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인삼 이야기로 풀어보자. 북한에서는 개성인삼이 독보적이지만, 남한에서는 금산·강화·풍기를 3대 인삼재배지로 꼽는다. 어느 고을이나 마찬가지지만 풍기 주민들의 인삼 자랑은 유별나 어느 자리서나 빠지지 않는다. 풍기 인삼은 두세 번 달여 먹어도 약효가 줄지 않으며, 말렸을 때도 굵기가 변하지 않아 산삼에 버금가는 인정을 받았다. 또 풍기 인삼을 담았던 봉지는 백날이 가도 향이 가시지 않을 정도로 약효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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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백산을 등지고 자리 잡은 풍기 고을. 인삼과 십승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 풍기에 인삼재배가 성행한 것은 16세기 중엽부터라 알려져 있다. 1545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산삼을 조정에 바치느라 고생하는 주민들을 위해 산삼의 종자를 직접 심어 퍼뜨리면서 시작된 것이라 한다. 이후 주세붕이 1551년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되자 인근 산에서 산삼 씨앗을 채취해 재배하게 했는데, 이것이 또한 개성인삼의 시초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인삼을 재배한 것은 이보다 이전이지만, 주세붕은 인삼 재배를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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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기역 앞에 있는 풍기인삼시장. 풍기 인삼은 1541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 선생이 백성들에게 산삼 종자를 재취하여 재배케 하면서 명성을 떨쳤다. | 인삼을 재배하고, 사과를 따고, 인견을 짜며 생계를 이어가는 풍기의 주민들은 대부분 조선 말기를 전후해 전국에서 모인 비결파의 후손들이다. 정감록의 감결은 나라 제일의 피란지로 손꼽은 열 군데의 승지 가운데서도 풍기 금계동(金鷄洞)을 으뜸으로 쳤다. ‘금계’라는 지명은 풍수에서 ‘닭이 알을 품고 있다’는 금계포란형에서 유래했다. 일반적으로 십승지라 하면 전란을 피할 수 있고, 질병이나 굶주림, 가뭄이나 홍수 등의 피해가 없는 곳이어야 한다. 그러나 소백산 지역 역시 임진왜란과 6·25전쟁 때 참혹한 피해를 입었고, 금계동이 있는 마을 역시 전란의 참화를 피하지는 못했다. 풍기에서 올려다보면 어디서나 소백산(小白山·1,440m)이 올려다보인다. 백두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이 동해로 치우쳐 흐르다가 태백 매봉산부터 문득 내륙으로 머리를 돌려 내려와 처음으로 빚은 소백은 우리 조상들이 예부터 신령스럽게 여겨온 산이다. 일찍이 한국 최고의 예언자로 불리던 남사고(南師古·1509-1570)는 이 소백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사람이 살 만한 산’이라며 넙죽 절을 올렸다. 여인의 육체처럼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펼쳐지는 소백의 평원은 어디서나 돋보인다. 특히 연화봉에서 비로봉, 국망봉에서 상월봉 구간의 고원 평원은 누구나 반할 만한 경관을 갖고 있다. 늦봄의 진달래와 철쭉, 겨울의 설화와 상고대의 명성은 이미 나라 안에서 으뜸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관에 마음이 풀어지기도 하지만, 영마루를 넘나드는 겨울철 칼바람은 웬만한 돌멩이는 모두 날려버릴 정도로 거세다. 북동에서 남서 방면으로 뻗어내린 소백의 능선이 늘 북서풍을 맞받기 때문이다. 풍기에서 부석사까지 이어지는 20km 정도의 지방도는 일명 ‘사과 드라이브’ 코스다. 가을철이 되면 이곳은 새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린 과수원이 길 양쪽으로 펼쳐진다. 차를 세우고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사과나무의 사열을 받으며 달리는 기분은 이 길의 큰 매력이다. 풍기와 부석 사이에 자리한 순흥(順興)은 조선시대에 영월·태백·봉화·울진 지역을 관할하던 한강 이남 제일의 도호부(都護府)가 있던 고을이다. 영주 지역에서도 특히 이 지역에 고분이 제일 많이 분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넉넉한 농토와 소백의 자연은 이 고을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이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소백산 동쪽 고을들을 호령하던 이곳은 1457년(세조 3) 피바람이 불면서 쑥대밭이 되었다. 바로 ‘금성의 변’이라 부르는 단종복위사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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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종복위를 꿈꾸던 금성대군이 귀양을 와서 머물던 곳. 탱자나무 울타리가 눈길을 끈다. | 수양대군이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김종서·황보인 등을 죽이자, 동생인 금성대군은 옳지 못함을 지적하다 순흥으로 귀양 오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금성대군은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하여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했다. 금성대군은 순흥부사로 부임한 이보흠과 의기투합했다.
