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잠 3:9-10).
무엇이 첫 열매인가? 감사하는 마음이 첫 열매이다. 감사할 때, 나는 주님께 드려진 첫 열매가 된다.
우리 교회는 여러가지 색이 어울린 색동교회이지만, 요즘은 녹색을 강조한다. 녹색 교회, 녹색 가정, 녹색 그리스도인이다.
얼마 전에 든 생각이다. 생수 값이 비쌀까, 휘발유 값이 비쌀까? 결론은 제주 삼다수 값이 휘발유 값보다 비싸다. 편의점에서 삼다수 0.5리터에 1,000원인데, 휘발유 1리터는 1,750원이다. 단순히 1리터로 비교하면 생수가 250원 비싸다.
그런데 주유소에서 기름 넣을 때 한 방울도 새지 않도록 애쓰면서, 생수는 마시다가 그냥 버리는 경우도 많다. 얼마나 낭비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목마름으로 가득하다. 우리가 목말라하는 것은 생수 값이 비싸서가 아니다. ‘홍수에 마실 물’이 없다는 속담은 풍요 속에서도 감사를 모르는 인생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명예와 물질을 얻는 것뿐 아니라, 정의와 진리와 창조질서의 삶에도 목말라야 한다. 그래서 깊은 생수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1)
맥추감사주일은 어떤 절기일까? 구약시대 전통에 따르면 유월절 후 49일 동안 매일 저녁 하루하루 날짜를 센다. 그렇게 오십일 째 되는 날이 오순절이다. 이날부터 칠칠절, 맥추절이라고도 부르는 감사절기다.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신 16:10-11).
감사는 모두가 함께 하는 잔치이다.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계명을 기억하고 실천하면서 내 인생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감사는 진정으로 하나님 안에서 부요한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면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하였다. 삶의 의미를 미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감사를 고백하고, 그런 마음으로 산다면 그의 생애가 복이 된다.
우리가 감사의 마음, 감사의 말, 감사의 행동을 할 때 그것이 우리의 습관이 되고, 성격이 되고, 마침내 운명이 된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다. 여러 사람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어느 목사가 기도를 안하고 밥을 먹기 시작하였다. 그 목사를 향해 “왜 식사기도를 안하냐?”고 물었다. 얼마나 무안했을까?
그랬더니 기도 안하고 밥을 먹던 그 목사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하나님 의붓아들이요?”
우리도 그렇다. 친아들, 친딸은 평소 감사하다는 말을 잘 안한다. 자기가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붓아들은 그때마다 감사드린다. 감사하는 마음에는 차라리 의붓아들이 낫다.
감사는 관계의 문제이다. 바울은 진정한 부요함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가능함을 일깨워 준다. 감사는 내 삶을 부요함으로 이끄는 지름길이다.
2)
초대 교회의 장점은 온 교회가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는 점이다. 교회 안에는 쿠파라는 일상적인 복지제도가 있어서 가난한 과부와 고아를 돌보았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3).
처음 교회의 집사제도는 일상적인 봉사를 위해 만들어졌다. 집사라는 뜻은 디아코니 즉 봉사자이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려는 부요함의 배경에는 당시 예루살렘교회가 겪는 가난한 현실이 있었다. 그 시절 예루살렘교회 사정이 참 어려웠다. 박해라는 현실에 직면하였고, 또 재난을 겪으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졌다.
이방인 지역 마게도냐의 교회들이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모금에 나섰다. 고린도교회에서도 이 모금에 기꺼이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내부 갈등이 생겨 잠시 중단되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향해 사랑의 의무를 강조하였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나눌 것을 호소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적극적으로 권면한다.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7).
고린도교회는 잠시 분쟁이 있었지만 점점 좋은 믿음으로 성장하였다. 신앙에 있어서 말과 지식도 풍부하였다. 사랑에 대한 간절함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였다. 형제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이 더 필요하였다. 바울에 따르면 그것은 부담스러운 짐을 지는 일이 아니라, 은혜를 풍성하게 하는 일이다.
남을 돕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일이다. 주님은 너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셨다. 성경은 말한다. 영어 속담에 ‘not talk the Talk, but walk the Walk’가 있다. 이젠 말로만 하지 말로 행동하라. 간절한 마음과 진실함으로 그 사랑에 참여하라.
높으신 예수님이 낮아지심은 낮은 자를 높여주시기 위함이었다. 부요한 예수님이 가난해지심은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하심이었다. 평강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죽은 자까지 살리기 위함이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9).
