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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엔가로 부터 위로받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쩌면 남에게 위로를 주기보다는 모두 위로받기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은 우리에게 마음의 여유를 잘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苦海라 하루하루가 불안불안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행복에 겨운 날을 보내는 이도 없지는 않겠지만요! 19세기 후반에 파리에서 활동했던 에리크 사티라는 조금은 낯설은 음악가가 있습니다. 요즘 그의 음악이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도 가끔 들리고 있습니다. 살아 생전에는 큰 평가를 받지 못했던 그였습니다. 위로받고 싶으시다면 사티의 음악에서 그 '위로'를 느껴보세요. 한번 올려봅니다.
▲Long take로 담은 영국의 Brixham 절벽에서의 드라마 장면에 흐르는 Erik Satie의 피아노 곡 '짐노페디(Gymnopédies)'
<3개의 짐노페디>(Trois Gymnopédies)는 제목처럼 모두 세곡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짐노페디는 그리스어로 ‘벌거벗은 소년들’이라는 뜻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축제에서 소년들이 벌거벗고 추는 춤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적이기보다는 상징적인 제목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 ‘벌거벗었다’라는 표현은 사티의 음악에 매우 적절한 제목이기도 합니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버린, 말하자면 불필요한 장식이나 감정의 과다 노출이 없는 단순한 음악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사티의 친구였던 시인 장 콕토는 이 곡을 듣고 “벌거벗은 음악”이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사티의 음악이 대개 그렇듯이 연주시간은 매우 짧습니다. 가령 이 곡을 가장 느리게 연주하기로 유명한 네덜란드 태생의 피아니스트 라인베르트 데 레우(1938~ )는 15분 52초에 걸쳐 연주합니다. 하지만 대개의 피아니스트들은 10분 안팎으로 연주합니다. 1곡에는 ‘느리고 고통스럽게’(Lent et Douloureux), 2곡에는 ‘느리고 슬프게’(Lent et Triste), 3곡에는 ‘느리고 엄숙하게’(Lent et Grave)라는 지시가 달려 있습니다.
정형화된 틀과 전통을 거부하면서 반복과 나란히 이어지는 선율을 기본으로 한 간결한 표현이 사티 음악의 특징입니다. 단순하긴 하지만 흡인력이 강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내는 것이 사티 음악의 매력입니다. 그러다 보니 當代 사람들과 소통하기 어려웠고, 그로 인해 그는 대중들에게 외면받으며 비주류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평생 가난하게 살아야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사티가 한 여성을 사랑했습니다. 수잔 발라동(Susan Valadon)! 르누아르의 그림 모델이자 프랑스 여류 화가 1호였던 그녀는 당대 예술가들의 뮤즈였습니다. 로트랙이 ‘수잔 발라동의 초상’에 담은 로트랙의 여인이기도 했고, 드가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이 앞다퉈 그림으로 담아내려 했던 여성이었습니다.
▲1884년 Renoir가 그린 Susan Valadon
▲꼽추화가 로트랙이 그린 ‘수잔 발라동의 초상’
▲1895년의 에리크 사티(Erik Satie)
[삶의 향기] 겸손한 음악, 편안한 의자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중앙일보] 2015년 6월 16일
지난주 한 학생한테서 기대하지 않았던 e메일을 받았다. 에리크 사티의 ‘짐노페디’를 알게 해주어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인생에 꼭 필요한 충고나 위로를 준 것도, 장학금이나 일자리를 준 것도 아닌데 음악 한 곡 소개해주고 그런 말을 듣다니. 그만큼 짐노페디가 좋았나 보다. 하긴 그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 그 학생만도 아니다. 요즘 곳곳에서 사티의 음악이 인기를 얻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가난하게 살다가 90년 전에 홀로 세상을 떠난 사티. “나는 너무 늙은 세상에 너무 젊어서 왔던 것뿐이다(Je suis venu au monde tres jeune dans un temps tres vieux)”고 했던 그를 이제는 알아줄 수 있을 만큼 세상이 젊어진 것일까.
작곡가들에게는 일종의 허세가 있다. 드러내고 싶은 욕심이 클수록 작품은 필요 이상으로 복잡해지고 표현은 과장되기 일쑤다. 이 방면에는 바그너나 말러 같은 독일 작곡가들이 단연 최고다. 사티는 그처럼 과도하게 감정을 표출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오히려 단순하고 절제된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들과 다르게 산다는 것은 예술가들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명예와 인정을 포기해야 하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작곡가들이 세간의 주목을 받을 때 사티는 몽마르트르 카페의 피아니스트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나가야만 했다.