이들은 우선 병력을 모으고 군량을 넉넉히 준비해 놓고 힘이 생기면 영월에 있는 단종을 순흥으로 모셔온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군사를 풀어 백두대간의 죽령과 새재를 막고 힘을 기른 후, 한양으로 진격해 단종을 다시 왕으로 모시려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허나 이들의 희망은 금성대군의 몸종과 순흥부사의 부하가 공모해서 세조측에 밀고함으로써 실패하고 만다.
피가 튀는 처절한 응징이 뒤를 따랐다. 주모자뿐만이 아니라 역모에 가담했다는 굴레를 쓴 숱한 주민들이 희생됐다. 이때 이들이 참살 당하며 흘린 피가 순흥의 죽계천을 따라 30리 밖까지 흘러내렸는데, 지금도 하류에는 ‘피끝’이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이 남아있다. 순흥 읍내에는 묵밥으로 유명한 식당이 있어 외지인들이 별식이라며 즐겨 찾는데, 이 음식 역시 당시 사건의 여파라는 의견도 있다. 즉 순흥이 도호부로 명예회복될 때까지 200여 년간 조정의 감시와 핍박을 받아 주민들의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그나마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든 묵밥이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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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수서원 | 한편, 순흥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유명한 고을이기도 하다.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어느덧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인 1543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세운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처음 건립 당시에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했는데, 나중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서원을 공인화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국가지원을 조정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다. 당시 임금인 명종은 손수 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했던 것인데,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한다’는 뜻으로 학문 부흥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액서원(賜額書院)은 나라로부터 책·토지·노비 등을 하사받고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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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은히 퍼지는 솔향이 일품인 소수서원 솔밭. 소수서원의 소나무는 학자수라 불린다. | 소수서원은 고려 후기의 명신 안향의 영정으로서 한국 영정 가운데 가장 오래된 회헌 영정(국보 제111호)을 비롯해 수많은 문화재가 있으나, 무엇보다 울창하게 들어찬 솔숲이 좋다. 이 나무들은 흔히 학자수(學者樹)라 불리는데, 그 숲에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식히던 소혼대(消魂臺)라는 바위가 있다. 그런데 소수서원에 들어서면 솔숲 오른편에 서 있는 당간지주(보물 제59호)가 유독 눈길을 끈다. 소수서원을 처음 찾은 이는 누구나 “서원에 웬 당간지주?” 하며 의아하게 생각하지만, 원래 소수서원 자리는 숙수사(宿水寺)라는 절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고개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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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수서원에 있는 당간지주는 원래 이곳이 숙수사라는 절집이 있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 소수서원에는 한때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리는 흔적이 많다. 서원 입구의 경렴정이라는 정자 너머로 보면, 맑은 죽계수 건너편 바위에 ‘敬(경)’이란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보인다. 여기에는 절터와 관계된 전설이 전한다. 주세붕이 숙수사를 헐어내고 서원을 건립할 때, 절에 있던 불상들을 모두 이 바위 아래의 물에 던져 버렸다. 