이것이 초대 교회의 감사고백이요, 우리의 신앙고백이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1:27)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고, 섬기고, 버리심으로써 죄인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친교를 누리게 하셨다. 그리하여 이제 하나님의 부요함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은 내가 부요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9). 그것은 물질의 부유함만이 아니다. 그런 부유함은 가지면 가질수록 목마르다. 부자는 늘 부족하기 때문에 부자다. 그래서 부자가 더 무섭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더 인색하다는 말이다. 진정한 부자는 누구인가? 잠언은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 부한 체하여도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한 체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잠 13:7).
부요함은 무엇인가? 참 부요는 믿음, 사랑,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화,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상태를 말한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 삶의 부요함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물질을 대하는 데 있어서 여유 있는 태도와 영적인 풍성함을 얻기를 바라신다.
부요한 사람은 인색하지 않고,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너그럽고 넉넉한 삶을 산다. 진실로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신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요, 그 사람은 부요한 삶을 산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우리의 삶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다. 소중한 인생이기에 물질이 전부일 수 없다. 물질을 쌓으려고 내 삶의 전부를 사용하는 일은 어리석다. 감사함으로 나누고, 나눔으로써 더 부요한 하나님의 역설을 누리기를 바란다.
3)
평소 고마운 마음을 알고 사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 줄 아는가?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영혼의 자서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외할아버지가 이렇게 유언하였다.
“올리브와 포도나무를 잘 돌보아라. 나무도 옛날에는 인간이었는데 너무 오래전이라 그런 줄 모르고 살아갈 뿐이다... 인간은 기억을 하니 그래서 인간이 아니겠니...”
작가의 말에 따르면 나무에게 고마움을 모르면 그건 사람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사람도 아니라는 교훈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예루살렘의 재난에 동참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당시 고린도교회를 비롯해 모든 교회들은 예루살렘교회에 복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예루살렘교회가 겪는 어려움에 동참하라고 한다.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14).
바울은 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마음에 원하는 대로 하라.
선한 일을 작정했으면 어서 서둘러라.
끝까지 책임져라.
선의의 경쟁심을 가져라.
경제적 나눔을 통해 영적 나눔을 실천하라.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면 나도 도움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이 공평하게 채워주심을 믿고 하라!
사실 어려울 때에 누군가 나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곤란한 사정을 돕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위로와 힘이 될까? 여러분의 경우, 내가 힘들 때에 진실한 마음으로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행복도 지수를 보면 ‘힘든 상황에서 남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를 묻는 질문에서 한국인은 전체 36개 나라 중에서 35등이었다. 한국인 81%가 그렇다고 했는데, 남자는 77%, 여자는 84%다. 다섯 명 중 한 사람은 도움을 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은 큰 비극이다.
우리 사회가 그렇게 고향과 혈연, 학연을 따지며 ‘우리가 남이냐’를 외치는 사람들인데, 우리나라가 세계 선진국들 중에서 꼴찌라니 기가 막힌다. 왜 그런가? 왜 한국인은 서로 도움을 받기가 어려울까? 뒤집어 보면 그만큼 우리가 남을 도와주지 않고 살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아는 OECD 국가의 사람들은 대개 그리스도교 문화권에 산다. 통계에 따르면 유럽인들은 우리 보다 네 배를 나누고, 미국인들은 여덟 배를 나누더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 11:25).
감사절은 은혜의 하나님께 돌아가는 날이다. 감사는 내게 주신 복을 나누는 일이다. 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일이다. 그리하여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품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이를 위해 감사를 습관화하라. 그리하여 성격으로 만들고, 운명이 되게 하라. 칼 라너는 <일상>이란 책에서 그리스도교의 신비는 일상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칼 라너는 ‘일하는 것, 걷는 것, 앉는 것, 보는 것, 웃는 것, 먹는 것, 자는 것 등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일들과 익숙한 삶의 자리에서 신비와 만날 것’을 권한다. 바로 감사에 대한 교훈일 것이다.
그런 내게 우리 주님은 ‘부요한 삶’을 약속하신다.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부요하심이 우리를 너그럽고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신다.
명심하라. 진정한 부요함은 ‘부요하게 하소서’라는 청원이 아니라, ‘부요하게 하라’는 말씀에 대한 순종에서 부터 시작된다.
복된 맥추감사절기에 하나님의 부요하게 하시는 은혜로 내 삶에서 진정한 부요함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