잘나가는 작곡가일수록 대접받기 좋아하고, 사람들이 자기 작품을 집중해서 경청하길 원한다. 연주자가 자기 작품을 잘못 해석했다거나 청중이 시끄럽게 잡담을 했다는 것은, 예로부터 변하지 않는 작곡가들의 불평목록 1호다. 만약 자신의 음악이 오늘날 식당이나 엘리베이터, 심지어 탈의실 같은 곳에서까지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면 그들이 얼마나 분개했을까. 하지만 사티라면 오히려 반가워했을지 모른다. 음악이 있어야 할 자리는 스포트라이트가 작렬하는 무대가 아니라 인간의 자연스러운 일상 속이라고 말했던 그이니까.
요란하고 거창한 것을 선호하는 게 옛이야기만도 아니다. 오늘도 텔레비전을 켜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가수들은 화려한 무대와 자극적인 안무로 우리의 눈과 귀를 자극한다. 늘씬한 체형의 가수들이 선보이는 춤과 노래 솜씨는 가히 세계적인 경쟁력을 자랑한다. 하지만 자극이 강할수록 쉽게 식상해지는 법. 그럴수록 더 자극적인 노래를 만들려는 경쟁은 뜨겁기 그지없다. 그러다 자칫 종국에는 음악이 소음으로 전락하지는 않을까.
그러니 환경음악이 주목을 받는 것일 게다. 현혹하거나 강요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고 가볍게 들을 수 있으니까. 게다가 뇌의 알파파를 자극해서 건강에도 좋다니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닌가. 그런 환경음악의 원조가 바로 사티다. 존 케이지한테 영향을 받은 브라이언 이노가 환경음악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지만 존 케이지에게 영감을 준 것이 사티였으니까. 그는 음악이 편안함과 온기를 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마치 집 안의 가구처럼. 이른바 ‘가구 음악’이다. 가구는 모름지기 자연스럽고 편안해야 한다. 아무리 비싼 가구라 해도 쓰기 불편하면 소용이 없고, 아무리 멋있어도 주위와 어울리지 않으면 그저 덩치 큰 애물단지일 뿐이다.
사티의 음악은 그래서 영화나 광고의 배경으로 인기가 매우 많다. 몰입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듣기에도 아름다운 음악으로 이보다 더 나은 것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티의 음악에 익숙해진 사람이 적지 않다. 정작 본인으로서야 그것이 사티 작품인지 알 리가 없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가구 같은 음악이라니. 모 침대회사가 짐노페디를 광고음악으로 쓴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이익을 추구하는 힘은 전율을 느낄 정도로 집요하고 때로 예리하다.
메르스 때문에 온 나라가 패닉 상태다. 하루하루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어이가 없을 정도로 허술한 늑장 대응, 황당한 변명과 생색내기 허세만 있을 뿐 믿을 만한 조치는 보이지 않는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화려하게 방을 장식할 값비싼 조각품이 아니다. 그저 방 한쪽 구석에서 지친 몸을 받아 줄 수 있는 편안한 의자일 뿐. 피곤한 우리를 쉬게 해 줄 우리 시대의 짐노페디가 절실하다.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에리크 사티(Erik Satie) ▲에릭 사티는 일생 동안 단 한 여자만 사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에릭 사티와 ‘난 널 원해’가 담긴 앨범.
에리크 알프레드 레슬리 사티(프랑스어: Éric Alfred Leslie Satie, 1866년 5월 17일 ~ 1925년 7월 1일)는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1884년 그의 첫 작품에 에리크 사티(Erik Satie)라고 c 대신 k를 써서 서명함으로써 그 이름으로 통용되게 되었다. 작곡 이외에도 사티는 가명을 사용해 다다이즘 전문지 '391'이나 대중문화를 다루는 'Vanity Fair'紙 등에 많은 글을 투고하였다. 사티는 20세기 파리 아방가르드 작곡가들 중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인물로 꼽히며, 미니멀리즘이나 부조리극 등 20세기 예술운동의 선구자로도 불린다.
노르망디에서 몽마르트르까지 에리크 사티는 옹플뢰르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아버지가 파리에서 번역가로 일을 하게 되어 파리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몇 년 후,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그는 다시 동생 콘라드와 함께 옹플뢰르로 돌아가 조부모와 같이 살게 된다. 사티는 고향에서 한 오르가니스트에게 그의 첫 음악 수업을 받았다. 1878년, 사티의 조모도 세상을 뜨게 되고 사티와 그의 동생은 다시 파리로 가 재혼한 아버지와 다시 같이 살게 된다.
1879년에 사티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나, 교사들에게서 재능이 없다는 평을 듣게 된다. 2년 반 동안 고향에 돌아가 있었던 그는 다시 파리 음악원에 재입학하게 되는 데 여전히 그의 교사들은 그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고 1년 후 사티에게는 의무적인 입영장이 날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사티는 군생활에 전혀 적응을 못했고 결국 몇 주 안가 탈영을 해버리게 된다.