그러자 한 맺힌 불상들이 밤이면 소를 첨벙거리며 뛰어올라 사람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이를 전해들은 주세붕은 바위에 ‘敬’ 자를 새겼더니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삼가하라’는 이 글귀는 억불숭유라는 조선의 정책에 따라 불교의 힘이 축소되고 유교의 세력이 커지던 때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절터가 서원터로 바뀌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소수서원 일대에서는 1960년대 초에 국보급 금동불상 등이 10여 점이나 발견되기도 했다. 소수서원 충효교육관 앞뜰에는 숙수사터에서 출토된 석조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와서 소수서원과 길 건너의 금성단만 보고 떠나려니 왠지 허전하고 아쉬웠는데, 최근 소수서원에서 이어지는 죽계천 건너편에 서원과 향교 등 전통 교육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소수박물관과 선비촌이 조성됨으로써 제법 넉넉하게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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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비촌 | 소수서원 옆에 위치한 선비촌은 전통 가옥을 복원해 모아놓은 민속마을이다. 널따란 부지에 기와집인 만죽재 고택, 해우당 고택, 김문기 가옥, 인동장씨 종택, 김세기 가옥, 두암 고택 등 7동과 아담한 초가인 장휘덕 가옥, 김뢰진 가옥, 김규진 가옥, 두암고택 가람집, 이후남 가옥, 김상진 가옥 등 5동이 자리하고 있다. 영주에 있는 기념할 만한 모든 가옥을 한 자리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강학당, 물레방앗간, 대장간, 정자, 산신각 등 모두 40여 채의 건물이 복원되어 조선시대 영남 선비 마을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선비촌의 장점은 사람들이 들어가서 직접 살 수 있을 정도로 제대로 복원하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겉만 멀쩡해 보이는 드라마 야외 세트장과 달리 직접 난방을 하고 사람이 살 수 있게끔 지었다. 거기에 배추, 무, 조, 수수 등이 자라고 있는 텃밭도 좋았으나, 마을 한쪽에 아담하게나마 사과밭을 조성해놓았다면 금상첨화였을 거란 생각을 해봤다. 소수서원을 나와 금성단, 금성대군 위리안치지, 순흥향교 등을 둘러보고 부석사로 가는 길. 마음이 급하지만, 고치령 산신령이 소매를 잡아끈다. 하늘이 점지해준 승지가 존재한다는 양백지간(兩白之間)은 백두대간의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를 말한다. 지역적으로 크게 보면 강원도 영월, 충청북도 단양, 그리고 경상북도 영주·봉화 지역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중에서도 고치령은 소백이 끝나고 태백이 시작하는 고개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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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경북 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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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치령 가는 고갯길. 순흥의 금성대군과 영월의 단종이 서로 소식을 전하던 고갯길이기도 하다. | 영주의 순흥과 단양의 영춘을 잇는 고치령(770m)은 신라시대에 근처에 절을 지으려고 터를 잡았던 일로 절터고개라 불렸으나 세월이 흐르며 고치가 되었다. 대동여지도에는 곶적령(串赤嶺)으로 적고 있다. 고치령은 큰 고개인 죽령을 포함해, 영월 하동과 영주 부석을 잇는 마구령과 함께 소백산을 넘는 세 개의 고갯길 중 하나였다. 지금은 백두대간 종주자들이나 고갯마루의 산신각에서 치성드리는 무속인들 외엔 찾는 이 별로 없는 고개지만, 20여 년 전인 1980년대까지만 해도 주민들의 통행이 잦은 고갯길이었다.
고치령 산신각엔 금성대군과 단종대왕이 모셔져 있다. 민간에 전승되는 무속신앙에 의하면 세조에게 쫓겨나 유배지 영월에서 죽은 단종은 태백산신령이 되었고, 조카를 보호하다 형인 수양대군 눈밖에 난 금성대군은 순흥에서 단종복위를 꾀하다 죽임을 당한 후 소백산신령으로 모셔졌다. 비록 올바른 세상을 꿈꾸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민초들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살벌한 분위기에서도 소백과 태백 사이의 양백지간에 산신각을 짓고 금성대군과 단종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고치령은 금성대군과 단종을 이어주는 길목에 있다. 영주의 향토사학자들은 순흥으로 유배당한 금성대군이 영월 청령포에 갇힌 단종과 소식을 주고받을 때 그의 밀사들이 이 고치령을 넘나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치령은 순흥에서 영월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고치령은 단순한 고갯길이 아니라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의리의 통로로 승격되는 것이다.
고치령 산신당은 마을사람들이 매년 소를 잡아 제를 올릴 정도로 영험한 제당이라 타지에서도 무속인들이 많이 들락거렸다. 물론 백두대간 종주자들도 쉬어가면서 무사 산행을 빌기도 한다. 짙은 숲과 어우러져 성스러운 기운이 넘치던 산신각은 그러나 2001년 어떤 기도객이 켜 놓은 촛불 때문에 화재가 발생하는 바람에 전소되었다. 현재의 산신각은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여기서는 백두대간 분수령이 행정구역을 나누지 못하고 있다. 고치령 북쪽의 마락리를 비롯해 마구령 북쪽의 남대리, 도래기재 서북쪽의 우구치리도 모두 그렇다. 이 마을들은 모두 행정구역으로는 영주에 속하면서도 백두대간 너머에 있는 탓에 남한강 수계가 된다. 이곳의 분수령은 도계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로 제법 굳센 편이다. 그래서 흔히 첩첩산중에 갇힌 이 마을들을 ‘영남의 고도(孤島)’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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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치령 너머의 마락리에 있는 마지바위. 보부상의 말이 이곳서 자주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 고치령의 마락리(馬落里)는 순흥과 영월을 오가던 보부상의 말들이 마지바위라 불리는 곳에서 자주 떨어져 죽었다 하여 불리는 지명이다. 이 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정월 초나흗날과 시월 초정일에 고치령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이곳 주민들은 영월이나 영춘으로 나가는 대신 고치령을 넘어 다녔다. 새벽에 대문 나서면 한밤중에야 돌아오는 먼 하룻길이었지만 순흥장(2·7일)이나 부석장(1·6일)의 규모가 제법 컸기 때문이다.
마구령의 남대리(南大里)는 정감록에서 이르는 십승지 가운데 한 곳이자, 남사고가 양백지간에 숨어 있다고 이른 명당으로 꼽히는 마을로도 알려져 있다. 순흥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할 때 병사를 양성하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마을 북쪽의 어래산(1,063m)은 영주와 충북 단양, 강원도 영월이 만나는 ‘삼도봉’이다. 주민들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영주의 순흥장, 단산장(4·9일), 부석장이 서는 날이면 단양 의풍리와 영월 와석리 사람들과 땔감이나 산약초를 둘러매고 고치령과 마구령을 넘어갔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화전민 이주정책 이후 주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마을은 한적해졌다.
고치령을 빠져나왔을 때 사위는 제법 어둑해졌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부석사(浮石寺)를 찾으려다 문득 한밤중의 부석사가 궁금해졌다. 어둠을 헤치며 부석사로 내달렸다. 산채정식 따위를 파는 식당이 즐비하게 늘어선 부석사 사하촌을 지나면 완만한 경사의 길 좌우로 은행나무 가로수가 줄을 잇는다. 가을이 깊어 가면 샛노란 이파리로 뒤덮여 장관을 이루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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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석사 야경. 달도 없는 깜깜한 밤이었으나 오히려 독경소리는 더욱 듣기가 좋았다. | 또 은행나무 뒤로 펼쳐진 산비탈 과수원에선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 사과가 나그네를 유혹한다. 나라에서 가장 예쁘며 웅장한 절집으로 꼽히는 부석사는 일주문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렇게 가슴을 뛰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달조차 뜨지 않은 깜깜한 밤. 은행나무도, 사과나무도 모두 칠흑 같은 어둠에 묻혀 있을 뿐이다. 일주문 지나 천왕문 오르는 길. 왼편엔 절에서 깃발을 게양하던 당간지주가 어렴풋이 보인다. 전문가들이 ‘우리나라 절집의 당간지주 중 가장 세련되게 다듬은 명작’이라고 평가 받는 작품이다. 여기서 무량수전에 이르는 아홉 개의 거대한 석축은 극락에 이르는 구품정토(九品淨土)다. 석축에 쌓은 가파른 계단을 하나 오를 때마다 고통의 사바세계는 점차 멀어진다. 산사는 수직 공간의 경사에 수평으로 터를 잡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빛날 화(華) 자 형태로 오밀조밀하게 건물이 배치된 부석사는 여느 절집과는 다르다. 