1887년, 사티는 고향을 떠나 몽마르트르에 세를 들어 살기 시작하고 그 때부터 Patrice Contamine이라는 시인과 친교를 맺게 된다. 사티의 첫 작품도 그 당시 그의 아버지에 의해 출판되었고 르 샤트 누아르라는 카바레 카페의 단골이었던 드뷔시 등의 예술가들과 어울리게 된다. 사티의 작품 짐노페디, 오지브, 노시엥 등도 이때 잇달아 출판되었다. 1890년, 그는 같은 도시에서 좀 더 작은 방을 구해 이사를 한다. 그 다음해에는 장미십자단에서 작곡과 카펠마이스터를 맡게 되고 이때 《Salut Drapeau!》, 《Le Fils des étoiles》, 《Sonneries de la Rose+Croix》 등의 작품을 쓰게 된다.
1892년 중반에 즈음하여 그는 그만의 독특한 음악언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 해 가을,사티는 펠라당이 이끌고 있었던 장미십자단을 떠나 그의 친구 드 라뚜(Contamine de Latour)와 함께 발레작 유스푸드를 쓰기 시작했고 그의 생각에 공감했던 동료들은 그를 위해 독특한(마치 새로운 비밀종파의 팸플릿같은) 홍보 책자를 제작해준다. 또한 사티는 바그너의 오페라를 중심으로 한 당시의 낭만주의에 상당히 회의를 느끼고 있었으며, 《Le Bâtard de Tristan》이라는 이름의 반-바그너 주의 오페라의 초연을 광고하고 다녔으나 정작 작품은 작곡하지 않았다.
1893년, 사티는 화가이자 그림모델이었던 수잔 발라동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녀와 하룻밤을 보낸 사티는 그녀에게 결혼을 신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그 후 수잔은 사티가 살고 있던 곳의 옆방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사티는 점점 더 그녀에게 깊은 사랑을 느꼈다. 사티는 연애기간 중 종종 흥분에 휩싸여 그녀에 관한 글을 쓰거나 "심신의 평화"를 찾기 위해 《Danses Gothiques》라는 작품을 썼고 수잔은 그의 초상화를 그려 그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그러나 몇 개월 후 수잔 발라동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며 그를 떠났을 때 그는 아주 큰 비탄에 잠기게 되었다. 그녀와의 관계는 사티의 생애에 있어서 유일한 연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 위키백과
에리크 사티의 음악을 들으시려면 상단의 배경음악은 잠시 꺼주세요. The Best of Satie
Satie was a colourful figure in the early 20th century Parisian avant-garde. His work was a precursor to later artistic movements such as minimalism, repetitive music, and the Theatre of the Absurd.
An eccentric, Satie was introduced as a "gymnopedist" in 1887, shortly before writing his most famous compositions, the Gymnopédies. Later, he also referred to himself as a "phonometrician" (meaning "someone who measures sounds") preferring this designation to that of a "musician", after having been called "a clumsy but subtle technician" in a book on contemporary French composers published in 1911. In addition to his body of music, Satie also left a remarkable set of writings, having contributed work for a range of publications, from the dadaist 391 to the American culture chronicle Vanity Fair. Although in later life he prided himself on always publishing his work under his own name, in the late 19th century he appears to have used pseudonyms such as Virginie Lebeau and François de Paule in some of his published writings.
0:00 Gymnopédies No. 1 3:38 Gymnopédies No. 2 6:23 Gymnopédies No. 3 9:04 Gnossienne No. 1 12:28 Gnossienne No. 2 14:43 Gnossienne No. 3 17:37 Gnossienne No. 4 20:23 Gnossienne No. 5 23:43 Gnossienne No. 6 26:15 Poudre d'or 31:11 Les trois valses distinguées du précieux dégouté, I. Sa taille. Pas vite 32:04 Les trois valses distinguées du précieux dégouté, II. Son binocle. Très lent, s'il vous plaît 33:04 Les trois valses distinguées du précieux dégouté, III. Ses jambles. Déterminé 33:42 Avant-dernières pensées, I. Idylle. Modéré, je vous prie 34:41 Avant-dernières pensées, II. Aubade 35:51 Avant-dernières pensées, III. Méditation 36:43 Sarabande No. 1 42:04 Sarabande No. 3 46:20 Nocturne No. 1 49:48 Embryons desséchés, I. D'Holothurnie. Allez un peu 51:38 Embryons desséchés, II. D'Edriophthalma. Sombre 53:55 Embryons desséchés, III. De Podophthalma. Un peu vif 55:35 Sonatine bureaucratique 59:35 Je te veux 1:04:58 Socrate: Portrait de Socrate |
첫댓글 환경음악? 알듯 모를듯.
환경음악이란?...ㅎㅎ 사전에 따르면, 어떤 정해진 장소에서 강제로 듣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듣게 되는 소리나 음악을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리사이틀 무대에서 듣는 클래식이나 록음악처럼 무대에서 벌어지는 음악이 아니고 자연환경에서 편하게 듣는 음악이라 해야 하나요?