장딴지에 잔뜩 힘이 들어가게 하는 경사는 일주문 지나 천왕문, 범종각, 안양루에 이르도록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경사는 점점 가팔라진다. 부석사 계단이 가파른 줄은 알았으나 불빛 없는 한밤중에 랜턴도 없이 오르려니 더욱 까다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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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건물로 꼽히는 부석사 무량수전. | 안양루(安養樓)의 마지막 계단을 오르면 일제강점기 때 버트런드 러셀이 와서 보고는 ‘조선 국보 1호’라며 경탄해마지 않았던 석등 너머로 무량수전(無量壽殿)이 반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창건연대가 가장 오래된 무량수전은 전문가들로부터 ‘더하고 뺄 것 하나 없는 완벽함을 자랑하는 건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아랫중간부분이 불룩한 배흘림기둥과 사뿐히 고개든 추녀의 어울림은 현대 건축가들도 탄복할 정도. 무량수전은 외부만이 아니라 내부 공간도 눈길을 끈다. 보통 불전(佛典)은 내부 정면에 불상을 놓지만 이곳의 주불(主佛)인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은 왼쪽 벽에서 오른쪽을 바라보고 앉아있다. 무량수전의 건물이 남향이므로 불상은 동향인 것이다. 이는 불국정토의 올바른 정진을 바라는 불교정신의 발로라 한다. 왼쪽 끝에 불상을 배치하면 정면에서 볼 때보다 먼 거리의 공간감각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불상 앞의 기둥들에 의해 장엄함까지 더해진다. 거기에 천장도 막혀 있지 않으니 웅장함도 더불어 표현되는 것이다. 또 길이와 굵기가 제각기 다른 부재들은 뛰어난 절제미를 자랑하고, 기둥·대들보·서까래의 조화는 고저장단(高低長短)의 음률을 자아낼 정도로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안양루에서 사찰 바깥을 바라보면 백두대간의 소백산에서 뻗어나온 산줄기들이 영남땅 아담한 분지들을 껴안은 풍경이 펼쳐진다. 김삿갓이 여기서 “인간 백세에 몇 번이나 이런 경관을 볼까나”하며 읊조렸다던 풍경이다. 안개 낀 아침 풍경이 좋으나 역시 지금은 아무 것도 뵈지 않는 한밤중. 그래도 웬일인지 그다지 서운치 않다. 무량수전에서 조사당(祖師堂)으로 가는 언덕길의 삼층석탑에서 바라보는 경관도 안양루에서의 그것에 빠지지 않는다. 부석사 내부 공간의 짜임새에 못지않게 외부 공간으로 펼쳐지는 백두대간 전망대로서의 경관은 정말 장하다. 의상과 선묘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의상은 이곳에 절터를 잡으려 무진 애를 썼다. 소백산의 비로사, 초암사, 성혈사, 그리고 직선거리로 20여 리 떨어진 봉화의 축서사 등 인근의 웬만한 절집은 대부분 의상이 부석사터를 찾기 위해 다니면서 첫 인연을 맺게 된 절집들이 아닌가. 어둠이 너무 짙어 조사당까지 오르지 못하고, 소박한 삼층석탑 옆에 앉아 밤 깊은 산사를 오랫동안 내려다본다. 밤하늘에 잔잔히 울려퍼지는 목탁소리와 염불소리…. 그리고 한 스님이 천 배를 올리고 있는 그 밤에 산사의 외형적인 조망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다. 아니 그동안 우리는 너무 바깥의 경치나 건물의 외형에만 신경을 썼는지도 모른다. 가만 내려다보니 이곳은 삼라만상이 하나로 어울려 돌아가는 화엄의 공간이었다. 이런 밤이라면 종교가 달라도 부처께 삼배를 올린다 해서 누가 무엇을 탓하겠는가. 길손의 발걸음은 어느새 여래상이 굽어보고 계시는 무량수전으로 이끌려가고 있었다. 풀벌레 우는 가을밤이 제법 깊다.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경북 영주
영주,어떤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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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북부 중앙에 있는 영주시(榮州市)는 동쪽으로는 봉화군, 남쪽으로는 안동시·예천군, 서쪽은 충청북도 단양군, 북쪽은 강원도 영월군과 접하는 고을이다.
영주 북서쪽으로 선달산(先達山·1,236m)~국망봉(國望峰·1,421m)~소백산(小白山·1,440m)~연화봉(蓮花峰·1,394m)~죽령(竹嶺·689m)~도솔봉(兜率峰·1,314m) 등 백두대간 분수령이 기호지방과 경계를 이루며 뻗어 있다. 기호지방과의 교통은 주로 죽령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천은 소백산에서 발원한 남원천(南院川)·금계천·죽계천(竹溪川)·단산천이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의 지류인 서천으로 모여 영주 시가지를 적시고 지난다. 또 부석을 적시고 흘러온 낙화암천을 받아들인 내성천(乃城川)이 서천과 나란히 남류하는데, 이들 하천 유역에는 비교적 비옥한 침식분지가 발달해 있다.
백두대간 분수령 동쪽 사면에 위치한 내륙 분지이기 때문에 기온의 연교차가 큰 대륙성기후를 나타낸다. 때문에 계절적으로 봄과 가을이 짧다. 1월 평균기온은 -2.9℃ 안팎이며, 8월의 평균기온은 24.5℃다. 연강수량은 약 1,515mm이며, 연최저기온은 -16.2℃이고, 최고기온은 35.5℃를 나타낸다.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진한 12국의 하나인 기저국(己?國)이 풍기읍에 있었다. 고구려 때 내이군(奈已郡)·급벌산군(及伐山郡)이, 신라 때 기목진(基木鎭)이 설치됐다. 757년(경덕왕 16) 내이군은 내령군(奈靈郡)으로, 급벌산군은 급산군(及山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 때 내령군이 강주(剛州)로, 급산군이 흥주(興州)로, 그리고 기목진이 기주현(基州縣)으로 바뀌었으며, 강주와 흥주는 각각 지영주사(知榮州事)와 순흥부로 승격됐다.
조선 초기에 군현의 등급이 조정되면서 영주와 기주는 군으로 바뀌었고, 기천군은 1450년(세종 32) 풍기군(豊基郡)이 됐다. 1896년(고종 33) 13도제 실시로 경북의 군이 된 뒤 1914년 군·면 통폐합 때 영주군·풍기군·순흥군(順興郡)이 통합됨으로써 영주군이 성립됐다. 1980년 영주읍이 시로 승격해 분리되고, 나머지는 영풍군(榮豊郡)으로 개칭됐다. 1995년 시·군 통폐합에 따라 영풍군이 영주시에 통합됐다. 2006년 현재 1읍 9개면 9개동을 관할한다.
농경지는 논이 45%, 밭이 55%로 밭농사를 많이 짓는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의 곡류와 약초·잎담배·인삼 등의 특용작물이며, 사과재배가 성하다. 특히 풍기인삼과 풍기인조견직물이 유명한데, 이곳의 인삼 재배면적은 전국의 약 20% 정도에 이른다. 강원도와 충북 등 부근의 풍부한 임산자원을 기반으로 제재·목재·펄프 관련 산업이 발달했으며, 관동지방의 석탄 등 지하자원을 영남지방으로 수송하는 수송중심지가 되고 있다. 교통은 중앙선·영동선·경북선 등의 산업철도가 교차하고, 중앙고속도로와 국도, 지방도가 지나므로 편리하다.
|부석사|
부석면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있는 부석사(浮石寺)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도량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大敎)를 펴던 곳이다. 의상과 선묘(善妙)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창건 설화는 유명하다. 부석사라는 이름은 무량수전 서쪽 옆의 떠 있는 돌을 ‘뜬돌’이라 부른 데서 연유했다.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다.
1016년(고려 현종 7)에 원융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창했고, 1376년(우왕 2)에 원응국사가 다시 중수하고, 이듬해 조사당을 재건했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고, 1916년에는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국보 5점, 보물 4점 등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대찰이다. 전화 639-6498, 홈페이지 www.pusoksa.org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세워져 있는 석등(石燈·국보 제17호)은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꼽히고 있다.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다. 특히, 화사석 4면에 새겨진 보살상의 정교함은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4각 바닥돌은 옆면에 무늬를 새겨 꾸몄으며,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기둥을 받치고 있다. 전형적인 8각 기둥형태인 이 기둥은 굵기나 높이에서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는데, 위로는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은 윗받침돌을 얹어놓았다. 8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겨놓았다. 지붕돌도 역시 8각인데, 모서리 끝이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해 보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얹었던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무량수전(無量壽殿·국보 제18호)은 부석사의 중심 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지었으나, 1358년(공민왕 7)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건물은 1376년(고려 우왕 2)에 다시 짓고 1916년에 해체·수리했다.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부석사 조사당|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부석사 조사당(祖師堂·국보 제19호)은 1377년(고려 우왕 3)에 처음 세웠고, 1490년(조선 성종 21)과 1493년에 다시 고쳤다. 앞면 3칸, 옆면 1칸 크기의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를 기둥 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이 아담하기 때문에 세부 양식이 무량수전보다 한결 간결하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고, 좌우로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광창을 설치해 놓았다. 조사당 앞 동쪽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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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조사당 벽화|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부석사 조사당 안쪽에 있는 벽화(국보 제46호)는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 색, 백색, 금색 등으로 채색했으며, 각각의 크기는 길이 205cm, 폭 75cm 가량이다.
양쪽의 두 보살은 풍만하고 우아한 귀부인의 모습이며, 가운데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보는 건장한 모습이다. 훼손된 부분이 많고 후대에 덧칠하여 원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율동감 넘치는 유려한 선에서 고려시대 불화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건물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 조사당을 세운 연대가 1377년(고려 우왕 3)임을 알게 됐으며, 벽화를 그린 연대도 같은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 됐으며, 회화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는 벽면 전체를 떼어 유리상자에 담아 무량수전에 보관하고 있고, 이곳에는 모사한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은 고려 초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으로,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돼 가치가 매우 크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이다. 불상의 높이는 2.78m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손 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불상을 모신 장소가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라는 사실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이 아미타불이라고 여기고 있다. 지금의 손 모양은 조선시대에 불상의 파손된 부분을 고치면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소수서원|
순흥면 내죽리의 소수서원(紹修書院·사적 제55호)은 한국 최초의 서원이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의 사묘를 세우고 다음해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시초다. 1544년 안축과 안보, 1633년(인조 11)에는 주세붕을 추가로 모셨다.
1550년(명종 5)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와서 조정에 상주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賜額)과 사서오경, 성리대전 등의 내사(內賜)를 받게 되어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학이 됐다. 1871년(고종 8)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를 면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전화 054-639-6693
|회헌 영정|
소수서원에 있는 회헌(晦軒) 안향(安珦·1243-1306)의 초상화(국보 제111호)로 가로 29cm, 세로 37cm의 반신상이다. 안향은 고려 원종 1년(1260) 문과에 급제go 여러 벼슬을 했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다녀오면서 주자학을 우리나라에 보급한 인물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다.
세상을 떠난 지 12년 후인 1318년(고려 충숙왕 5) 공자의 사당에 그의 초상화를 함께 모실 때 1본을 더 옮겨 그려 순흥향교에 모셨다가 조선 중기 백운동서원을 건립하면서 이곳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현재 전해지는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 고려시대 초상화 화풍을 알 수 있어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시선의 방향과 어깨선에서 선생의 강직한 인상이 보인다.
|주세붕 영정|
조선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주세붕의 상반신을 그린 초상화(보물 제717호)로 가로 62.5cm, 세로 134cm다. 주세붕(周世鵬·1495-1554)은 1543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을 세웠다. 이 초상화는 사모관대의 정장 관복을 차려입고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간략한 선으로 묘사하고, 넉넉한 몸체에 목은 거의 표현하지 않아 권위적인 기품이 엿보인다.
정확한 제작연대를 추정하기 힘들지만 색이 바라고, 훼손된 상태, 복식, 필법 등으로 미루어 제작연대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16세기 초상화가 대부분 공신상인데 비해 학자의 기품이 드러난 학자상으로 매우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선비촌|
소수서원 옆에 위치한 선비촌은 전통 가옥에서 숙박과 전통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민속마을이다. 18,000평 부지에 기와집인 만죽재 고택, 해우당 고택, 김문기 가옥, 인동장씨 종택, 김세기 가옥, 두암 고택 등 7동과 아담한 초가인 장휘덕 가옥, 김뢰진 가옥, 김규진 가옥, 두암고택 가람집, 이후남 가옥, 김상진 가옥 등 5동이 자리하고 있다.
이외에도 강학당, 물레방앗간, 대장간, 정자, 산신각 등 모두 40여 채의 건물이 복원되어 조선시대 선비 마을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선비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전시와 이벤트, 전통문화 체험 등 각종 기획프로그램에서 수준 높은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숙박료는 기와집 2인1실 25,000∼30,000원, 4인1실 50,000원. 초가집 2인1실 20,000원, 4인1실 40,000원(054-638-5831). 요금은 어른 3,000원, 청소년 2,000원, 어린이 1,000원. 주차료는 없다. 이 입장권으로 소수서원, 소수박물관, 선비촌을 모두 둘러 볼 수 있다. 관람시간 09:00~22:00. 전화 054-638-7114, 홈페이지 www.sunbitow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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